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남궁황, 그는 지금 죽어 가고 있었다.
한때는 검왕이라 불리며, 패도의 상징과 같은 자였으나 지금은 피골이 상접한 채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상태가 제법 호전되었습니다. 가주께서는 타고난 신력이 좋으신 분이시기에, 한 달간 정양하신다면 어렵지 않게 털고 일어나실 수 있을 듯합니다.”
완치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혹여 병세가 악화된다면 불러주십시오.”
필요한 말과 불필요한 말을 구분하여 차도를 알려준 당위혼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궁황이 사용하는 임시 막사를 벗어났다.
떠나는 그에게 남궁황은 무어라 했지만, 그 목소리가 너무나 작아 당위혼의 귀에만 간신히 들릴 지경이었다.
그리고,
“가주님!”
“뭐라고 합니까?”
임시 막사에서 빠져나오는 당위혼에게 당가의 방계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후우, 미안하다고 하시더구나.”
“허… 미안하다고 말입니까?”
“아휴, 많이 미안들 하셔야지.”
방계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와중에 자기 아들만 구하는 걸 택했으니, 양심이 있다면 미안하기라도 하셔야지.”
“어쩌겠냐? 금수도 제 피붙이는 귀하다는데, 누가 옆에서 기둥뿌리 다 바쳐 세상을 구하다가 쫄딱 망하는 꼴을 봤으니, 자기네는 후대라도 구하고 싶었겠지.”
“야야, 불퇴야!”
“이 새끼, 말을 해도…….”
“아, 맞다.”
당불퇴는 서둘러 입을 막으며 당위혼의 눈치를 봤지만, 그 역시 딱히 당불퇴를 책망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우묵한 눈으로 밤하늘을 바라볼 뿐.
방계들은 그 모습에 역시 가주님은 이 상황에서도 침착하구나, 싶었지만 당위혼은 그 나름대로 고심 속에 빠져 있었다.
‘나는… 잘한 것일까?’
불과 일주일 전, 정천맹의 토벌군은 사패천의 함정에 빠졌다.
아니, 사실 그 말은 어폐가 있었다.
그들은 이미 한참 전부터 사패천의 함정에 빠져 있었으니까.
‘아군에 분열을 유도하여 병력을 나누고, 그렇게 나눠진 이들은 하나하나 각개격파 당했다.’
가장 먼저 떨어져 나간 이들은 하북팽가의 이들이 속한 백호단 계열이었다.
언뜻 보기엔 그들의 본가인 하북이 인근에 있어 그들은 쉽게 지원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사패천은 그 점을 역이용해 대규모 병력을 하북팽가 인근에 주둔시켰다.
‘차라리 이곳이 하북과 수백 리 떨어진 타지였다면 모를 일. 암만 본가의 인근에 대규모 병력이 준동한다는 소문이 있어도, 호탕하고 대의를 중시하는 하북팽가의 가주라면 쉽게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근방에서 가문이 위협받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니 그와 하북팽가와 관련된 이들은 몸이 달을 수밖에 없었고, 수뇌부에서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팽가 역시 이 근방이니, 그곳에서 사패천을 각개격파한다는 명분으로.
‘그것이… 시작이었지.’
사패천은 꾀를 내어 정천맹을 꾸준히 분열시켰다. 이미 이곳까지 오는 동안 기습을 당해 신뢰도가 꾸준히 떨어진 그들은 믿을 만하다 생각되는 이들끼리 뭉치려는 경향이 있었고, 그 말은 정천맹 전체를 보았을 때는 부분화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게 병력이 나뉘고 또 나뉘었을 때, 사패천은 폭강시(爆殭屍)까지 동원해 대규모 습격을 강행했다.
‘그리고 그 전투에서, 남궁가주께서는 중상을 입으셨다.’
그의 오만한 성정도 한몫을 하기는 했다. 분열되는 정천맹의 군세를 보고도 그는 그들을 다독이려 하지 않았고, 오로지 자신을 따르는 이들만을 곁에 둔 채 그들의 앞에서 패도를 지향했다.
사패천이 계략을 펼치는 모습은 그들이 전면전에 자신이 없기에 벌이는 잔 수작이라 일축했고, 휘하의 책사들이 올리는 간언을 무시하며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사패천의 병력을 향해 거침없이 제왕검을 휘둘렀다.
덕분에 전투가 벌어진 초기에는 제법 승기를 쥐는 듯해 보였다.
그것이 함정인지도 모르고.
‘열두 구의 폭강시의 일제 자폭, 그건…….’
