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화
우리는 틀리지 않았다.
“…하, 그러냐?”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녀석에게 듣는 그 말이 왜 이렇게 사람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건지.
“진짜, 피는 못 속이는구나.”
“예?”
“아니, 그런 게 있다.”
할애비나, 손주나 사람 말 한마디로 감동시키는 놀라운 재주가 있다니까.
“그래, 그럼 대충 상황 파악은 됐을 게다.”
“형님께서 놀라운 무위로 현 무림의 상황을 정리하셨다는 것 말입니까? 실로 경이로운 일이군요.”
“반응이 밋밋하구나.”
“형님께서 놀라운 무위로 현 무림의 상황을 정리하셨다는 것 말입니까?! 실로 경이로운 일이군요!”
뭐지.
이 녀석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아무튼.
“그래서, 당분간 큰 문제도 없겠다, 무림에 일시적 평화도 찾아왔겠다… 내가 좀 여유가 생기게 되어서 말이다.”
이래저래 해서,
“당분간, 여행을 좀 다녀올 생각이다.”
“여행 말입니까?”
“그래.”
아마도, 긴긴 여행이 되겠지.
“이번에 네가 하는 걸 보니 믿고 맡겨두어도 문제가 없겠다 싶더구나. 너도 알다시피 이번 사패천과의 전쟁에서 정천맹은 철저히 깨졌다. 스스로 난다 긴다 하던 놈들이 전부 흑상의 계략에 쪽도 못 쓰고 짓밟힌 덕에, 자기가 제일이라 깝죽대던 것들이 얌전히 찌그러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
이걸 흑상 놈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려나?
“명분에 죽고 사는 놈들답게, 당분간 사천 내에서 기 싸움을 벌이지도 못할 거다. 어쨌거나 네가 홀로 남아 전선을 유지해 준 덕택에 정파의 의기인가 나발인가가 유지될 수 있었다는 소문은 파다하니까. 청원, 그 늙은이도 우리를 도와준다더라.”
“맹주님께서 말입니까?”
“그 자리에 청성파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우던 녀석이 있지 않느냐. 딱히 마지막에는 그놈이라고 뭘 한 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녀석 역시 끝까지 후퇴하지 않고 결사항전을 했으니 덩달아 이름값이 올랐다더구나.”
진혁수.
어째 처음 볼 때부터 싸가지는 없어도 싹수는 있어 보이더니, 우량주를 발굴해 묻어가는 능력이 자기네 장문인 뺨쳤다.
‘빌어먹을 늙은이 같으니라고. 뭐? 자신들의 미래는 자기와 다르다고? 정치력으로 초절정을 넘나드는 것은 딱 빼다 박았구만.’
위혼이처럼 칼빵을 맞은 것도 아니고, 지명이처럼 죽기 전까지 처맞은 것도 아닌데 진혁수는 끝까지 남아서 당가와 함께했다는 것만으로 그 명성이 연일 상한가를 갱신했다.
물론, 그 이면엔 이번 일로 정천맹 내부에 힘깨나 쓴다는 놈들이 전부 대가리가 깨진 틈을 타, 미친 듯한 정치 공작으로 언론 조작을 해낸 청원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다.
“덕분에, 이제 그 늙은이는 당가와 청성, 그리고 정천맹을 운명 공동체로 여기게 됐을 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본가의 명성에 무임승차를 했다 봐야 하니, 본가의 위세가 커질수록 그들 역시 덩달아 이득을 본다는 것을 확신한 거지.”
이전까지 간만 보고 있었다면, 이번엔 아주 영혼까지 끌어모아 당가를 지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세상이 혼탁할수록 정치 무인은 빛을 보는 법. 당분간은 청원 그 늙은이의 판일 테니, 너무 큰 걱정 말거라. 혼탁하다 해도 정파의 천하가 열린 것이나 다름없으니 더더욱 네가 걱정할 것은 없을 테고. 덩달아, 그런 세상에선 마교 놈들 역시 쉽사리 준동하지 못할 게다.”
나는 차분히 위혼이에게 현 상황을 설명했고, 그 모든 말을 묵묵히 경청한 녀석이 입을 열었다.
“해서, 형님께선 여행을 다녀오신다는 것이군요.”
“그렇지.”
