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화
눈을 뜨니 예의 그 동굴이 보였다.
가부좌를 튼 천권이 있던 자리에는 낡은 가사만이 먼지 위를 뒹굴고 있었고, 그 모습에 나는 입맛이 씁쓸해지는 걸 느꼈다.
“매정한 녀석. 뭐가 그렇게 서둘러 떠난 거냐.”
낡고 헤진 가사를 거두어 곱게 접어 밖으로 빠져나갔다.
기다리고 있던 백팔나한들이 포권을 취해 왔고, 그들에게 천권의 가사를 건네주었다.
그러자 선두에 있던 무승이 고개를 숙여왔다.
“그분의 임종을 함께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들은 천권의 최후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본 마지막 모습이란, 내게 마지막 안배를 남기기 위해 스스로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천권의 뒷모습이었을 테니까.
“아닙니다.”
가족의 임종을 대신하였다는 것은 과연 감사받을 일일까?
저들에게 천권은 가장 큰 어른이었을 것이고, 자신들을 키워준 아버지였을 것이며, 정신적 지주였을 것이다.
그런 천권이 오로지 나를 위하여 저들과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했고, 저들 역시 나 때문에 천권과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했을 테니 나는 저들에게 감사를 받을 자격이 없었다.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고작 그거뿐.
고맙다고 하기에 나는 저들에게 죄인이었고, 미안하다고 하기에 저들의 각오에 모욕이 될 테니까.
우리는 짧게 서로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각오를 대신했고, 다시금 고개를 들었을 땐 서로 눈을 마주하며 ‘해야 할 일’을 논할 뿐이었다.
“제가 들어간 뒤로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습니까?”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한 달…….”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시간이 많이 없을 테니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마교의 동태를 파악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가타부타 첨언은 없었다.
저들은 오로지 마교를 상대하기 위해 삼십 년 동안 대기한 이들.
여기서 어설픈 감상이 끼었다가는 저들의 각오를 모욕할 뿐이다.
“그럼.”
처음 방문했을 때와 같은 자세로 포권을 취하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가야 할 길이 멀었다.
* * *
소림을 내려온 뒤 우선 향한 곳은 사천이었다.
한 달이란 긴 시간은 전선에 변화가 생겼어도 수십 번은 더 생겼을 시간이었다.
그만큼 가파르게 흘러가는 것이 전선이라는 곳인 만큼,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정확한 정보였다.
만약 그동안 정천맹이 가진 바 전력을 잘 이용해 사패천을 무너트렸다면 좋겠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돌아갈 리 있나.’
항상 긍정적인 경우보단 최악을 상정하는 게 훨씬 현명한 게 세상 이치다.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불길함에 빠르게 경신법을 발휘해 하오문 사천지부로 향했다.
“하윤호!”
“아이고, 공자님!! 어디 있다가 이제 돌아오셨습니까요!!”
내가 갑자기 들이닥쳤음에도 오히려 반기는 하윤호의 모습에 이미 사달이 터졌다는 걸 직감했다.
“설명할 시간 없어.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지?”
“어디까지…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요?”
“아무것도 몰라. 한 달 전에 일행과 헤어졌고, 그다음부턴 산에 처박혀 있었어.”
“예? 산은 대체 왜… 아니, 아니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내 말에 황당해하는 하윤호였지만, 녀석도 우선 급한 게 무엇인지 잘 알았기에 말을 이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상황이 몹시 좋지 않습니다요. 발단은 공자님이 사라진 한 달 전… 아니, 그 직후! 사패천은 정천맹의 토벌군이 그 수많은 인구 때문에 여러 갈래로 갈라져 온다는 점을 지독하게 이용했습니다요.”
녀석의 설명은 당시의 처참함을 잘 표현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무슨 그런 병신같은 놈들이 다 있어?! 당할 게 없어서 산적 놈들한테 각개 격파를 당한다고?!”
아군이 공격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뜩이나 나뉘었던 인원이 이리저리 쪼개지고, 그러다가 녹림칠십이채의 산적들에게 기습을 당했단다.