너무나 끔찍한 광경이었다.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남궁황 조차 그 무시무시한 자폭 공격에 중상을 면치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였기에 그 폭발 속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겠지.
‘열두 개의 벽력탄이 눈앞에서 터지는 화력에, 육편으로 화한 수천의 화살이 쏟아지는 절체절명의 상황…….’
온몸에 호신강기를 두른 남궁황은 그 속에서 죽다 살아났고, 그 순간 숨어 있던 사패천의 고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상황에서 남궁황은 전신의 내력을 폭발시키며 버럭 소리쳤다.
“남궁세가의 가인들은 본 가주의 명령을 들으라!!”
그건 가히 피를 토하는 외침이었으니,
“지금 당장 전장을 이탈하라!! 후일을 도모하라!!”
스스로의 목숨을 내던져 자신의 가문 사람들을 살리고, 사패천의 추격대를 붙잡으며 검을 휘두르는 그 모습에 남궁세가의 가솔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도망쳐야 했다.
그래, 여기까지만 보면 눈물겨운 희생이지만.
‘그 때문에, 본디 남궁세가와 청룡단에서 담당하고 뚫어야 했던 퇴로가 막혀 다른 남은 이들은 고립되는 결과를 맞이했다.’
문제는 그 뒤에 있는 이들.
퇴로를 뚫어야 할 남궁세가가 자기들끼리만 빠져나갔으니, 겨우겨우 당위혼이 남궁황을 구출해 또 다른 퇴로를 만들어 빠져나왔다 하더라도 결국 그에게 향하는 시선이 곱지 못했다.
어찌어찌 을문협에 방어선을 만드는 데 성공했으나, 그 역시 임시방편일 뿐.
언제 적들이 들이닥칠지 모를 현실은 얼마 남지 않은 이들에게 불안감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그건 당위혼에게도 마찬가지.
‘나 역시, 그와 같은 행동을 해야 했던 것일까.’
가주로서 자신을 따르는 가문의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조금은 이기적으로 행동했어야 하였을까?
다른 이들은 남궁황을 비난하고 있으나, 같은 가주로서 당위혼은 차마 그를 욕할 수 없었다.
오히려, 자신 때문에 함께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된 방계들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다들 쉬도록. 나는… 남궁가주를 치료할 약재의 상태를 확인해야겠으니.”
결국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는 당위혼이었고, 그 모습을 뻔히 보던 방계들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 가주님, 우리한테 미안해하는 것 맞으시지?”
“그런 것 같네.”
“쳇, 뭘 그런 걸로 미안하고 그러시다냐? 잘못한 놈은 따로 있는데.”
사지에 떨어진 그들이지만, 딱히 원망 따위는 없었다.
그들이라고 죽고 싶겠냐만, 이런 최후는 괜찮다 싶었다.
“너희, 혹시라도 묻는데 가주님 원망하는 사람 없지?”
“있겠냐? 그런 모자란 놈이?”
“흐흐흐, 우리 중에 그런 놈이 있겠어?”
“한 번 사는 목숨.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한 거지.”
이미 그들은 어릴 때 연고 없던 자신들을 주워준 당가에 목숨을 바치기로 다 함께 결의한 상태였다.
이런 죽음이라면, 오히려 그 은혜를 갚을 수 있다 싶어 웃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다만,
“야, 네가 남은 것은 좀 의외다?”
여기 있는 게 영 낯설면서도 또 그렇게 어색하지는 않은 한 명.
남들이 암기들을 정비하고 있을 때, 홀로 자신의 쌍검을 정비하고 있던 진혁수가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왜 시비를 거는 것이지? 너부터 베어줄까?”
“이야… 그놈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진심 어린 목소리에 당불퇴는 낄낄 웃으며 항복 선언을 하듯 두 손을 펼쳐 보였다.
“아니, 그런데 진짜 의외지 않냐? 너는 왜 안 도망치냐? 우리야 가주님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처지지만, 너는 네가 차기 가주… 아니, 장문인이잖아.”
여기 있는 모두가 진혁수의 실력을 알았다.
그라면 홀몸으로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갈 수 있을 충분한 실력이 되었으니, 이곳에 남은 것은 순전히 그의 자의였다.
그 사실에 의아한 방계들이 시선을 던지자, 진혁수는 다시금 자신의 쌍검으로 시선을 향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그저 증명할 뿐이다.”
“증명?”
“청성의 의기와 협의가 결코 당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미친놈.”
“우리보다 더한 미친놈이 여기 있었네.”