“멀리 가십니까?”
“뭘 굳이 멀리 가겠느냐. 그냥 마실이나 갔다 오는 게지.”
“그렇군요.”
위혼이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득 말했다.
“형님.”
“왜.”
“몸 성히 다녀오십시오.”
어디를 가든.
얼마나 가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
그 말에, 나 역시 녀석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다녀오마.”
* * *
우선 일차 여행지로 향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게는 빵실이가 있거든.
“헥헥!”
“그래, 고맙다.”
하늘을 나는 애완견, 최고다!
순식간에 호북 상공에 도달해, 가장 험악한 산 중턱으로 착륙한 녀석은 집채만 한 몸집에서 원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원래라면 진작 이렇게 됐어야 하지만…….’
녀석은 자신이 보통 영물이 아닌 것을 증명해 냈다.
강제적으로 성장시킨 대가로 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크기로 돌아왔어야 할 빵실이지만, 필요할 때만 몸을 거대화시키고 그렇지 않을 때는 본래 작은 몸체로 돌아와 효율적으로 진화 상태를 유지했다.
게다가, 진화하며 새로운 기능이 생긴 건지 저 알아서 자연지기를 흡수하더니 사실상 반영구적 진화 상태에 돌입했다.
그런 녀석을 조심히 들어 품에 안은 뒤 한 번 방문한 적이 있는 모옥으로 들어섰다.
“왔는가.”
“어, 왔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검천이 나를 맞아주었다.
녀석은 여전히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몸인 주제 나를 발견하고는 신기하다는 듯 히죽 웃었다.
“새 친구를 사귀었나 보군.”
“응, 인사해. 헥헥이… 윽, 그래그래. 무민(武敏)이야.”
헥헥이의 마구마구 핥기가 작렬했다.
평소에 내가 녀석을 헥헥이라 부를 땐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그래도 밖에 나와서 자신을 보일 땐 멋있어 보이고 싶은 건지 격렬히 저항했고, 녀석의 축축한 혀 놀림을 이기지 못한 나는 얌전히 두 손을 들고 항복했다.
“껄껄껄, 그래… 아주 용맹하고 민첩한 아이구나. 이리 와보겠느냐?”
검천이 부드럽게 두 팔을 벌리자, 헥헥이는 쪼르르 달려가 품에 안겼다.
그리고 검이 박힌 복부를 바라보며 낑낑거리는데, 검천은 껄껄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으니라. 이제는 익숙하니까.”
익숙하다라.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검천은 이내 헥헥이를 내게 돌려다 주었다.
허공섭물로.
“헥헥?”
하늘을 마음껏 나는 주제, 타의로 날게 되니 당황스러운지 앞뒷발을 열심히 버둥거리며 개헤엄을 치던 헥헥이는 곧 내 품에 안기고 나서야 안정을 되찾고 휴― 하고 숨을 내쉬었다.
진짜 여러 가지로 신기한 녀석이라니까.
“그래, 신승에게는 다녀왔는가?”
“어. 가서 기념품도 챙겨왔어.”
“기념품?”
“백팔나한진, 그리고 대환단.”
“…….”
녀석의 입이 다물렸다.
“신승은… 갔는가?”
“응. 먼 길 가느라 바쁘다더라. 붙잡지도 못했어.”
“…그런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권천에게 짧게 묵념을 표한 검천이 이내 나를 바라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무당은…….”
“걱정 마. 네가 없어도, 뒷바라지는 내가 해줄 테니까.”
“미안하네. 함께해 줄 수 없어서.”
“됐어. 지난 삼십 년간, 네 녀석 홀로 지켜왔잖아.”
그러니까,
“이젠 내게 맡기고 너도 편히 쉬어라.”
녀석도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꼴로, 이래저래 고생 참 많았다.
이젠, 내가 녀석들이 짊어지던 짐을 받아들 시간이다.
“…염치없지만, 무당을 부탁해도 되겠나?”
“물론이지. 너희 말코 도사 놈들은 이런 산에만 처박혀 몰랐겠지만, 우리 당가가 좀 잘나가는 게 아니거든.”
마구마구 잘나가 버린 덕택에, 망해 가는 문파 두어 개쯤 살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하하, 그런가.”
“어? 야… 야야, 너 뭐 해?”
