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321화 (321/350)

321화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의 각오를 밝힌 진혁수는 순찰을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남겨진 방계들은 서로 눈만 깜빡거리다가 한마디씩 뱉었다.

“잘 나셨어, 아주.”

“저 자식, 대사 준비해 온 거 아냐?”

“내 말이. 멋진 건 저 혼자 다하려고 하는구만?!”

분하다.

몹시 분하다.

같은 급이라 생각했는데, 저렇게 자기 혼자 명대사를 뱉어대고 있으면 그 이하가 되는 듯한 기분!

패배감이 마구마구 몰려왔다.

“큭! 웃기지 말라고 해. 우리도 마찬가지거든?”

“맞아, 맞아. 그 왜, 우리도 여기서 다 죽어도 당가를 지켜줄 사람이 있잖아?”

“그래, 대형이라든가! …대형이라든가, 대형이라든…가?”

“…그거 맞아?”

당가가 다 망하고 오로지 홀로 남은 그들의 대형이 다시금 당가를 일으켜 세운다?

“…그건 더 이상 당가가 아닐 것 같은데.”

당위혼이 가주인 사천당가.

당유혼이 가주인 사천당가.

그건, 정말 아득히도 머나먼 거리감이 있지 않을까?

“자, 잠깐만 우리 다시 생각 좀 해보자.”

다시 생각해 보니 이건 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야…….”

“왜?”

“가주님, 기습이라도 해볼까?”

“너 이 새끼!! 미쳤냐?!”

단번에 멱살을 잡힌 당불퇴가 억울한 듯 항변했다.

“아니! 우리야 그렇다 쳐도, 가주님은 살려 보내야지!!”

“어?”

“그, 그런가?”

순간 몇몇이 혹하는 반응을 보였다.

“뭘 혹해 미친놈들아! 너희 정신 나갔어?”

“암만 그래도 가주님은 습격하자고?”

“그럼 여기서 가주님도 우리랑 같이 껴묻거리 하자고 할 거냐?!”

순식간에 둘로 나뉘는 의견.

양쪽이 팽팽히 대립할 때,

“쯧, 이놈들아.”

그 모습을 한심하게 지켜보던 당지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희, 자신은 있냐?”

“옙?”

“가주님을 습격한다 해서, 얌전히 기절시켜드릴 자신은 있냐고.”

“아…….”

확실히…….

“그, 그렇네?”

“하긴… 어디 보통 가주님이어야지.”

“지난번에 간자를 단번에 눈치채시고 제압하는데, 난 넋 놓고 보기만 했다.”

지난 일 년간 당위혼은 부쩍 강해졌다.

그 근간에는 일단 당유혼이 기를 쓰고 당위혼을 키워내겠다고 별짓을 다 한 것에 있다.

‘그 사이 안 좋은 총관님이랑 손을 잡고 가주님의 식단은 약선(藥膳)으로 꽉꽉 채워 넣었다지?’

기본적으로 약재를 넣어 조리한 음식을 약선이라 부르지만, 약학만을 죽어라 파헤친 당율기가 그걸 보고 경악하며 이리 말했다.

“저건… 그냥 약선이 아니야.”

“그냥 약선이 아니면?”

“영약선(靈藥膳), 최소한 그렇게 불러야 말이 돼.”

대놓고 영약을 주면 당위혼이 어찌 이런 호화스러운 식단을 계속할 수 있겠냐고 거부할까 봐, 그리고 실제로도 첫 시도에는 그런 적이 있기에 당유혼이 계량의 계량을 거듭한 끝에 만들어낸 식단.

각자의 요리에 구성 성분을 나눠 담아 그것을 함께 챙겨 먹을 때 어지간한 영약의 효능을 발휘하게 하는 무시무시한 식단이 당위혼의 매일 상차림으로 삼시 세끼 완성되었다.

그 정성에 당위혼도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버린 건진 몰라도, 그 식단을 일 년간 먹으며 매일 철야로 수련을 쉬지 않은 결과 일 년 전 용독문의 문주와 겨뤘을 때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거기다, 심계도 보통이 아니시지.”

“우리가 함정을 판다고 해서… 거기에 얌전히 당해 주실까?”

“…….”

다들 상상해 본다.

‘헤헤, 가주님… 식사는 하셨습죠?’

‘그, 밤도 늦었는데… 야식 한 접시…….’

그냥 덮쳐서는 답이 없으니 음식에 약이라도 타보겠답시고 접근하는 상상을.

하지만,

‘…차양당주.’

‘네, 넵?’