개개인의 무력만 따지면 정천맹 구성원의 무력이 한 수 위일 테지만, 하필 기습 장소로 유도된 곳이 산적 놈들의 앞마당인 험한 산기슭.
게다가, 예하 부대 개념으로 평소엔 예비군마냥 대기만 하다가 전시에만 보이는 부대 특성상 그들의 합도 끔찍하게 맞지 않았다.
‘그에 비해 산적 놈들은 맨날 하던 짓이었겠지.’
산기슭을 지나던 행렬을 습격하고, 혼란을 틈타 병력을 갉아먹는다.
정규전에는 약해도, 산악에서의 기습적이고 변칙적인 난전에 강한 산적 놈들의 특성상 정천맹의 원정군은 제대로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할 뿐.’
진짜 문제는 그들의 신뢰 관계에 금이 갔다는 사실이다.
‘가뜩이나 합이 맞지 않는 이들일 텐데, 이후부터는 서로 간에 소통도 되지 않았겠지.’
기껏 다른 이들을 도우러 갔다가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그들이다. 이제부턴 남을 함부로 돕는 것도 망설여질 것이고, 정상적인 명령을 수행할 때도 혹시 기습을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설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고질적인 전의의 하락으로 이어지면, 그 전장은 지금쯤 지옥일 것이다.
“그럼에도 후퇴는 하지 않았겠지?”
“…그게, 청룡단과 주작단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요.”
“그랬겠지.”
그들이라고 계략을 당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들쯤 되면 어설픈 간계에 속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그들의 자존심이 기습을 당한 이들에게 오히려 그들이 멍청해서 당했다는 지탄으로 화했을 것이다.
‘균열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임을…….’
“해서, 현 상황은?”
“그, 그게…….”
“뭐야? 왜 말을 하다 말고 망설여? 우리 애들은 그딴 병신 같은 계략에 안 속아 넘어갔다며?”
“그렇습지요……. 당가의 영웅들께선 가주님의 뛰어난 판단력으로 모든 함정을 돌파하셨습니다요. 하지만…….”
하지만 뭐.
왜 말을 하다 말아.
‘사람 불안해지게… 잠깐만.’
순간 불길한 상상이 머리를 스쳤다.
“함정은 돌파했다… 그 말은, 혹시 함정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는 말이냐?”
“그, 그게…….”
하윤호는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
두 눈을 감은 것은 녀석인데, 정작 내 눈앞이 깜깜해졌다.
한 달이란 시간은 분명 긴 시간이다.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사이 참 많은 일이 있기에 충분했다.
그사이 모용세가는 이미 멸망했고, 사패천은 정천맹이 가진 정보의 격차를 이용해 그들을 몇 번이나 함정으로 유도했다.
그 결과,
“남궁가주… 그도 큰 부상을 입고 말았습니다요.”
“이런 개병신 같은 새끼.”
자기보다 먼저 함정에 빠진 이들에게 인성질을 부리다가 자기도 당해 버렸다고?
“…그, 그래도 그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요! 폭강시가 출몰하지만 않았어도……!”
“폭강시고 나발이고, 전쟁이 어디 천하제일 비무대회냐? 독이 뿌려지든 밟고 선 바닥이 무너지든, 하늘 위에서 포탄이 떨어지든 다 일어날 수 있는 일 아냐!”
물론, 전부 다 내가 해본 것들이다.
“하여튼 요즘 것들은, 창의력이 없어, 창의력이.”
“…예, 그렇습죠.”
하윤호도 내 의견에 적극 동의하는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 애들은 뭐 하느라 위험한데?”
“그게… 그분들을 구하러 스스로 사지에 발을 들이셨습니다요.”
“그건 당연한 거고.”
우리 애들 협객병 걸린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 줄 아나.
“어쩌다는 안 궁금해. 어차피 위험에 빠진 정파 놈들 죽는 꼴 못 보겠다고 알아서들 기어들어 갔겠지.”
그러니까,
“그래서, 걔들 지금 어디 있냐고.”
딱 그것만 말해.
“그, 그게…….”
“그게 뭐?”
