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방계들은 두 손에 땀을 지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격전을 지켜봤다.
아니, 사실 그것은 격전이라고 칭할 수도 없는 발악이었다.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이를 향해 달려드는 무모한 도전이었고, 그걸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제아무리 그들이 존경해마지 않는 가주님이라도, 상대는 이미 투왕의 이명을 쟁취한 현시대의 절대자.
저 오만한 남궁세가의 가주 앞에서도 결코 꿀리지 않는 패왕이 바로 조취산이었다.
‘만약의 순간이 온다면…….’
‘바로 끼어든다!’
어떤 마음으로 그들의 가주가 투왕에게 일대일 결전을 제안한지 잘 아는 그들이기에 감히 말리거나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최악의 순간이 오면 반드시 끼어들어 가주의 목숨만은 구하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어?’
‘이거 싸움이…….’
생각보다… 할 만하다?
그들의 가주는 무슨 수법을 쓴 건지 갑자기 어마어마한 자연지기를 흡수하더니 그 순간부터 미친 듯이 투왕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투왕과의 간극을 메꾸더니 마침내 투왕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몰아치는 돌풍처럼 당가의 모든 무공이 쏟아지며 투왕을 압박해 갔고,
저 무시무시한 절대자를 쓰러트리기까지 오직 한 걸음만이 남았다.
모두가 그 말도 안 되는 기적의 가능성을 점치는 그 순간,
푸욱!
끔찍한 파육음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승부는 끝이 났소, 투왕.”
저 멀리서 날아와 당위혼의 복부에 박힌 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급소를 노린 검은 내뻗은 주먹이 한 뼘을 남기기 직전에 박혀 들어 당위혼을 거꾸러트렸다.
“흑시문주!!”
조취산의 노호성이 터져 나왔고, 방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쓰러지는 당위혼을 향해 달려들었다.
“가, 가주님!!”
“정신 차리십시오!! 가주님!!”
지금껏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던 권역이 무너지고, 그곳엔 자신의 한계까지 몰아붙이다 못해 쓰러져버린 당위혼과 그런 그를 앞두고 상처 입은 맹수처럼 포효하는 조취산만이 남았다.
“이놈!! 흑시문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살의가 장내를 장식했다.
콰아아앙!
순식간에 땅을 박차고 쇄도한 투왕의 주먹이 흑시문주를 향해 내리꽂혔고, 흑시문주는 창백한 안색을 굳히며 손을 뻗어 그 갑작스러운 일격을 쳐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이게 무슨 짓이냐고?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슈웅―
쏜살처럼 날아든 파산대부가 투왕의 손에 쥐어지고, 그의 분노를 대변하듯 거대한 도끼날이 흑시문주를 향해 내리꽂혔다.
“흠!”
그러나 흑시문주는 어렵지 않게 그 날을 쳐냈다.
그의 손끝에서 시작된 검은 반점이 손 전체를 검게 물들며 흑시공이 극성으로 발휘되었고, 투왕이 연이어 날리는 거병을 연이어 받아냈다.
“정신 차리시오, 투왕. 이건 어리석은 짓이오.”
“어리석은 짓? 그래, 이 개자식이 뚫린 입이라고 끝까지 나불대는구나!!”
당장에 그 입을 찢어주마.
투왕부(鬪王斧).
붕산격(崩山擊).
어마어마한 힘이 도끼에 실렸고, 상대의 진심을 깨달은 흑시문주의 눈빛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정녕 그리 나온다면.”
흑시공(黑屍功).
광시무(狂屍舞).
쩌엉―!!
두 절대자의 무공이 부딪치며 폭음을 터트렸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뒤로 밀려난 그들이지만, 흑시문주가 두어 걸음 물러난 데 비해 투왕은 다섯 걸음을 물러나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이미 극독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 상태는 그 정도로 엉망진창임을 보여주는 방증이었다.
“그만하시오, 투왕. 어리광은 여기까지오.”
“그만? 어리광?!”
“그렇소. 당신의 고집에 따라 일대일 승부를 허하였고, 그 결과는 이미 드러났소. 분명한 당신의 패배였지.”
“큭!!”
패배.
치욕스러운 말이지만, 그렇기에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해서? 그게 어쨌단 말인가!!”
“당신이 원해서 일대일을 성사시켜 주었지만, 그렇다 해서 당신 맘대로 저들을 보내줄 수는 없는 법. 원래 흑상의 계획은 저들의 사기를 흔들어 떨어트리고, 그 틈에 체력이 빠진 적들을 몰아쳐 와해시키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당신 맘대로 일대일 승부를 원해 한 번 양보해 주었으면, 그다음부턴 이리 일방적으로 고집을 부려서는 안 되지.”
