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308화 (308/350)

308화

온 무림의 관심사가 요령을 향할 때, 그 소동을 만들어낸 사패천은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풍림화산(風林火山).

사패천의 누군가는 그들의 군사인 흑상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바람처럼 빠르고, 숲처럼 고요하며, 불길처럼 맹렬하지만, 산처럼 묵직하다.”

그 말은 몇 번의 실전을 거쳐 사패천의 모두가 인정하는 말이기도 했다.

자존심 강하고 성질 더럽기로는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놈들만 모아 놓은 구패의 수괴들을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철저히 실력을 검증받았기 때문.

실제로도 모용세가를 공격하겠다는 의견이 결론지어지자마자 사패천은 즉각적으로 움직였다.

정천맹에서 사패천 원정군을 꾸리겠다고 개개인이 물품을 준비하며 이런저런 시간이 지체되는 일은 사패천에게 존재하지 않았으니, 그건 그들의 근본에서부터 드러나는 차이점이었다.

“정천맹의 세력은 분명 저희보다 크고 강대할 겁니다. 하지만 그게 그들의 독이지요.”

실제로 사패천을 결성하고 정천맹과 승부를 결할 수 있다 자신한 흑상의 근거이기도 했다.

“세력이 큰 만큼 여유도 많습니다. 여유가 많아지면 인간은 자연스레 잡생각이 들지요. 당장 싸울 적이 눈앞에 있는데 속으로 다른 꿍꿍이를 한다든가, 사흘 뒤에 전투가 벌어지는 데도 그 이후 전리품 분배를 고민한다든가 하는 것들.”

당유혼이 경멸해 마지않는 정파 위선자들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본 흑상은 이윽고 자신들의 강점을 이리 말했다.

“그에 비해 저희는 굶주렸습니다. 구패라 불리지만, 그것도 고작해야 삼십 년도 되지 않은 시간. 이제 저 고우디 바르신 정파 위선자들과 맞서게 되었다지만, 그에 만족하기에 핍박받은 세월이 오죽 길겠습니까?”

구패라 불리지만, 그들 중 그 자리에 만족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제각기 더 나은, 더 높은, 더 위대한 무언가를 갈망했고, 그들의 욕망을 벼려내 서늘한 검으로 만드는 것은 흑상에게 있어 식은 죽 먹기였다.

“원하는 게 재물이든, 싸울 만한 상대이든, 훌륭한 강시든 상관없습니다. 어쨌거나 그것의 공통점은 유혈이 흐르는 전장에서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 그리고 마침, 저희는 지난 시간 그것들을 항상 준비해 왔지요.”

비축된 군량미는 충분하다.

과거, 성을 짓고 살던 이들은 언제나 유목민족들에게 박살이 났듯, 세력을 내리고 정치를 하던 이들은 언제나 칼 들고 그것을 강탈하려는 이들에게 목을 내줄 수밖에 없다.

녹림이든, 만검산장이든, 흑시문이든 군량은 넉넉했고, 그것을 유통할 경로로 최적화된 흑상이 있으니전투를 속행하기에 이만한 조건이 있을까?

더군다나 얼마 전 야차전을 턴 데 이어 마교 지부의 재물까지 노획해 온 그들은 승기까지 두 손에 가득 쥔 상태였다.

“가다듬기는 끝났습니다. 다시 전진하시지요.”

한 달의 재정비 기간이 끝나고 넘치는 힘을 가진 사패천은 그들의 역량을 모용세가를 향해 퍼부었다.

그건 실로 벼락같은 전진이었으니, 실제로 가만히 있다 얻어맞은 모용세가에게도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콰콰콰쾅!!

“끄아아악!!”

“동편이다! 동편에서 적이 몰려온다!!”

“젠장!! 막아!!”

굉음과 비명, 폭음이 고루 섞인 전장을 바라보며 흑상은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모용세가. 마교와 함께 무림맹이 와해되며, 기존의 노선을 버리고 정사지간의 가문으로 화했다더니… 과연, 기이한 부분이 있군요.”

그는 지금 전장이 훤히 보이는 어느 산등성이에 있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게 산등성이에 있을 수 있는가 싶은 전각 위에 있었다.

그것은 사패천의 수장들을 위한 예우이자 권력의 상징과 같았으니, 전장을 진두지휘하기 용이하게 만들어 놓은 지휘부였다.

“그러게 말일세. 저게 기문… 그 뭐시기라는 건가?”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자리에는 녹림의 투왕과 흑시문의 문주도 함께 있었다.

“기문둔갑일세, 투왕. 지난 삼십 년간, 전 무림에서 긁어모은 방술은 물론이요, 진법, 독술, 기문진 등등이 섞여 있군. 확실히, 무작정 돌파하려 했다면 곤란했겠어. 흘흘흘.”

