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무던한 시간이 흘렀다.
비통한 슬픔에 잠긴 동굴 내부의 공간은 축축하게 젖은 이끼처럼 무거웠지만, 습기 찬 새벽도 해가 떠오르면 다시 따사로운 새날이 시작되듯 시간의 흐름 속에 슬픔마저 옅어져 갔다.
“다 울었냐?”
- …울긴 누가 울었나.
눈물을 닦아줄 손도, 눈물을 흘릴 눈도 없지만… 어떻게 어떻게 슬픔을 털어낸 신승을 보며 피식 웃었다.
“다 큰 놈이 울기는.”
- 안 울었다고 했다.
“그래, 안 울었겠지.”
천하의 신승이잖냐.
나는 씨익 웃으며 그리 말했고, 녀석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덕분에 찾아온 침묵이 거두어지는 것은 제법 시간이 지나서였다.
- …독종.
“말해.”
- 우리가 싸우던 나날을 기억하나?
“기억하지.”
애초에, 잊을 수가 없는 나날들이었으니까.
“언젠가, 이 모든 싸움이 끝나고… 설령 우리의 싸움이 덧없던 한날의 꿈이어도 좋으니, 지루하기 짝이 없는 평화가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빌어먹게도 좋겠다고… 그렇게 얘기들 했었지.”
- 그래, 입이 닳도록 한 말이었다네.
그가 쿡쿡 웃었다.
- 나와 검천은 이제 반쯤 인간이길 포기하였다네. 그리고 나는 이제 곧 성불하여 이 끝없는 증오의 연쇄에서 풀려날 걸세.
“지금 자랑하는 거냐?”
뭐지? 지금 나 혼자 계속 싸워야 한다고 도발하는 건가?
- 독종, 자네도 얼마 남지 않았네.
“…뭐?”
- 나나 검천이나 말일세. 그래도 그 긴 세월을 살아가다 보니 조금씩은 보이는 게 생겨 가더란 말일세. 그리고 그 덕에 알게 되었지. 이 기나긴 싸움이… 삼십 년이 지난 이제야 그 끝을 맞이할 것임을.
“잠깐만, 그게 무슨 뜻이야?”
이제 그 끝을 맞이한다고?
어차피 모든 투쟁이란 그 끝을 맞이하기 마련이다.
누군가가 승리하든, 누군가가 패배하든.
그것에 의아함을 느낄 이유는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째서 ‘이제야’라는 것이다.
“신승. 대체… 무엇을 보았다는 거냐?”
- 그건…….
신승은 이제 없고 그 의지만이 남았음에도 그 파편은 침음을 삼켰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고, 많은 것을 생각하는 듯했다.
남겨진 의지가 이러할진대, 살아생전 이 녀석은 얼마나 많이 궁구했을까?
- 독천. 자네는 윤회(輪廻)에 대하여 아는가?
“뭐? 갑자기 여기서 불가의 개념이 왜 나오는 거냐?”
- 윤회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네. 분명히 존재하는 현상이지. 이 세상에 삼라만상이 존재하고, 그것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그 모든 것이 윤회의 일륜(一輪).
신승의 설명에 따라 장내의 대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바닥에 자욱하게 깔린 먼지들이 떠오르며 회전하기 시작했고, 수레바퀴처럼 구르는 그것은 모여 하나의 구를 이루었다.
- 흩어진 것이 뭉치고, 뭉친 것은 흩어진다. 나 또한 죽음으로써 그 일륜으로 섞여 들어갔다네.
서서히 떠오르는 먼지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회전하는 구체의 숫자로 늘어났다.
그것은 마치 밤하늘 별 무리를 보는 것만 같았으니, 이 작은 동굴 속에서 실로 장엄하게 펼쳐지던 광경을 보던 중 신승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런데 그 과정 중 나는 보고 말았지. 그 속에서 흩어졌던 세 줄기의 흐름이 다시금 하나로 합일(合一) 하려는 거대한 윤회를.
그와 함께 뭉쳐있던 구체들 몇몇이 다시금 저들끼리 뭉치더니 거대한 세 개의 구체로 화했다.
그중 하나가 내게 날아왔고, 명치 부근 앞에서 멈춰 섰다.
- 그것이 바로, 자네였네.
“…나, 라고?”