“크으으…….”
맞는 말이었다.
지금 자신이 하는 것은 한낱 필부의 용맹을 자랑하는 개인의 투쟁이 아니라, 집단과 집단이 부딪치는 전쟁이었다.
여기서 자신의 욕심만을 부릴 수는 없는 법.
“나 역시 당신을 존중하기에 특별히 승부가 결착나길 기다렸다가 손을 쓴 것이오. 그런데 여기서 더더욱 고집을 부린다면 실로 난감하기 그지없소.”
끝까지 정론을 표하는 흑시문주의 모습에 투왕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느꼈다.
사납게 고개를 돌린 그의 시선엔 쓰러진 당위혼을 붙잡고 울부짖는 당가의 방계들이 보였고, 그들에 둘러싸인 채 쓰러져 있는 어린 가주를 보자니 다시금 속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내가… 저 자리에 있어야 하거늘…….’
패자는 유구무언.
평생 승리만을 손에 쥐어온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비참하게 패배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결국 들어올렸던 파산대부를 거칠게 바닥에 내려찍은 그는 한숨과 함께 다시금 그것을 등에 걸쳐 메며 발걸음을 돌렸다.
“…흥이 식었다. 녹림은 나를 따라 물러난다.”
다시금 전장에 끼어들 수도, 그렇다고 저들을 도울 수도 없으니 그가 선택한 것은 손을 털고 일어서는 것.
뒤돌아 물러서는 투왕의 모습을 보며 흑시문주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아슬아슬했군.’
저 멧돼지 같은 자라면 여기서 자신과 사생결단을 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오히려 패배해서 다행인 건가?’
그렇기에 당가의 어린 가주와 벌였던 투쟁의 패배를 집요하게 헤집었다. 어찌 보면 그의 역린을 건드리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저렇게 자존심이 강한 이는 스스로가 중요시 여기는 가치에 약한 법이었다.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칠 뻔했어.’
흑시문주는 떠나가는 투왕의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며 을문협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나머지 계획대로 시간만 보내면 그만이었다.
저들은 부상자를 돌봐야 하고 자신들의 기습을 경계해야 하니 지속적으로 체력을 소모할 수밖에 없고, 그때 몰아치면 저 안쪽에 있을 남궁황이라는 대어를 잡을 수 있다.
‘크흐흐, 그렇게 된다면…….’
남궁황.
달리 검왕이라 불리며, 당금 천하제일검이라 불리는 자.
그런 이를 소체로 하여 강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기다린다. 시간은 우리의 편이니까.’
군침이 도는 음식을 앞에 둔 것처럼 입맛을 다신 흑시문주는 계획의 이행을 위해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어이, 거기 멈춰.”
뒤편에서 들려온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지금, 나를 부른 것인가?”
지금 내가 잘못들은 건가?
흑시문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자신들을 부른 이를 시선에 담았다.
그 수는 고작 서른셋.
두 눈에서 피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이들이 보였고, 그 나이대에 비하자면 제법이지만 조금 전 자신의 칼에 맞은 이와 비교하자면 한참이나 수준 이하의 이들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시체 같은 놈이, 귀도 먹은 거냐?”
“허…….”
그들 중 하나가 또다시 도발해 왔다.
‘살다 살다 별의별 일을 다 겪는군.’
상황은 대충 이해가 갔다.
쓰러져 있는 저 어린 가주를 몹시도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 지금 복수심에 불타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거참.’
이런 일들은 수없이 겪어 봤다.
강시를 만들기 위해 무수히 피를 뿌렸던 자신인 만큼,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이들은 줄 세우면 일개 마을을 다 메울 수준이겠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내 면전에서 분노를 토하는 이는 없었거늘.’
설마 조금 전 투왕에게 밀려났던 모습 때문에 자신을 만만히 여기는 건가?
“어이가 없구나. 그대들은 내가 누군지 알…….”
“…이놈들이?”
당황이 가시고 분노가 일었다.
이건 뭐 평생 받아본 적도 없는 취급이거늘.
“하하… 그래. 생각이 바뀌었다. 원래라면 이대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네놈들은 내가 직접 이 자리에서 죽여주마.”
원래 흑상의 계획은 항복을 권하며 을문협에 방어진을 친 이들의 심력을 소비시키고, 그걸 반복하여 그들의 투지를 꺼트린 다음 미처 예상치 못한 틈에 기습해 그들을 와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모욕을 받고 참을 수야 있나.’
