소설리스트

당가유혼-304화 (304/350)

304화

난다.

익숙한 구린 냄새가 난다.

‘이 냄새는, 자신의 일을 남에게 떠넘겨놓고 등쳐먹으려 하는 놈의 악취렷다?’

모두의 시선이 당가에 몰렸다.

어느새 한태상에게 의문을 제시하던 이는 쏙 들어가고 없고, 장내에 모든 관심은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가주. 부디, 결사대를 맡아주시겠소?”

표면적으론 부탁이지만, 그 근본은 강요와 다름없는 말.

이미 그 중요성을 잔뜩 강조해 놓은 뒤에 내뱉는 부탁의 탈을 뒤집어쓴 제안은 함정 그 자체였다.

‘이건 뭐, 거부해도 저쪽에선 이득이겠구만?’

승낙하면 당가는 필시 모용세가의 토벌 과정에서 손해를 볼 것이고, 거부하게 되면 사패천과의 전쟁에서 뒤로 물러난 모양새가 된다.

전자는 당가에게 병력적인 피해를 강요하는 것이고, 후자는 당가의 명성에 흠집을 내는 것.

‘진짜… 이제 와서 정치는 안 할 줄 알았다고 생각한 내가 멍청했다.’

진정한 정치는 전쟁통에 벌어지는 것을.

‘그래, 내가 또 한 수 배운다.’

저 사갈 같은 혓바닥에 감탄하며 나서려 했다.

이런 되지도 않는 문답은 나누는 것 자체가 멍청한 짓.

이럴 때는…….

“저희에게 결사대를 맡기신다는 것입니까?”

‘엥? 위혼아?’

남궁세가의 앞잡이에게 대신 답해 주려 할 때, 위혼이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설마…….’

정파 위선자 놈들의 정치질을 까먹고 있었구나, 통탄할 때 나는 문득 내가 까먹고 있는 게 하나 더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바로, 당가에 흐르는 유서 깊은 오지랖.

‘협객병이 또 도졌구나!’

남들이라면 미쳤냐고 학을 뗄 때, 당당하게 그러겠소, 하고 중후하게 목소리 깔아주는 게 당가의 가주란 족속들이었다.

‘내가 사유의 그 협객병 때문에 얼마나 속이 터져 죽을 뻔했는데!!’

저건 막아야 한다.

안 그러면 내 울화통이 먼저 터져버릴 게 뻔했다.

“잠ㄲ…….”

“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ㄲ… 에?”

뭐지?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너무나 단호한 거절의 표현.

보통은 완곡하게 돌려 말할 텐데, 그런 거 없이 선을 그어버리는 모습에 오히려 정파의 중진들이 웅성웅성거렸다.

“흠… 지금 거절하는 것이오?”

한태상 역시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거절할 줄은 몰랐는지 수염을 만지며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위혼아!! 너는 다르구나!!’

그래, 아무리 당가에 유서 깊게 흐르는 협객병이 있더라도, 저 미친 짓거리를 하겠다고 나서는 건 말도 안 된다.

비록, 전면에 나서서 사패천과의 선봉에 서겠다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어찌 결사대에 속해 안전한 후방에서 적을 교란시키겠습니까. 저와 본가는 선봉에 서서 사패천과의 전면전을 도모하려 합니다.”

“야, 이 미친… 웁웁!!”

“지, 진정하십쇼!”

“야, 너희 뭐 해! 대형 입 막아!!”

쏟아지는 무수한 손길의 세례가 나를 억압했다.

‘아니, 미친놈들아. 지금 막을 건 내가 아니라 저 녀석 아니야?!’

통한의 외침이 터져 나오지 못하고 소리 없는 아우성이 되었다.

하지만 그러건 말건 둘의 문답은 계속되었다.

“허… 전면전을 준비하신다라……”.

“그렇습니다.”

“몹시 당황스럽구려. 조금 전까지의 제 의견을 듣지 못하신 것이오?”

“아닙니다. 아주 잘 들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의 한태상과 시종일관 여상한 어조의 당위혼.

“그럼 대체……. 저는 실효성과 실현 가능성을 모두 고려하여 채택한 전략이라 생각합니다만… 가주의 의견은 다르십니까?”

오히려 저 늙은 여우 같은 양반이 안달을 내기 시작했고, 그런 한태상을 빤히 바라보던 위혼이가 문득 말했다.