대체 왜 그딴 걸 비교하는 거지?
“야, 그러다 쫄딱 망한다니까?”
“그래, 우리가 망해 봐서 알아.”
“저기 남궁씨들은 그거 알아서 도망치기까지 했잖아.”
이젠 자학의 경지에 이르게 된 방계들이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안 망하던데.”
“응?”
“네 녀석들, 결국은 이렇게 부활하지 않았나.”
진혁수는 짧게 반박했다.
“어, 그건…….”
“그, 그렇긴 한데…….”
이걸 부활했다고 해야 하나?
따지고 보면 어마어마한 성세를 자랑하기는 한데…….
“대도무문(大道無門). 지켜야 할 마땅히 큰 도리와 정도에는 정해진 문(門) 따위가 없다. 그저 옳고 공명정대한 그 길을 걸어나갈 뿐.”
장난치려다 오히려 당황해버린 방계들 사이로 작지만 힘 있는 진혁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가의 역사와 내력은 나 역시 알고 있다. 그대들의 선조는 삼십 년 전 마교의 발호에 맞서 모든 것을 내걸고 싸웠다지. 그 결과 오로지 한 명… 아니, 두 명의 직계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죽음을 맞이해야 하였고. 그 모습을 보며 모두가 손가락질하며 떠들었다. 보아라, 의(義)와 협(俠)만을 쫓은 결과가 어떻냐고.”
세상은 당가를 비웃었다.
손가락질했다.
“그래, 지난 삼십 년간 네 녀석들의 가문은 분명 세간에 놀림거리가 되었었다. 대도(大道)를 걸은 결과가 결국은 그것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어떻더냐?”
그러나 그 평가가 바뀌는 데는 고작 한 세대면 충분했다.
“이제 그들을 비웃는 것은 다름 아닌 그대들의 가문이지. 지난 삼십 년, 나타협의라는 치욕스러운 시대에 나귀처럼 진흙탕을 뒹굴며 이권 다툼을 벌이던 이들을 비웃듯 승천하여 현시대를 좌지우지하는 거대 세력으로 부활한 것. 그것이 그대들이 아니었나?”
“너…….”
“그대들이 정답을 알려주었다. 육체는 결국 썩어 문드러져 지하에 묻힐 뿐이지만, 혼(魂)은 계승되는 것임을. 그렇기에 나 역시 확신한다. 설령 내가 없더라도, 청성은 그 혼(魂)을 이어 갈 것임을.”
진혁수는 평생 청성에서 자고 나랐다.
그의 스승을 비웃는 이들을 보고 자랐고, 그의 스승이 임종을 맞이함을 지켰고, 그의 스승의 유지를 이어 지금에 이르렀다.
당가가 그랬듯, 스승과 자신도 그러했다.
‘결국 끝까지 가면 이기는 것은…….’
꽈악.
검병을 쥔 손을 높이 올려, 달밤이 내리쬐는 월광에 검날을 들이밀었다.
“이대와 삼대 제자들에게 청성의 혼을 알려주었다. 이제 그들이 걸어갈 그 길은 내가 없어 힘들고 고되겠지만, 장문인께서 계시니 걱정 따위는 없다.”
청원.
한때는 자신을 축출할 기세로 다투었던 그였지만, 이제 와선 진혁수가 가장 믿는 대청성의 장문인인 그가 뒤에 버티고 서 있으니까.
“…너, 그 양반이랑 별로 안 친하지 않았… 힉?”
“예의를 갖추어라. 대청성의 장문인이시다.”
서늘하게 들이밀어진 검날의 감촉에 당불퇴는 두 손을 들며 소리쳤다.
“그, 그분이랑 별로 안 친했잖아?!”
“흥,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친하다는 것 자체가 자신과 연관이 있어야지.
“친하고 안 친하고는 상관이 없다. 애초에 지금까지도 장문인과 나의 관계는 최악이고, 서로가 지향하는 방향은 전혀 다르니까.”
“아니, 그 뭐… 혼이 이어진다며?”
“그건 다른 이야기다.”
들이밀었던 검날은 거둬들인 진혁수는 다시금 검날을 닦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는 청성의 안에서 방향성이 다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같은 청성(靑城)이다.”
각기 다른 물길을 타고 흘러도, 끝끝내 대해(大海)에서 다시금 만나 뒤섞이기 마련이니,
“그것이 내가 나고 자란 청성(靑城). 우리 모두를 품에 안을 이름이며, 내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당히 밝힐 수 있는 나의 혼(魂)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