정파 놈들이야 어차피 다 죽어 나자빠질 이들밖에 없지만, 사패천에 속한 사파 무인들은 이야기가 다르다.
이후 살아 돌아간 이들은 저마다 오늘 일을 입에 올릴 것이고, 그럼 저들에게 도발 받았다는 것 자체가 흠이 될 것이다.
사파의 삶은 그런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누군가에게 얕잡아 보일 일이 생기는 순간 호시탐탐 물어뜯을 기회만 노리는 들개들이 생겨나는.
“재밌군. 서른세 명이 전부 가족들인가?”
그렇기에 흑시문주는 지극히 사파스럽게 선언했다.
“가족이었던 이들로, 서른세 구의 강시 부대를 만들면 그 또한 재밌겠어.”
* * *
차양당.
당원 수가 자신을 포함해 서른셋 뿐인 가장 작은 당.
하지만 당가의 모든 방계들을 아우르는 가장 큰 당.
그런 차양당을 맡게 된 이후 당지명은 항상 자신의 행동에 조심 또 조심해 왔다.
“지명아, 네게 차양당을 맡기마. 부디,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
선대 당주가 자신에게 이 자리를 넘겨준 뒤 작고하며 다른 동생들을 맡게 되었을 때 당지명은 스스로 다짐했다.
“내가… 내가… 당주야. 그, 그러니까… 동생들은 내가 보듬어 살펴야 해!”
생각해 보면 자신은 참 소심한 인물이었다.
걱정도 많고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우려도 많이 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있나.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이 그만큼 큰 것을.
이 꼬물꼬물 아기 새 같은 녀석들이 자신만 보며 지저귀는 것을 보며 자라온 만큼, 첫째도 방계들의 안전이었고 둘째도 방계들의 안전이 되어 버린 것이 자신의 삶이거늘.
그래서 당지명은 항상 참으며 살아왔다.
“지명아, 지명아. 네가 총관이야? 왜 이렇게 궁상떨며 살아?”
“아이고! 이 새끼야, 네가 그러고도 맏형이야? 으이? 맏형이냐고!”
성격 나쁜 대형이 갈굴 때도,
“이놈, 당지명!! 저 망종 놈을 똑바로 관리하라 하지 않았더냐!!”
“내가 제명에 못산다 못살아!! 또 문제를 만들어내는 동안 대체 너는 무엇을 했느냐!!”
엄하디엄한 총관님이 대형 관리 똑바로 못했다고 하며 갈굴 때도,
“…죄송합니다.”
항상 납작 엎드려, 고개를 푹 숙인 채 죄송하다는 말만 입에 달고 살아왔다.
왜냐면,
“이게… 내 역할이니까.”
대형처럼 능력이 좋아 동생들에게 뛰어난 무공을 가르쳐 주지도 못하고,
총관처럼 수완이 좋아 망한 가문을 어찌어찌 유지해 오지도 못한 자신은,
“웃자, 그냥 웃자.”
바보처럼 헤헤 웃으며 그들의 분노를 몸으로 받고, 최대한 동생들에게까지 그 화가 가게 하지 않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여겨왔다.
“나는, 차양당의 당주니까.”
그것만을 하나의 자부심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누군가에게 자존심도 없다 손가락질받고, 맨날 처맞고 산다고 놀림 받아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그렇게 한 번 숙일수록 동생들에게 갈 위험을 피하고, 그렇게 한 번 낮출수록 동생들은 조금이라도 더 안전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번에도, 낮춰야 해.’
낮춰야 하는데,
“가, 가주님?”
제 몸에서 흘러내린 피 웅덩이에 잠긴 채 쓰러져 있는 어린 가주님의 모습에 당지명은 무언가가 북받쳐 오르는 걸 느꼈다.
“당주. 그대를 믿소.”
모두가 자신을 욕할 때, 오로지 홀로 믿어주며 응원해 주던 가주님.
“그… 미안하오. 내가 형님을 막지 못해서…….”
총관님이 대형을 막지 못했다 갈굴 때면, 밤마다 찾아와서 자신이 미안하다고 말해 주는 가주님.
“…항상 고생이 많소.”
정작 자신보다도 어린 주제, 제 힘듦보다는 가족인 자신을 먼저 챙겨주는 가주님.
“고맙소. 차양당주.”
그런 가주님이 쓰러지셨다.
그런 가주님이…….
‘아.’
그 순간 당지명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뚝 끊기는 걸 느꼈다.
평생 참고 참아 왔던 것이 폭발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어이, 거기 멈춰.”
그리고 다짐했다.
‘넌, 여기서 죽는다.’
저자를,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