“실효성과 실현 가능성이라… 확실히 연륜을 지니신 분다운 전략이었습니다. 다만, 제가 보기에 한 가지가 빠져 있군요.”

“한 가지라면?”

“이 전쟁에 휩쓸릴, 힘없는 양민들에 대한 관심입니다.”

“……!!”

미친.

나는 조용히 입 모양으로 그리 말했고, 한태상은 표정으로 그리 답했다.

“본가가 결사대를 조직하여 후방을 급습한다. 승률만 따진다면 그쪽이 분명 훨씬 높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방법을 택하였을 때, 양민들이 피해를 볼 가능성을 도저히 좌시할 수 없었습니다.”

“…설마, 사패천이 진군하며 양민들에게 해를 입힐 것을 고려하는 것이오? 허… 아니,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오?”

한태상으로서는 미칠 노릇.

전쟁이 일어나면 당연히 힘없는 양민들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이게 뭐 애들 장난도 아니고, 한 가지를 얻으면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하는데 지금 당가의 가주라는 사람이 그 당연한 법칙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보시오, 당가주. 이건 아이들 장난이 아니오.”

“저 역시 장난하는 게 아닙니다.”

“대의(大義)를 생각하십시오, 가주!”

결국 참다참다 못한 한태상이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하지만,

“대의(大義)?”

그 단어를 들은 위혼이의 표정이 딱딱히 굳었다.

“한 장로님. 지금 대의라고 하셨습니까?”

“그, 그렇소만?”

순간, 위혼이의 등 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무형의 기세가 한태상을 압박했다.

지금껏 가만히 자리를 지키며 어떤 말에도 이렇다 할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위혼이었지만, 한 번 그 기세를 드러내자 장내를 압도하는 분위기를 풍겼다.

터억―

당가를 위해 준비된 좌석, 그 선두에 있던 위혼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한태상을 마주했다.

“한 장로님. 정천맹이 설립된 대의가 무엇입니까?”

“그, 그야… 무너진 정파의 기치를 다시 세우기 위함이오.”

“정파라. 그렇다면 정파는 무엇입니까?”

“아니… 지금 나와 문답이나 나누고자 하는 것이오?”

이대로 가다가는 상대의 기세에 말린다 싶은 한태상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하나,

“중요한 것입니다.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자고로 기세란 한 번 눌리기 시작하면 끝도 없는 것.

밀리지 않았다면 모를까, 한 번 밀려버린 한태상으로서는 움찔 몸을 떨며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야… 협의를 지키고… 무림의 평화와 안녕을…….”

“바로 그렇습니다.”

뚝―

누더기 진 문장을 이어 가는 한태상의 말을 잘라내며 위혼이는 말했다.

“협의(俠義)입니다. 어쩔 수 없다고, 민중의 뜻을 짓밟는 대의(大義)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협의입니다.”

“가, 가주!”

“어째서 우리가 협객이라 불리는 것이겠습니까? 국가를 위하여,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민초를 짓밟는 대의에 대항하기 위하여 칼 한 자루 쥐고 천하를 방랑하는 이들로부터 우리는 시작되었습니다. 억울한 일 하소연할 곳도 없는 민초를 위해 검을 휘두르기 위해 우리는 때로는 법조차 무시합니다. 그런데 그 본질을 잊은 채 그저 대의만을 쫓는다면 대체 우리의 존재 의의가 무엇이겠습니까!”

실시간으로 X됐음을 직감한 한태상이 어떻게든 위혼이의 말을 자르려 했지만,

‘저거, 불붙었네.’

협객병 중증 말기 환자인 당위혼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정파가 정파인 이유는 우리가 정의(正義)를 쫓기 때문입니다. 하면, 대체 무엇이 정의라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아니…….”

“손해? 좀 입으면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맞서 싸워야 합니다!”

열변을 토하는 협의무새 당위혼은 강력했다.

원래 정파의 논쟁이란 명분 싸움이고, 명분의 싸움에 있어 협의보다 더 강력한 건 없었으니까.

결국 남궁세가의 최전방 참여가 논의되는 시점에서 회의는 흐지부지되었다.

나 역시 저놈들이 개소리할 때를 대비해서 논의 자체를 무효로 돌리기 위한 자료들을 가만히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개판이 따로 없구만.’