- 그렇다네.
거대한 구체는 다른 것에 비해 여러모로 부족해 보였다.
세 개의 구체 중 하나는 특히 거대했고, 이미 완성 직전에 이르러 있는 듯했다.
또 다른 하나는 겉면에는 아직 그에 준하지 못할 뿐 꽤나 완성도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내 명치 앞에 도달한 구체는 구멍이 듬성듬성 뚫려서는, 가장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그 중심을 구성하는 핵만은 가장 단단해 보인다는 것이 위안이 되는 수준이었으나, 다른 것에 비하자면 전체적으로 한참이나 부족했다.
- 천마, 불가살이 그리고 독천. 셋은 이 세상의 거대한 흐름 속에 연결되어 있었네. 검천은 비록 여기까지 보진 못했지만, 나는 일순의 흐름으로 합일되는 중이었기에 그것을 볼 수 있었고 이날 자네들이 부활할 것을 확신했네.
“잠깐만, 나 지금 이야기를 따라가기 힘든데…….”
- 이해한다네. 자네는 지난 삼십 년간 이 삼라만상의 먼지와 같았다네.
“내가…….”
- 먼지와 같았다네.
“…은근히, 그걸 강조하는 것 같다?”
왜 하필 먼지인 거야?
- 먼지와 같았… 알겠네, 진정하게.
내 앞에 뭉친 구체를 으스러트려서야 녀석은 삼창하려는 걸 멈추고 이어 말했다.
- 그중 가장 거대한 구체는 불가살이라네. 자네와 천마가 삼십 년 전 소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세상의 먼지… 진짜라네, 비유상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자네들과 천마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동안에도 불가살이는 사라지지 않고 극심한 부상을 입은 채 세상을 전전했었다네. 그리고 셋 중 누구보다 빠르게 본신의 힘을 회복하고, 오히려 키워 나갔지.
그것이 가장 거대한 구체.
완성 직전에 이르러, 단 한 조각만을 남기고 있는 무언가.
“그 한 조각은 아마도… 검천이 직접 온 힘을 다 바쳐 봉인하고 있는 그 오른팔이겠지.”
- 그렇다네. 그것이 검천이 아직까지 이 땅에 남아, 자신의 존재를 무당의 영기에 기대 못 박은 채 버티고 있는 이유. 그리고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천마 역시 빠르게 스스로의 존재를 되찾아갔네. 그것은…….
“마교도, 그 광신도 놈들이겠지.”
- 정확하네. 그들이, 소멸한 그를 다시금 이 땅에 불렀다네.
“…미친 광신도 놈들.”
이래서 광신도 놈들이 문제다.
죽은 놈 구천을 떠돌든 머나먼 명계로 떠나든 알아서 놔두면 될 것을, 그걸 기어코 바짓가랑이 잡고 매달려 이 사달을 만들어 내다니.
“왜 이렇게 독해?”
- 후후, 독하기로 따지면 자네만 하겠나?
“내가 뭐?”
- 찾는 이도 없건만, 홀로 구천을 방황하다가도 기어코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나.
상대하는 입장에서 자네만큼 끔찍한 이도 없겠지.
“……?”
뭐지?
그런 건가?
-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자네가 가장 불리하단 것일세.
“…그래, 그거 하나만큼은 알겠네.”
한 놈은 애초에 탈락되지도 않았고, 또 한 놈은 다른 놈들이 불러줘서 진작 몸집을 불렸다.
그런데 나란 놈은 애초에 장외로 탈락했다가 이제야 겨우 세상에 돌아왔고, 그마저도 망한 집안 살리느라 아등바등하고 있었단다.
“이거… 나만 완전 불리하잖아?”
- 많이 불리하지.
누군가는 이미 저만치 앞서 나가고 있고, 누군가는 뒤에서 다른 이들이 밀어주고 있다.
그런데 그동안 나는?
‘출발선까지 다른 놈들을 끙차끙차 끌어가고 있으니…….’
진짜, 다 때려치고 집에 돌아가서 빵실이 빵뎅이나 두들겨주고 싶다.
- 큭큭, 그런 표정 짓지 말게. 그를 위해 우리 역시 삼십 년간 준비한 안배가 있으니까.
“때, 땡중……!”