‘가져가시지요.’

‘…네.’

촉이 온다.

문턱도 넘지 못하고 개같이 멸망할 촉이.

“…안 되겠는데?”

“그, 그래도 뭐라도 해봐야…….”

다들 뇌 정지가 와버린 그 순간,

“크하하하!! 이 녀석들아, 이리 썩 나오지 못하겠느냐!!”

을문협을 뒤흔드는 쩌렁쩌렁한 포효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

“이 목소리는…….”

“투왕(鬪王)?”

녹림칠십이채의 총 채주.

원래라면 마주칠 일도 없을 사내지만, 지난 한 달간 질리도록 부딪쳐 왔던 상대인지라 목소리만 들어도 온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지난 며칠간 잠잠하더니… 왜 하필!”

“젠장, 일단 달려!”

방계들은 허겁지겁 을문협 입구의 방어선으로 향했다.

마침 투왕의 외침을 들은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그들은 입구로부터 백여 장 정도의 거리를 둔 채 포위망을 구축한 투왕과 사패천의 병력을 마주해야 했다.

“흐흐흐, 쥐새끼처럼 잘들 숨어 있구나.”

을문협에 있는 이들이라고 해봐야 그 수는 고작 삼백이 되지 않는다.

원래 정천맹의 병력을 수천에 달했지만, 여기까지 오며 분열되고 또 분열되어 겨우 이 숫자만 남은 것이다.

그에 비해 투왕이 이끌고 온 이들은 일천이 넘는 어마어마한 대병력.

“긴말 않으마. 항복해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일 뜨는 아침 해를 살아서 볼 수 있게 해주마.”

오연히 앞으로 나와 외치는 그 모습에 정천맹의 잔존 병력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항복하라고?’

‘살려주겠다고?’

‘이런 개자식이!!’

전신을 짓누르는 짙은 굴욕감.

정파의 천하에 살고 있다는 그들에게 사파의 산적 두목이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굴욕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더욱 굴욕적인 것은,

‘입이… 안 열려!’

‘젠장! 다리가!!’

최근 한 달여간.

투왕이 이끄는 유격대에 지독하게도 당한 자신들이, 각인되다시피 학습된 공포에 차마 입도 뻥끗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공포와 무력감에 젖어 부들부들 떨고만 있는 그때,

“잠깐, 녹림의 영웅께선 그 발걸음을 멈춰 주시지요.”

모두가 겁에 질린 사이로, 홀로 담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음?”

자연스레 투왕의 시선이 목소리의 방향으로 향했고, 이내 그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아아, 당가의 어린 가주! 네 녀석이구나!!’

지난 한 달은 지루한 전투의 연속이었다.

이 천하가 자신의 것이라도 되는 듯 떠들어대던 정파의 위선자들.

그들과의 일전을 평생 바라 왔던 투왕이었기에 이번 일전은 무척이나 기대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기대한 만큼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놈들은 힘만 강하고 오만한 짐승일 뿐이었다.’

흑상의 계책에 속아 넘어가며 지리멸렬하게 패퇴하는 모습만을 연이어 보일뿐더러, 그렇게 상황이 불리해지자 그렇게들 떠들어대던 협의라고는 온데간데없이 한심한 꼴을 자랑했다.

‘저마다 자기만 살겠다고 동료애를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도망치던 모습. 대의(大義)라 포장하며 제 목숨만 챙기는 퇴각을 당연시하는 위선!’

매번 계책을 짜던 흑상이 어째서 그리도 정파를 비웃었음인지 익히 알 수 있는 모습이었고, 그에 점점 실망감에 젖어가던 투왕이었으나 그래도 그의 눈을 즐겁게 하던 이들이 몇몇 있었다.

‘당가! 그래, 네 녀석들이었지!’

입으로만 떠드는 협의가 아니라, 진정 자신의 목숨까지 다 바쳐서 이뤄내는 협의.

그리고 꿈으로만 꾸는 몽상이 아닌 그것을 실천해 낼 만한 무력!

천하의 독하디독한 흑시문 간부들도 혀를 내두를 독기를 보인 독종들이 당가였고, 그중에서도 선두에 서서 다른 이들의 퇴로를 뚫던 이가 바로 당위혼이었다.

“흐하하하, 천하제일협의지문! 사천당가의 가주를 뵈어 아주 영광이군!!”

투왕이 알은 채를 하자 당위혼은 언제나의 그와 같은 담담한 목소리로 포권을 취했다.

