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위혼이를 찾아갔다.
대정천맹 맹주 청원 대협께는 허세를 부렸지만, 사실 쫄리는 것은 이쪽도 매한가지였다.
‘협객병은 전설의 신의가 살아와도 못 고치거든.’
당가의 협객병이 전설의 구음절맥도 양 뺨따귀를 갈기는 불치병이란 것은 이미 증명된 노릇. 위혼이가 차오르는 의기를 못 참아 당장 칼 뽑아들고 요녕으로 달려가자 하면, 나 역시 그 뒤를 쫓아 달리는 빵실이가 돼버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변명 한 보따리 가득 안아 들고 출정 명령을 기다리는 위혼이를 만나러 갔는데,
“알고 있습니다.”
후르륵―
언제나처럼 여상한 모습으로 독차 한 잔을 들이켠 위혼이는 현 상황을 짧게 일축했다.
“으응? 뭐라고?”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본가가 선봉에 서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는 것.”
“어…….”
“멸문과 다름없는 궤멸적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현 상태로 복구한 지 고작 일 년입니다. 방계들이 빠른 속도로 성장해 주고 있다지만, 가진 세력에 비해 무력 자체는 상당히 뒤떨어짐은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맞는 말이다.
단지, 가주의 입에서 들으니 뼈아픈 기분일 뿐.
“저도 양심이 있습니다. 지금의 권세조차 형님께서 불려주신 것과 다름없습니다. 제가 어찌 그 권세를 일확천금을 탕진하듯 개인의 욕망에 따라 부릴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렇게 말할 것까지는 아닌데……. 그럼 왜 회의에서는 선봉에 서겠다고 말한 거냐?”
“판을 엎을 필요가 있었으니까요. 가만히 있었다면 외통수인 상황 아니었습니까.”
세상에. 언제 위혼이가 이렇게 무럭무럭 자라났지?
창천검문의 장로 한태상이 설치해 둔 함정을 단박에 꿰뚫고, 판 자체를 엎어버림으로써 함정을 무용지물로 만들기 위해 일부로 그리 말했다고 한다.
노회한 정치 괴물들이나 할 법한 수법을 이리도 이른 나이에 해내다니…….
“하지만.”
그 모습에 감탄하고 있을 때, 문득 위혼이가 독차를 비워낸 찻잔을 바닥에 내려두며 목소리를 냈다.
“꼭 말하고 싶었습니다.”
“응?”
“당장은 무리일지 몰라도, 오히려 그렇기에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무엇을… 말이냐?”
“누군가는, 그렇게 대의라는 이름 앞에 짓눌리는 양민들을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을.”
“…아.”
순간, 장내에 침묵이 일었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이 녀석, 분노하고 있구나.’
들불처럼 번지는 분노가 아니라, 차갑게 내려앉는 혹한의 분노가 그것이었다.
“다들,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개중에는 분명 누군가는 협의를 부르짖던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서서히 마모되었겠지요.”
대회의장에서 있었던 일을 곱씹으며, 위혼이는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양심이란 다듬어지지 않아 우둘투둘한 쇠공과 같은 것입니다. 처음 굴렸을 땐, 이 부분 저 부분이 부딪쳐 저리 튀고 이리 튈 것이고, 그것이 마음에 남아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하지만 계속하여 굴리다 보면 결국 다듬어져 아무렇지도 않게 변합니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마치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위혼아…….”
“대의라는 이름 앞에, 어쩔 수 없다는 변명 뒤에, 숨을 곳 많은 타당하고 합리적인 피난처에 그들은 몸을 뉘였습니다. 그렇게 힘을 가진 이들이 숨자 힘없는 이들은 그저 신음하고 괴로워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런 세상에 저 하나만큼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 생각했습니다.”
“너는…….”
새삼스레 깨닫는 사실이 있다.
협객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이 협객이라 불리는 것은, 불합리함을 알면서도 스스로 그 불합리함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모르는 이들에게 감히 용기라는 단어를 붙여주지 않듯, 불합리함을 안다는 것은 세상 돌아가는 본질을 깨달았다는 말이니 결코 어리석을 수 없음이다.
오히려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아야 만이 가능한 것이기에,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당위혼이라는 무인은 그것을 똑바로 마주하려 하는 것이다.