쉬라고 했더니 검천은 갑자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덕분에 녀석의 온몸을 휘감고 있던 금줄도 함께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말라비틀어진 덩굴마냥 뚜둑―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 검천은 이내 괴로운 듯 큰 숨을 내쉬었다.
“친구를 잘 둔 덕에, 마지막으로 호사를 누려보려 한다네.”
“너…….”
뚜둑… 뚝…….
얼마나 오랜 기간 한곳에 붙박여 있었던 것인지, 한 걸음 한 걸음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녀석은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에도 초인과 같은 인내심으로 몸을 움직였고, 닫힌 방의 문을 열어젖혔다.
“후우우… 갈 곳이 있다네. 따라와 주시게.”
고통을 딛고 바깥으로 향한 녀석의 뒤를 따랐다.
이젠 묵묵히 그 뒤를 따르기만 하자, 녀석은 어느 거대한 절벽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더니 품에서 목갑 하나를 꺼내 건넸다.
“받게나.”
“이건…….”
“대환단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본문에선 신물이라 불리는 거라네.”
봉인된 목갑이지만, 그 안에서 숨길 수 없는 현기(玄氣)가 새어 나왔다.
설마,
“태청신단(太淸神丹)?”
“여벌의 목숨 정돈 되어주겠지.”
태청신단은 무당파 최고의 보물이었다.
대환단에 결코 밀리는 수준이 아니었고, 녀석의 말마따나 여벌의 목숨이라고도 불릴 만한 것이었다.
“이런 바보 같은 놈이! 이런 게 있었으면 진작 네가 먹었어야지!!”
“후후, 알지 않나. 내가 먹는다 한들, 바뀌는 게 없는 것을.”
이미 깨져버린 그릇이다.
아니, 이젠 그릇이라고도 불리기 힘든 수준이었다.
녀석의 상태는 그저 일부만 남은 사기 조각이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수준이었으니, 제아무리 좋은 영약을 먹어도 담을 수 있는 게 없어 그 어떤 방법으로도 고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괘념치 말게. 누구나 갈 때가 되면 가야만 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네. 그나마 나는 운이 좋아, 친구 하나 잘 둔덕에 일부나마 남기고 떠날 수 있게 되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니겠는가?”
“…네 맘대로 해, 빌어먹을 놈아.”
“고맙다네.”
옅게 웃은 녀석은 이내 몸을 돌려 벽을 마주하고 섰다.
부러져서 반밖에 남지 않은 검 자루를 쥐었고, 이내 천천히 한 걸음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스스…….
녀석을 따라 바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람뿐만이 아니었다.
하늘에 뭉게뭉게 떠가는 구름이 녀석의 움직임을 따라 함께 흘렀고, 불어오는 바람도 노랫소리를 내며 공명했다.
고통을 디뎌내고 나아가는 녀석의 걸음걸이는 어느새 춤 동작의 일부처럼 변해 있었고, 끔찍한 고통에 식은땀을 흘리던 얼굴은 어느새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검무(劍舞).
말 그대로, 녀석은 춤을 추고 있었다.
스스스…….
너울너울 움직이는 구름처럼.
부드럽게 흘러가는 바람처럼.
꾸물꾸물 굽이치는 물길처럼.
녀석의 걸음걸음은 자연을 닮아 있었고, 어느 샌가부터 녀석이 가만히 있어도 주변의 자연환경이 저 혼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그 신묘한 춤사위는 어느샌가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녀석이 움직이는 것인지, 주변 환경이 움직이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주변 자연과 혼연일체가 된 궁극의 검무(劍舞).
그것은 무인(武人)에게 있어 궁극이라 불리는 하나의 경지였으니,
“무위지경(無爲之境)…….”
초절정의 경지 따위도 한낱 미물로 바라볼 수 있을 무극의 경지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 고맙네, 벗이여.
녀석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듯 들려왔다.
자연과 하나 될수록, 검천의 존재감은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고, 어느 새부턴가 눈앞에 있음에도 녀석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신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 자네가 있음에, 편히 떠날 수 있게 되었으니.
바람처럼, 구름처럼, 물결처럼 흩어져가는 녀석은,
- 미안하고, 또 고맙다네. 나의 벗이여.
그렇게, 작별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