공성의 난항을 말하는 것치고 흑시문주는 웃고 있었다.

왜냐면, 그들은 그 ‘무작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로 복잡하게 섞인 방어 시설이야. 그렇지만 복잡하다는 것은 곧 난잡하다는 것. 묘수가 아니라 단순히 눈속임에 가까운 어설픔이니, 진정 얼기설기 억지로 기워 놓은 누더기와 다름 없군.”

일정 수준 이하라면 저들의 방어를 뚫기 어려웠겠지만, 그 수준을 넘어서는 이들에겐 저들의 방어 수단을 뚫을 방법이 훤히 보였다.

예를 들자면,

“자, 하나 더 밀어 넣어 볼까.”

콰아앙!!

모용세가의 외벽 일부에 폭발이 일었다.

기존에 안쪽에서부터 풍겨 나오던 기이한 안개들이 그 폭발에 휘말려 내부가 드러나고, 마찬가지로 폭발에 휩쓸려 신음하는 모용세가의 무인들이 보였다.

“과연, 폭강시(爆僵屍)의 위력이 훌륭하군요.”

흑상이 적당히 감탄성을 흘려주자 흑시문주는 눈에 띄게 좋아하며 술잔을 들이켰다.

“아직은 시제품에 불과한 놈이지. 내구도는 그럭저럭 괜찮지만 유지력이 썩 좋지 않아 오래 동작시킬 수는 없으니 말일세.”

단점을 말하는 흑시문주지만 쭉 째진 입꼬리는 결코 불량품을 말하는 기색은 아니었고, 흑상 역시 그 기색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좋아 죽는군.’

사파라는 족속들이 어딘가 하나에 미쳐 있다는 사실이야 두말할 필요 없는 사실.

적당히 그의 기분을 맞춰 주는 흑상이었지만, 속으로는 그 역시 폭강시라는 기물의 위력에 조금은 감탄하는 중이었다.

‘인간의 몸뚱이에 폭약을 가득 담아 만든 생체 폭탄. 비록, 그 대가로 특수한 보관 장소에서 꺼내 작동시키면 그리 오래 살아 있지 못하지만, 위력 하나는 발군이야.’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벽력탄이라니. 모르는 이가 들었다면 재미없는 농담이라고 취급할 만큼 존재 자체가 놀라운 기물이었다.

‘수명이 약한 것을 대신하기 위해 특수한 약물로 내구도를 높였다. 대신 이동 속도가 느리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더 없이 위력적이군.’

빗발치는 화살비 속에서도 꾸역꾸역 목표 지역을 향해 나아가 폭발하는 폭강시들의 존재는 모용세가의 입장에선 재앙이었다.

그들은 독이 묻은 특수한 화살로 적들의 침범을 막아내려 했지만, 독강시에게 독화살은 일반 화살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독을 묻히느라 내구력이 저하된 독화살은 강시들의 딱딱하고 거친 피부에 부딪치는 족족 박살 나버렸고, 방술을 겸하느라 무공의 경지가 그리 고강하지도 못했던 모용세가의 무인들은 저 압도적인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폭강시의 활약 덕분에 저들의 외벽은 곧 파괴될 겁니다. 그때까지 병력들을 대기시키다가 일거에 밀어붙이면 될 겁니다. 혹여 저들이 밤중을 틈타 독강시 보관소를 급습하지 않게만 주의하여 주십시오.”

“클클, 물론이지.”

“걱정 말게나.”

이미 모용세가를 둘러싼 포위망까지 빈틈없이 형성된 상태였기에 급할 건 조금도 없었다.

그때, 그들이 머무르는 전각 앞으로 산적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급보입니다!”

“응? 무슨 일이더냐?”

“정천맹이 대군을 이끌고 사천을 벗어났다고 합니다!”

“드디어!”

정천맹이 출전한다는 사실이야 익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곁에 세작을 붙여두고 있었는데, 이제 그 소식이 전달되었다.

“자네의 예측이 정확하군. 딱 이맘때쯤 출발할 것 같다더니.”

“그들의 늦장이야 뻔한 일이지요.”

자신들의 모용세가 공격 사실을 알아도 한참이나 걸릴 것이란 예측은 정확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에 따라 투왕은 자신 앞에 놓인 술잔을 들이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내 차례인가?”

“예, 부탁드립니다.”

모든 것이 예상한 대로.

흑상은 여유로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최소 삼 할. 정천맹의 전력을 줄일 기회입니다.”

* * *

사천성주가 직접 출정식까지 진행한 토벌대가 요령을 향해 출발했다.

남궁세가를 비롯한 대문파들은 토벌대가 출발하는 그 날까지 어떻게든 편제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꿔보려 했지만,

‘어림도 없지.’