“을문협! 을문협입니다요!!”
“을문협?”
하윤호는 다급히 지도 한 장을 꺼냈다.
“요령과 하북 사이, 그곳에 호리병 모양의 협곡이 있습니다요. 그곳에서 당가의 가주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이 최후의 농진을 치고 있습니다요!”
“…을문협이라.”
더럽게도 멀구만.
“일단 장강수로채… 아니, 수로상단의 이들에게 협조를 요청했습니다요. 그들 역시 빠르게 북쪽으로 붙고 있습니다만…….”
“한창이겠군. 물길 흐름은 반대일 테니까.”
뭐, 됐다. 어차피 어디인지만 알면 그만이니까.
“집 잘 지켜. 산적 놈들이 제아무리 머릿수가 많아도 여기까지 신경 쓸 여유까진 없겠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야겠지.”
그렇게, 모든 정리를 대충 끝내고 떠나려 했다.
“…야.”
딱 하나, 마음속에 걸리는 것만 아니었다면.
“네, 넵?”
“너 숨기는 것 있지?”
“수… 숨기는 것이라니…….”
“계속 걸렸거든. 정파 잡놈들이 제아무리 삽질을 해댄다 쳐도, 너까지 그럴 리는 없거든.”
내가 아무리 반짝반짝 닦아서 윤이 날 때까지 갈구는 하윤호라지만, 녀석의 능력 자체는 진짜였다.
녀석의 과거도 과거인 데다, 다 망한 사천 땅에서 하오문 지부를 여기까지 일궈 냈다는 게 녀석이 지닌 능력의 방증.
‘게다가, 맨날 앓는 소리를 해도 광형상단과 장강수로상단은 분명 이 녀석의 작품.’
중원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상단을 꾸린 녀석이다. 적당히 해 먹는 것쯤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눈감아주려 했지만, 그럼에도 녀석은 결코 선을 넘지 않고 당가와 하오문의 공동 발전에 힘써왔다.
그런 녀석이 내게 무언가를 숨긴다고?
‘나를 배신해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그럴 놈도 아니다. 그럼에도 녀석이 내게 굳이 무언가를 숨기는 것이 있다면, 그건 꼭 그래야만 하는 것. 그리고 그 사안이 무척이나 중대해 녀석이 미처 요령 땅까지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할 만한 것.’
그건,
“마교냐?”
“……!!”
“애초에, 그것뿐이잖아.”
후우.
한숨을 푹 내쉬며 일어서려던 의자에 다시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우리가 처음부터 추적하던 목표. 네 녀석 역시 불구대천지수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적. 그리고 네가 일 처리에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을 만큼 거대한 규모를 가진 놈들이라면, 결국 마교밖에 없잖아.”
“고, 공자님… 그, 그게 숨기려던 건…….”
“알아. 지금 내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혼란을 주기 싫었겠지.”
이 녀석이 숨기려 했다면 그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그만큼 마교도 놈들에 대한 정보를 찾았다는 뜻일 터. 이미 다 들통 났으니 숨기지 말고 말해.”
“고, 공자님……!”
하윤호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후우우…….”
크게 한숨을 내쉰 녀석은 곧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서책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이것은 하오문 본단에서 가을량의 유해를 수습한 것.”
‘가을량이라면…….’
스스로의 아픈 기억을 서슴없이 밝힌 하윤호는 서책을 펼쳐 내용을 보였다.
“그가 지금껏 추적해 온 마교의 흔적이 적혀 있습니다요. 비록 암호화되어 있었기에 해독에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대부분을 해독하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 두 가지 중대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지요.”
하윤호의 목소리를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 암호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굳이 묻지 않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
그 사실을 녀석도 알기에 최대한 덤덤한 목소리로 사실만을 전달해 왔다.
“첫 번째로 그들의 본거지를 발견했습니다요. 물류와 자금의 유통 흐름을 통해, 그들이 위치한 곳을 알아낼 수 있었고, 그것들을 통해 한 가지 더더욱 중대한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요.”
그건,
“천마(天魔). 그가 부활했습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