“…….”
그 사실에 나는 가슴이 먹먹해져 오는 걸 느꼈다.
녀석의 등 뒤로 비추어지는 누군가의 모습이 너무나 짙게 비추어졌고, 그럼에도 나를 배려하여 스스로의 의지를 접어두는 것이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때,
“그래도 이걸로 어느 정도 시간은 벌었을 것입니다.”
무거운 침묵의 휘장을 드리워내듯, 위혼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응?”
“제가 한 것은 말도 안 되는 억지입니다. 하지만 다행히 저희 선조님들께서 해온 전례가 있으니, 당가에서 전면전을 원한다는 말을 마냥 허세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야… 그렇겠지.”
진짜 전면전으로 치달으면, 우리가 함께 가려는 집단은 무조건 궤멸적인 피해를 강요당할 수밖에 없다.
그건 꺼려지기에 창천검문의 한태상도 얌전히 입을 다물었던 것이고, 회의 역시 지지부진하게 파해진 것.
“일단은, 저희도 회의를 해봐야 할 듯합니다.”
본가와 취할 입장과 자세를 함께 의논하자고.
어느새 많이 커버린 모습으로, 가주로서 지엄한 명령을 내리는 위혼이의 모습에,
“그러자꾸나.”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 * *
대회의…라기에는 조금 초라한 회의가 열렸다.
바로 직전까지 정천맹 내부에서 전 무림의 내로라 하는 중진들을 모아놓고 하던 회의와는 비교되는, 얼마 없는 당가 방계 놈들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겨우 이룩한 가족회의.
구성원도 빈곤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대 당가의 앞길을 의논하고자 하는바, 나름대로 격식을 갖춘 회의가 열렸다.
“자, 주제는 우리의 행보다. 사패천 놈들이 뭘 잘못 먹었는지 발작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찌해야 할까? 너희가 의견을 한번 제시해 봐라.”
방계 놈들 모아놓고 회의를 시켜 놓으니 처음엔 서로 눈치만 봤다.
다들 이런 대회의는 어색하기 짝이 없고, 감히 자신 따위의 의견이 당가의 행보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부담감에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모양.
그럼 이럴 때면 나서야 할 놈이 있지.
“불퇴야.”
“예, 옙?”
“말해 봐라.”
“제… 제가요?”
“원래 시작은 네가 끊는 거 아니냐?”
“아니, 왜 이럴 때만……!!”
불퇴 녀석이 억울한 듯 잔뜩 볼을 부풀린다.
뭐지?
한 대 쳐달라는 뜻인가?
“악! 왜 때리십니까!!”
“또 쳐줄까?”
“당불퇴. 의견을 표하겠습니다!”
사이좋게 양쪽을 번갈아 후려쳐줄까 싶어 바라보자 알아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다.
모두를 둘러본 당불퇴는 이내 콧김을 뿜으며 말했다.
“뭘 고민하고 있습니까? 당장 찾아가야죠. 사패천 이 새끼들. 이름도 구린 게 하는 짓도 구릴 게 분명합니다!”
참석 의견 한 표.
별다른 근거는 없지만, 아무튼 참석해야 한다는 생각에 주먹을 움켜쥐고 붕붕 흔들자, 그에 대비되는 의견이 나왔다.
“잠깐. 그렇게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당불퇴가 열혈을 상징하다면, 냉혈을 상징하는 역할은 당연히 당율기.
자리에서 일어선 녀석은 당불퇴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본가의 전력은 사실상 여기 있는 이들이 전부입니다. 원정군을 구성할 만큼 여유가 있지 않습니다.”
“엥? 그게 무슨 소리야? 적석촌 아재들도 있잖아.”
“정신 차려. 그 사람들은 엄연히 말해서 본가의 전력이 될 수는 없어.”
“…뭐?”
지금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꿈뻑거리는 당불퇴를 향해 당율기가 다시 한번 말했다.
“결국 그분들은 외지인이다. 함께 지내고 있긴 하지만, 당가의 전력이라 할 수는 없어.”
“야… 너 말을 왜 그렇게…….”
“인정하기 싫냐? 하지만 받아들여라. 너와 나는 피를 나누지 않았지만 분명 가족이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야.”
