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화
아프다.
눈물 나게 아프다.
“끄으으…….”
고통 속에 눈을 뜬 당지명은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물… 무울…….”
갈라지는 목소리로 그리 신음하자 곧 차가운 냉수가 닮긴 유리잔이 들이밀어 졌다.
“으으…….”
얌전히 받아 들어 꿀꺽꿀꺽 삼켰다.
‘크으… 살겠다…….’
어느 정도 갈증을 해갈한 뒤 고맙다고 손을 휙휙 휘저었다. 물을 준 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불퇴나 율기나 다른 동생 놈들 중 하나겠지.
‘죽겠다. 그런데… 여긴 어디지?’
머릿속은 안개라도 낀 듯 뿌옇고, 사고는 조각구름처럼 끊겨 드문드문했다.
‘내가 어쩌다 여기 있는 거지…….’
멍하니 눈만 껌뻑껌뻑거리다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 달싹이려 했다.
“몸은 좀 괜찮으냐?”
먼저 들려온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헉!! 가, 가주ㄴ… 끄으으엑!!”
벌떡 일어나려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맹렬한 고통에 다시금 허물어져 내렸다.
그 모습에 곁에 있던 당위혼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편히 있거라. 몸 상태도 성치 않을 텐데.”
“아, 아닙… 그으으…….”
아닌 게 아니구만, 무슨.
갈빗대 하나를 지긋이 누르는 순간, 뽀각 하고 부서질 게 뻔한 당지명이 일어나려다 허우적거리길 한참, 결국 주제를 파악하고 얌전히 침상 위로 침몰하고 무안한 마음에 횡설수설 입을 열었다.
“그, 죄… 죄송합니다… 차양당의 다른 아이들인 줄 알고…….”
“괘념치 말거라. 원래 너를 돌보려 했던 것은 그 아이들이지만, 내가 그 아이들을 물리고 너를 살핀다 했음이니.”
“어, 어째서…….”
“기억나지 않느냐? 네가 모두를 구했음을.”
“제가 말입니까? 그게 무… 아…!! 흐, 흑시문주! 사패ㅊ… 끄으으윽…….”
그제야 기억이 돌아온 당지명은 또다시 벌떡 일어나려다 비명과 함께 침몰했다.
죽을 만큼 아픈 고통과 함께 되돌아온 기억은 분명 암담하기 짝이 없는 것.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려고 버둥거리는 모습에 결국 당위혼이 나서 그를 가만 눕힌 뒤에서야 상황은 안정됐다.
“묻고 싶은 게 많겠지. 다 설명해 줄 터이니 안정을 취하시오.”
어차피 하나하나 설명해 줄 테니.
그리 말한 당위혼은 곁에 있던 다기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차를 우려낸 후 잔에 따랐다.
어버버 거리는 당지명의 몸을 침상에 기대 앉혀준 뒤 찻잔을 건네며 자신 역시 마주 찻잔을 들었다.
“대형께서 처방해 주신 약재로 만든 약차일세. 회복에 좋겠지.”
“아… 옙… 감사합니다…….”
엉겁결에 찻잔을 받아든 당지명은 쭈뼛쭈뼛 약차를 홀짝였고, 모락모락 피어나오는 뿌연 김 너머 자신과 달리 편안히 약차를 음미하는 어린 가주를 흘끔흘끔 바라봤다.
당위혼.
자신보다 훨씬 어리면서도, 중후한 말투가 어색하지 않은 남자.
자신들의 대형이 여러 가지 의미로 그 나이 같지 않다면, 이 사람은 모든 면에서 좋은 의미로 그 나이대의 청년 같지 않았다.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자니, 당위혼이 문득 물어왔다.
“차가 입에 맞지 않으시오?”
“옙? 아, 아닙니다! 그, 그냥 아직 정신이 잘 들지 않아서…….”
“하긴. 이야기를 들어보니 고생이 많았다 들었소. 형님이 오시기 전까지 그대가 흑시문주를 상대로 버텨 주었기에 우리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으니까.”
“어… 그건…….”
그걸 버텼다고 할 수 있긴 할까?
이제야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을 되살펴 보자면, 자신은 그냥 개처럼 두들겨 맞다가 실신 직전에 대형의 뒷모습을 봤을 뿐이다.