살아 있을 적엔 개똥만큼도 쓸모없더니!!
- 굉장히 무례한 생각을 하는 것 같긴 한데, 우선 첫 번째는 자네도 봤을 테지. 밖에 있는 저 아이들일세. 백 하고도 여덟 명의 나한. 자네도 들어 알고 있겠지? 소림의 전설이자, 삼십 년 전에는 미처 필요할 거라 생각하지 못하여 소림에 있지 않았던 소림 최대 최흉의 존재들을.
“…기억하지, 그리고, 그때는 솔직히 못 믿었기도 했고.”
- 수행 끝에 번뇌가 소멸되어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한 이들을 나한(羅漢)이라 칭하지. 물론, 인간이 실제 그 경지에 달할 수는 없지만, 극한의 수련을 반복하여 경지에 도달한 이들을 소림에선 나한이라 칭한다네.
그리고,
- 그런 이들이 백 하고 여덟 명이 모였을 때만 사용할 수 있는 진법이 있으니, 이를 가리켜 본사의 오랜 고서에서는 이리 칭했다네.
소림 제일의 진법.
아니,
무림 제일의 진법.
-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陳)이라고.
‘백팔나한진이라…….’
소림의 역사에서도 전설이라 불리는 진법이었다.
그 자체가 무림의 역사와 동일시 되는 소림의 기록 속 백팔나한진이 펼쳐졌던 것은 한 손에 꼽힌다.
그때마다 무림은 종말의 위기를 마주해야 했고, 그때마다 백팔나한진은 전설 속에서 실존함을 증명하며 그와 맞서 싸웠다.
그 결과, 단 한 번도 뚫린 적이 없었던 것이 백팔나한진이니, 그 자체가 당가의 팔대금기를 웃도는 수준의 비전이었다.
“그거 만드는 데… 돈 꽤나 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야.”
- 오면서 못 봤나? 본승이 소림의 기둥뿌리를 보았다네.
클클클, 웃음소리가 동굴 내에 울려 퍼졌지만 그건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
‘백팔나한진이 만들어지는 데만 백 년이 걸린다고 했던가.’
과거 악전고투 속 백팔나한진을 부활시키지 못해 한탄하던 신승이 말했던 게 있다.
백팔나한진은 하나하나가 벽에 이르른 무인을 양성해야 하고, 그들을 키우는 데도 막대한 영약을 필요로 한다고.
무림뿐 아니라 온 중원에서 막대한 기부금을 쌓은 소림에서조차 휘청거릴 만큼 막대한 시간과 자본이 투자되는 게 백팔나한진인 만큼, 삼십 년 전 그 끔찍한 전란에서도 감히 부활시킬 생각을 못했다.
그런데 그걸 전란 이후 삼십 년 만에 완성시켜야 한다면?
‘말 그대로… 소림의 모든 것을 걸었겠지.’
당가가 외세에 몰락할 동안 소림이 간섭하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그들 역시, 진정 외부로 조금의 눈길도 돌리지 못할 만큼 간절했던 것이다.
- 흘흘, 물론 그게 끝이 아닐세. 그것이 끝이었다면 자네 앞에 이리 당당히 나타나지도 않았겠지.
“이게 끝이 아니라고?”
- 자네도 알지 않나. 저들이 암만 뒤를 받쳐 준다 해도, 천마에게는 부족하다는 것을.
“그건…….”
맞는 말이다.
아무리 낙관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백팔나한진은 공격이 아닌 방어를 위한 진법이다.
천마가 소림 한복판에 뚝 떨어져 준다고 하면 몰라도, 천마는 바보가 아니고 그를 추종하는 마교는 간악하기로 이 세상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놈들.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겠지.’
백팔나한진은 어디까지나 내가 천마를 일대일로 사생결단 낼 때, 다른 놈들로부터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을 해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로 가능할까?”
나는 약해졌다.
남들이 보기에 무지막지한 속도로 강해지고 있다지만, 이전의 경지를 따라잡기는 한참이나 남았고, 천마는 그 경지를 되찾는다 해도 이길 수 있다 확신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 클클, 두렵나? 천하의 독종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는군.
아니, 이 자식이?
“개소리하지 마. 내가 두려운 건 천마 따위가 아냐.”
한 번 죽인 놈 두 번을 못 죽일까?