* * *

“이런 말 하면 조금 실례인 건 알지만… 자네 가주, 혹시 정신이 이상한 사람인가?”

아니, 조금이 아니라 엄청난 실례인데요?

회의가 중단되고, 청원이 나를 불러내 뱉은 말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왜냐고?

‘이걸 마냥 부정할 수가 없네…….’

다른 사람이 한 말이라면, 아니… 하다못해 다른 이를 대상으로 한 말이었다면 나 역시 화를 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이 협객병 중증 말기의 위혼이라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거, 우리 애가 뭐 어떻다고 그러십니까?”

“몰라서 묻나? 내 어지간하면 자네 가문을 정치적으로 몰아넣으려는 이들을 제지하려 끼어들려 했다네. 적당히 어울리는 시기를 찾고 있었지. 하나, 자네 가문의 가주가 하는 말에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네.”

“흠흠.”

청원은 연신 마른세수를 하며 얼굴을 쓸어 담았다.

가뜩이나 들이닥친 현실도 감당하기 버거운데, 위혼이가 그 판을 몇 배나 확장시키니 아주 정신이 어질어질해 보이는 모습.

하지만 슬픈 오해부터 하나 정정해 줄 필요성을 느꼈다.

“거, 저라고 마땅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닙니다.”

“부탁이니 개소리하지 말아주겠나?”

“아니, 진짜라니까요? 한낱 가솔인 제가 가주의 명을 어떻게 어깁니까?”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예.”

“이런 미친!”

진짜다.

내가 아무리 막 나간다지만, 위혼이의 명령을 정면으로 어길 수는 없는 법.

나도 정말 아니꼽고 싫지만, 위혼이가 사패천 놈들 하는 꼴을 더는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으니 전면전을 선포한다고 하면 그에 따를 수밖에 없다.

“방법이… 없겠나?”

이제 와서 사태를 깨닫고 처량하게 물어오는 청원이지만,

“거, 최선은 이런 일이 애초에 벌어지지 않게 했어야죠.”

“사패천 말인가? 그걸 내가 어떻게―”

“에이, 그거 말구요.”

다 아는 사람이 왜 이러시나?

“창천검문 말이에요, 창천검문.”

나도 사람이라 사패천이 미친 짓 하는 것까지는 어찌할 수 없는 걸 안다.

하지만,

“한 뭐시기가 입 터는 것까지 못 막을 것은… 솔직히 아니었잖아요?”

막고자 한다면 그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조금 전에는 때를 맞춰 적당히 한태상을 제지할 것이라 말했지만, 내가 볼 때는 영 아니거든.

“솔직히, 마음속 한편에는 본가의 세력이 어느 정도 약해지길 바라는 생각이 있었잖아요.”

“그건…….”

이미 여기까지 와서 부정하는 것도 웃긴 일이다.

제아무리 청원이 중립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해도, 그의 마음은 청성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이대로 당가가 끝없이 잘나가다 보면 먼 미래에도 청성이 설 자리가 없다 싶으니 이 기회에 조금이나마 약화시키려 했겠지.

“이해는 해요. 자신의 사문을 위하는 마음이야 누구나 다 하나같을 테니까.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해야죠. 지금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것. 저는, 그리고 당가는 더 이상 한배를 탄 사람이 노도 젓지 않고 놀고먹으려 드는 걸 두고 볼 생각은 없거든요.”

애매하게 간 보는 것들은 꼭 뒤통수를 친다.

삼십 년 전에 질리도록 당해 본 일이기에 더 이상은 겪고 싶지 않았다.

“…유념하지. 미안하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를 깨달은 청원은 고개 숙여 사과했다.

“뭐, 적당히 알아달라는 거니 그렇게 사과하실 필요까지는 없어요. 우리 좀 잘 봐달라고 적당히 부탁드리는 것이기도 하니까.”

지금까지는 무늬뿐인 맹주였지만, 이제부터는 그 권한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사천 내에 압축되어 있던 힘들이 전 무림으로 뻗어 나갈 테고, 그때는 맹주에게 가해지는 압력이 해소됨과 동시에 정천맹의 이름으로 행해진 업적 하나하나가 맹주의 힘이 될 것이다.

“그럼, 잘들 준비해 봅시다.”

이쪽도 협객병이 도진 가주님을 상대하려면 꽤 피곤한 시간을 보내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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