“천하의 투왕이 알아봐 주시다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흐흐, 영광은 무슨. 살다 살다 산적 따위가 당가의 가주에게 그런 소리까지 듣게 되는군.”

가당찮은 소리라면서도 또 싫지는 않은 기색을 보이는 투왕이 이내 히죽 웃었다.

“해서, 귀한 당가의 가주께서 굳이 이 비루한 산적 왕을 부른 이유는 무엇인가?”

“투왕께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제안?”

“그렇습니다.”

포권을 풀지 않은 채로, 당위혼은 고개만 들어 천천히 투왕을 응시했다.

“투왕께서 말씀하셨지요. 항복한다면 내일 뜨는 아침 해를 볼 수 있게 해주겠다고.”

“그랬지. 나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몸이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산적들의 왕으로 살아온 투왕이라지만, 그는 결코 한 번 뱉은 말을 물리는 법이 없었다.

그것이 그의 법도였고,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철칙이었으며, 야만적인 산적들을 한데 묶어 왕국을 일굴 수 있게 해준 비결이었다.

“하면 제안하겠습니다. 제가 투왕을 상대로 내일 아침 해가 뜰 때까지 버틴다면, 오늘 하루는 물러가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

순간 투왕의 얼굴에 황당함이 깃들었다.

‘나를 상대로, 동이 터 오를 때까지 버틴다고?’

자신이 녹림의 채주이고 상대방이 당가의 가주기에 배분 상으로는 동일하다 볼 수 있다.

하지만 서로의 사이에는 한 시대 정도나 되는 시간 간극이 있다.

그 어떤 천재라도 좁힐 수 없는 시간의 차이는 당연 강함의 차이를 불러왔다.

암만, 그가 뛰어난 무재를 지니고 있다 해도 이 내기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녀석, 진심이잖아?’

어처구니없어 저게 뭐 하는 짓인가 파악하려던 투왕에게 덤덤하지만 그 속에 결연함을 감춘 당위혼의 두 눈이 보였다.

타오르는 의지의 불꽃이 명경지수와 같은 동공 속에 피어올라 있으니, 저것이 바로 죽음을 각오한 자의 의지였다.

“큭, 크흐흐흐흐… 진정,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이 아까운 호걸이구나!”

나타협의의 시대.

게으른 협의만이 바닥을 뒹구는 이 시대에, 저런 이가 있다니!

“여보시게, 투왕. 자네… 저것을 받아들일 생각은 아니겠지?”

뒤편에서 가만 지켜보고 있던 흑시문주가 쇠 긁는 듯한 목소리를 내며 물어왔다.

그에,

“흐, 그렇다면?”

“자네!”

“흑시문주. 이번만큼은 내 체면을 생각해 주겠나?”

“…….”

흑시문주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지만, 그는 한숨을 푹 내쉴 뿐 무어라무어라 하지 못했다.

저 괴물 같은 투왕 놈은 자신의 별호가 어째서 투왕(鬪王)인지를 증명하듯, 사패천을 결성하며 지금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강해져 왔다.

강시들을 전부 동원한다면 모를까, 이렇게 야전에서 시비가 붙어봐야 누구 쪽이 손해일지는 뻔한 노릇.

괜히 자존심을 건드렸다가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깨달은 흑시문주는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났다.

‘그래, 차라리 빚을 지웠다고 생각하면 편하겠지.’

그렇게 흑시문주가 물러서자 함께 있던 흑상 역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만 봤다.

그가 생각하기에, 저 내기는 암만 봐도 투왕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좋다, 당가의 어린 가주여. 내 그대의 의기를 인정하는바, 자네에게 한 가지 특권을 더 주지.”

“특권?”

“자네를 따르는 어린 핏덩이들을 봤지. 그들까지 함께 덤벼들어도 좋네.”

차양당.

이제는 그 이름이 녹림투왕의 귀까지 들리게 된 그들의 참전 허가.

거기까지 나가자 순간 듣고 있던 흑상의 아미가 꿈틀거렸지만,

“괜찮습니다.”

이번엔 당위혼이 먼저 짧게 일축했다.

“제게도 자존심은 있으니까요.”

“크크크, 그런가?”

그에 투왕은 짧게 웃었고,

“그렇다면.”

다음 순간―

“받아보시게.”

파팟!!

그의 신형이 제 자리에서 사라지더니, 순식간에 당위혼의 전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 몸의 일격을!”

“……!!”

높이 들어 올려진 파산대부가 그 섬뜩한 날을 달밤에 비추었고,

콰직.

끔찍한 파괴음이 울려 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