“너…….”
냉정하게 선을 긋는 당율기의 말이 몇몇 방계들에게는 뼈아프게 들렸는지 인상을 구겼다. 그러나 주변 분위기가 차갑게 식음에도 당율기는 자신의 말을 수정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들 정신 차려. 본가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할 때가 불과 삼십 년 전이다. 무림에선 고작 한 세대 전이지. 그때 본가는 천하제일 협의지문으로 불리며 많은 호의를 베풀어왔다. 하지만 본가가 멸문의 위협에 처했을 때 우리에게 손을 내민 이들이 대체 어디가 있었지?”
“그, 그건…….”
“적석촌의 이들도, 율도촌의 이들도 우리에게 도움을 받았지. 구명지은의 은혜란 결코 가벼운 게 아니고, 그렇기에 지금 그들이 우리에게 보답을 해나가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을 바라는 건 억지야.”
냉담한 말을 뱉은 당율기는 곧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대형. 실망하셨을 수도 있겠지만, 이게 제 의견입니다.”
이성적인 당율기라고 내게 안 처맞은 것은 아니다. 그 이성이 무뎌질 정도로 처맞아 봤고, 이성적으로도 처맞아 봐서 이성적으로 공포가 각인된 율기다.
실제로도 저걸 보라.
꽉 쥔 두 주먹이 곧 날아올 폭력에 질려 덜덜 떨리고 있잖아.
하지만,
“뭘 실망까지야. 이번에는 진짜 너희 의견 다 존중한다. 마음껏 말해 봐라.”
그래서 우리 가주님도 빼놓고 왔잖아.
‘그 녀석이라면, 진짜 상처받을지 모르니까.’
아닌 척하는 위혼이지만, 녀석은 당가의 혼을 협의지심으로 보고 있다. 모두의 길을 존중하면서도 또 다들 자신과 함께 길을 걷길 바라는 녀석이기에, 저 말은 조금 상처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저런 의견이 과거에 없었던 건 아니니까.’
삼십 년 전.
지금보다 인구수가 몇 배는 많았을 때는 이보다 더한 의견도 많이 나왔다.
진짜 피를 나눈 형제지만 어떻게 이렇게 냉혹한 놈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니, 내가 냉혹해 봐야 형님보다 더합니까?! 나는 그래도 가족을 챙기자는 거지! 형님은 가족을 팼… 으아악!!”
‘생각해 보니 추억이네, 이거.’
율기라고 적석촌이나 율도촌의 촌민들과 교류하지 않는 건 아니다.
오히려 독초와 약초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게 되다 보니, 자연스레 그들에게 필요한 의약품은 율기가 건네주게 되었다.
또한 녀석은 무학(武學)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하기에, 또 다른 현상들을 알기 위해 다른 두 촌의 이들과도 함께 작업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도, 선은 명확하게 긋는다는 거지.’
아무래도 당율기의 협의는 조금 더 가족이라는 작은 범위에 포함되어 있는 면이 보였다.
그리고,
“…끙, 그래도 난 거기 동의할 수 없다.”
그런 율기와 반대되는 의견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
“나도 마찬가지야. 율기, 네 심정은 이해하겠지만… 난 그들까지 우리 가족이라 생각해.”
“맞아. 솔직히 소중하기로 따지면 네 녀석들이 더 소중한 건 맞아. 그래도, 그들 역시 우리 가족이라고.”
당불퇴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쪽과 비슷한 의견을 가진 이들이 반대표를 던졌고,
“야, 이 자식들아. 좀 진정해 봐!”
“네 녀석들 뜨거운 것은 알겠는데, 이건 차갑게 생각해야 한다고!”
다시 당율기와 의견이 비슷한 이들이 찬성표를 던졌다.
그야말로 물고 물리는 대립의 반복.
이것을 예상하고 불렀지만, 끊임없이 반박이 오가자 논의는 확실한 결과물을 내지 못하고 지지부진해졌고, 결국 보다 못한 당지명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안 되겠습니다, 대형. 대형의 의견을 들려주십시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순번은 돌고 돌아 내게 향했고, 방계들 역시 나 하나만을 바라보며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 무수한 시선 속에,
“뭘 고민하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파 놈들은 벌레야. 벌레는 때려잡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