애초에, 그렇게 따지자면…….
“자, 잠시! 그, 그러고 보니!! 가주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생각해 보니, 자신이 그렇게 죽어라 버텼던 배경엔 그들의 가주가 먼저 녹림투왕과 일전을 벌이다 암습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분명히… 큭……!”
“안정을 취하라니까.”
조금만 소리쳐도 덧나는 당지명을 보며 당위혼은 쯧쯧 혀를 찼다.
“나는 괜찮소. 형님께서 나도, 그대도 전부 치료해 주었지.”
“예? 대체 어떻게…….”
암만 생각해도 그게 말이 되나?
한 명은 죽기 일보 직전까지 두들겨 맞았고, 한 명은 한계 너머까지 힘을 끌어다 쓰다 뒤에서 칼을 맞았는데.
“글쎄. 형님께서 그 무공만큼이나 의술의 조예가 경지에 이르셨다는 뜻이겠지.”
당위혼은 혼란스러워하는 당지명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물론, 대부분은 자신이 기절해 있고 난 뒤의 일이라 그 역시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에게 들은 것을 재차 들려줄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당지명은 멍하니 입을 벌리다 허허롭게 웃었다.
“겨우 따라 왔다 싶었는데… 또 언제 거기까지…….”
믿기지 않아 고개를 젓는 모습.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왜냐면, 자신 역시 처음 깨어났을 때 딱 저런 모습이었을 테니까.
“…해서, 대형은 어딜 가셨습니까?”
“떠나셨다.”
“…예?”
갑자기요?
“아니, 돌아오신 지 얼마나 됐다고…….”
“그렇지. 하지만 바쁘신가 보더구나.”
후루룩.
당위혼은 마찬가지로 약차를 마시며 회상했다.
그의 어린 형님이 떠나기 전 모습을.
* * *
“…….”
“일어났느냐.”
눈을 떴을 땐 익숙한 침실이었다.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 눈을 껌뻑껌뻑거리던 당위혼은 자신의 집무실 천장을 바라보다 멍하니 고개를 내려 곁에 있는 어린 형님을 바라봤다.
“이건… 꿈입니까?”
“이렇게 생생한 꿈도 있느냐?”
“…하하. 하긴.”
꿈이라 여기기엔 복부에서 올라오는 욱신거림이 강제로 이것이 현실임을 자각시켜 주었다.
“어찌 된 것입니까?”
“어찌 되긴. 이 위대한 형님께서 너희들을 괴롭히는 사패천 놈팽이들을 전부 때려주고 왔다. 그 시체쟁이는 팔 한쪽을 잘라 줬고, 나머지들은 십 년간 불가침 조약을 맺은 뒤 도망치게 해줬다.”
“과연. 역시 형님이십니다.”
당위혼은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에 그의 어린 형님은 긍정과 인정을 받았음에도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뭘 과연이야? 너무 쉽게 인정하는 거 아니냐?”
“형님이시잖습니까.”
“에잉… 그럼 왜 그렇게 바보같이 웃고 있어? 등 뒤에서 칼도 맞은 놈이.”
“형님이 계시잖습니까.”
“…….”
결국 그의 어린 형은 인상을 팍 찌그러트렸다.
“바보 같은 놈. 모른 척하기냐? 네 상태가 어찌 됐는지 네가 가장 잘 알 텐데?”
“잘되지 않았겠습니까? 제가 이리 무탈히 숨 쉬고 있는데 형님께서 여기 계시다는 건, 다른 아이들도 크게 상한 곳이 없다는 뜻일 테니까.”
“…이 녀석이.”
대체 이 녀석을 어찌할꼬.
복잡 괴기하게 오만상을 만들어 내던 당유혼은 속이 답답한지 가슴을 쾅쾅 두들기다 끝내 한숨을 푹 내쉰 뒤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놈아…….”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덤덤히 말하며 옅은 웃음을 짓는 어린 동생에게 당유혼은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숙였다.
“어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 무인이, 자신의 전부라 할 수 있는 무공을 잃었는데.”
무공의 상실.
당위혼이 금기를 넘어서며 받은 대가는 다름 아닌 무인으로서의 사형 선고였다.
‘내가, 그걸 알려주는 게 아니었는데…….’