성주의 어마어마한 권능은 그들의 같잖은 발악을 단박에 찍어눌렀고, 반푼이 정치인인 정치 무인은 진정한 정치인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진정한 대협의 길을 향해 요령으로 진군했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 사천당가 역시 어마어마한 중임을 맡게 되었다.

그건 바로,

“얘들아, 물자 다 빠짐없지?”

“몇 번이고 확인했수다!”

“웃기고 있네! 당주 형님, 저놈이 육포 빼돌리는 거 내가 분명 봤음다!

“헉! 이 치사한 놈! 그걸 이르고 있냐?!”

“불퇴야… 우리 임무가 물자의 호송인데, 그걸 우리가 빼돌리면 어찌하려는 게냐…….”

물자 수송과 호송의 임무였다.

‘후우, 수천 명의 보급과 배급이 우리 당가에게 달렸다니. 정말 막중한 임무군.’

얼마나 책임감이 무거운지 입꼬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한가 놈, 떠나는 그 모습을 모두가 함께 봤어야 하는데.’

사천에서 요령까지면 사실상 중원을 횡단한다고 봐야 하는 어마어마한 초장거리.

그에 따른 물자의 호송은 상당히 중책이었고, 정천맹에서는 당연 갑론을박 의견이 갈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천성주의 지엄한 눈빛은 당가를 가리켰으니, 그 날로 호송 담당은 당가로 낙점되었다.

“이건 말도 안 되오! 어째서 당가라는 최고 전력이 전투 담당이 아닌 호송 임무 따위를 맡을 수 있는 것이오!”

물론,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어지간하면 사천성주의 말에 정면으로 거스르려 하지 않을 테지만, 전쟁을 앞두고 사천제일세라는 당가가 후방 임무로 빠진다는 것에 쉬이 납득할 이들은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당가에는 여러모로 억지를 부릴 여지가 많았다.

“아니, 물자를 담당하는 상단이 직접 당가에게 호위를 받지 않으면 일하지 않겠다고 하잖아요!”

“우리라고, 어? 싸우기 싫을 줄 알아요? 예? 성주님이 시키잖아!”

“그리고, 물자의 배급을 담당하는 일이 어떻게 따위가 됩니까? 밥 굶고 싶어요?”

광명상단과 장강수로상단이라는 걸출한 두 상단의 요청이,

사천성주의 지엄한 명령이,

마지막으로 적당히 섞인 협박이,

모두모두 힘을 합쳐 사악한 정파 위선자들의 모략을 쳐내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버티던 한태상 역시 결국에는 포권을 취하며 잘 부탁한다며 떠나갔고, 고민 또 고민하다가 제발 보급에 사적인 감정이 섞이는 일만은 없도록 해달라며 간곡한 유언을 남겼다.

‘걱정 마. 밥 가지고 장난치는 일은 없을 거야.’

마음 같으면 쫄딱 굶기고 싶지만, 한때 그런 더러운 장난질에 당해 본 입장에서 맹세컨대 거기까지는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빼먹고, 적당히 사리면서 가라.”

녀석들과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주의사항 등을 열거하고 또 열거했다.

“알겠습니다, 대형.”

“천천히 가고, …솔직히, 너희를 놔뒀다가는 꼭 사고 칠 것 같으니 불안함에 발이 잘 안 떨어지는 게 내 진심이다.”

진짜 이놈들을 이렇게 보내는 게 맞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더 미뤘다가는… 안 될 것 같으니까.’

최대한 이 녀석들이 별다른 사건 사고에 연유되지 않도록 경고하고 또 경고했지만, 그럼에도 걱정되는 마음을 완전히 지워내기는 힘들었다.

“일 생기면 빨리 튀어라. 괜히 너희 손에서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라 자만하지 말고.”

몇 번을 말해도 영 걱정되기 그지없는 마음.

“걱정마십시오, 대형. 제가 애들 잘 챙기겠습니다.”

‘…네가 제일 걱정이라서 그래, 위혼아.’

무려 당가의 가주까지 함께 떠나는 여정이다.

솔직히, 다른 놈들은 알아서 잘 튈 것 같은데, 이 녀석은 협객병이 도질까 봐 그게 걱정.

그래도,

“…그래, 잘 부탁하마.”

어쩌겠냐.

믿고 맡길 것은 결국 고금 제이 가주인 위혼이 녀석뿐인 것을.

“이번 일만 끝내고 빠르게 뒤따라가마.”

아이를 물가에 내놓은 어미의 심정.

하지만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이별을 미뤄서야 서로 안 좋다는 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작별을 고하며 내 길을 찾아 나섰다.

‘가자.’

무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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