무시무시한 놈이 맞긴 해도, 다시 싸우라고 해서 못 싸울 건 없다.
다만,
“내가 두려운 건…….”
- 지키지 못하는 것이겠지.
“…….”
그래, 맞는 말이다.
삼십 년 전, 나는 천하무림의 안녕과 평화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내게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맞서 싸웠고,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으나 그에 두려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맞아. 나는, 지키지 못했으니까.”
구천을 방황하다 돌아온 고향이, 나의 집이, 나의 가족들이… 모두 사라져 있던 그때를 차마 잊을 수가 없다.
- 클클, 그래. 그게 독종이지. 세상엔 누구보다 지독하다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여렸던. 누구보다 자신의 가족을 사랑했기에, 누구보다 지독해질 수밖에 없었던.
나와 오랜 시간 함께했던 신승이기에, 나의 나약함을 꿰뚫어보며 씨익 웃었다.
- 그렇다면 묻겠네, 독종. 반대로 자네는 그들을 지킬 수 있다면, 설령 그들과 함께할 수 없어도 다시 한번 죽음으로 스스로를 내던질 수 있겠나?
“뭐?”
- 자네의 각오를 묻는 걸세. 삼십 년이 지난 지금, 새롭게 만든 인연들이 있겠지. 다시 한번 그들과 이별하여 다시 만날 수 없다 해도, 또 한 번 고독한 죽음을 향해 걸어갈 수 있겠나?
그리고 물었다.
녀석의 질문은 내 마음에 던져진 작은 조약돌과 같았고, 그럼에도 거대한 파문과 함께 내게 와 닿았다.
‘또, 그 고독을 향해 갈 수 있겠냐고?’
지난 삼십 년의 기억이 내게는 없다.
하지만 부활한 뒤 어렴풋한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인지하지 못하던 무의식 속 느꼈던 외로움이 하나둘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말마따나 구천을 방황하는 길 잃은 혼(魂)이었으며, 그렇게 흐르고 또 흐르다 어찌어찌 고향으로 돌아와 눈을 떴다.
천산 어귀에서 눈을 떴을 때 느낀 고독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억지로 유난을 떨며 사천까지 달려왔다.
너무나도, 너무나도 보고 싶은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지만 돌아온 순간 내가 마주해야 했던 것은… 알면서도 억지로 모른 척하려 했던 현실.
‘목숨을 건다고 모든 게 이루어지는 편한 세상이 아니다.’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잔혹한 현실은 내게 절망을 선사했다.
그러나,
“참, 같잖은 질문이야.”
그렇다 해서, 내 답이 변한다면 그것은 더더욱 멍청한 일.
“한 번 했는데, 두 번은 못 하겠냐?”
설령 잊혀진다 해도 상관없었기에 죽음을 향해 나아갔고, 모든 게 무너져 내린 잔해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을 보았기에 다시금 일어설 수 있었다.
- 흐음?
“예전엔 나 없으면 다 안 되는 줄 알고 있었거든. 그런데 좀 다르더라고.”
내가 없어도, 나의 혼을 이어주는 이들이 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당가의 혼(魂)은 이어져 있었다.
그것을 두 눈으로 목도했기에, 지금의 나는 천마와의 싸움에 만전을 기할지언즉 다시 한번 재전을 열 자신이 있었다.
“당가유혼(唐家流魂). 당가의 혼은 흘러서 이어진다. 이 말을 예전에 사유 녀석이 했을 때는 그 뜻을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이제 그 뜻을 알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고독? 그쯤이야 웃으면서 걸어가지.”
- 큭, 크크크크, 크크흐흐… 그러하더냐?
내 자신감 어린 확답에 그는 껄껄 웃었다.
- 역시,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 나의 친우여!
동굴 안이 웃음소리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고, 그 속에서 고승은 말했다.
- 그래, 그렇다면 가져가거라. 이것이 내 마지막 선물일지니.
파스스…….
거대한 떨림과 함께 고승의 시체는 가루가 되어 흩날렸고, 대신하여 상서로운 기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 나는 먼저 갈 터이니, 그곳에서 이와 함께 너를 응원하마.
마침내 녀석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 자리에는 하나의 단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건…….”
그 정체를 직감한 나는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대환단(大丸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