흑시문주에게 칼을 맞은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나은 결과일 수도 있었다.
한번 발동한 독인지경은 시간이 지날수록 받아야 할 채무를 눈덩이처럼 불린다.
처음엔 기혈이 꼬여 몇 달간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는 수준이라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땐 평생 않고 가야 할 내상이 생길 수 있게 된다.
그게 더욱 지나면 결국 무공을 상실하게 되고, 종래에는 목숨까지 잃게 된다.
그나마 최악까지 가기 전에 흑시문주의 암습으로 강제적으로 중단당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어찌 무인이 무공을 잃었는데, 그것을 다행이라 할 수 있을까.’
단전은 바스러지고, 기혈은 엉켰다.
워낙 몸에 좋은 것을 많이 먹여 뒀기에 잔병치레를 겪거나 몹쓸 병에 걸릴 일은 없겠지만, 지금껏 쌓아 왔던 내공은 전부 모래처럼 흩날려 사라졌다.
그야말로 무인에게 있어 최악의 사태.
그 사실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당유혼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당위혼은 가만 입을 열었다.
“형님. 형님께선 오해하시는 게 있습니다.”
“…오해?”
“제가 어째서 모든 것을 잃었다 생각하십니까?”
“그야…….”
무어라 말하려던 그의 어린 형이 입을 열기 전, 당위혼은 재빨리 한 가지 사실을 정정했다.
“형님, 저는 무인이기 이전에 가주입니다.”
“그, 그건…….”
“가주로서 모든 것은 가문입니다. 정확히는, 제가 이끄는 가족들이지요.”
무인으로서 모든 것을 잃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원정에서, 저희 중 한 명이라도 돌아오지 못한 이가 있습니까?”
“…없지.”
가주로서 자신은, 그 어떤 것도 잃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것으로 된 것입니다. 가주로서 어느 하나 잃지 않고 이리 무탈하게 돌아올 수 있었는데, 제 마음이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
나는 잃은 게 없다고.
담담히 말해 오는 그 모습에 당유혼은 찢어져라 눈을 부릅떴다.
“너는…….”
맞다.
맞는 말이다.
“그래… 그렇지. 너는, 너는… 결국 모두를 지켜냈구나…….”
자신과는 다른 결말.
경천동지할 무력을 지니고, 세상 사람들에게 독천이라 칭송받던 자신은 결국 그 누구도 지키지 못한 반면에, 눈앞의 어린 가주는 자신의 가족들을 훌륭히 지켜냈다.
그 무공은 자신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고, 명성이라함은 감히 명함조차 내밀 수 없을 지경임에도 눈앞의 어린 가주는 자신이 해내지 못한 것을 해냈다.
그러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위혼은 웃을 수 있었다.
아무도 지켜내지 못했던, 자신과는 다르게.
“하… 하하하…….”
경천동지할 무공?
온 천하에 떨칠 명성?
‘그래, 나는…….’
한 번도 이따위 것을 원한 적이 없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무공을 다 바쳐서라도 가족들이 살아 돌아올 수 있다면 그러길 간절히 바라왔고, 잠 못 드는 밤에 회한과 비탄으로 수없이 괴로워했다.
그러나 그런 자신과 달리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이 아이는 자신이 감히 해내지 못한 것을 해냈으니,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내가 틀렸구나.”
착각도 유분수지.
세상에 누가 누굴 가르치려 한단 말인가.
“너는… 모든 것을 지켜낸 것을.”
그 사실이 기뻤고, 또한 슬펐다.
매일 새벽마다 약초를 캐오며 가문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던 녀석은, 어느새 성장해 감히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것을 해내는 가주가 되었다.
‘언제나, 네 모습을 통해 그 녀석을 비추어 왔지만, 어느새 훌쩍 자란 네 녀석은… 우리보다 훨씬 훌륭한 어른이 되어 있었구나.’
어째서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을까.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당유혼이었고, 그에 다시 고개가 숙여질 때―
“형님.”
손을 뻗은 그의 어린 동생이, 자신의 형의 손을 단단히 맞잡으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형님께서 또 하나 착각하시는 게 있습니다.”
“…내가, 또 말이냐?”
“제가 모든 것을 지켜낸 게 아닙니다.”
제가 아니라,
“우리가, 모든 것을 지켜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틀리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