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화
“쯧.”
파국이군.
부질없는 협상이 결렬됐음을 깨달은 순간 겁화존자가 움직였다.
그는 삼대존자 중 무공을 상징하는 이.
선두에서 전위를 맡을 이로 그보다 제격인 이가 없었다.
극양마공(極陽魔功).
염제강림(炎帝降臨).
하늘 높이 뛰어오른 겁화존자의 중심으로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불꽃은 점점 커져 갔다. 주변 대기를 잠식하며 피어오른 불꽃이 그 크기를 십여 장 가까이 불렸을 때, 그것은 더 이상 불꽃이 아니라 작은 태양이 되었다.
“오랜만이네.”
이글거리는 열기에 주변 설산이 녹아내렸지만, 정작 그것을 마주한 흉왕은 흉포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대로 일소(一掃)시켜주마.”
겁화존자는 그대로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작은 태양이 설산의 눈발을 모두 녹여 내리며 내려꽂혔고, 거대한 폭발과 함께 막대한 증기가 몰아쳤다.
쿠구구구…….
그야말로 필살(必殺)의 일격.
하지만,
“아쉬워.”
증기가 걷혔을 때, 겁화존자는 복부에서 피를 흘리며 무릎 꿇고 있었고, 흉왕은 아무렇지 않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열기로 따지면, 삼십 년 전 그때보다 못하잖아?”
“크윽…….”
충돌 직전, 무언가가 날아와 겁화존자의 복부를 꿰뚫었다. 그 정체는 흉왕이 내던진 암기. 찰나의 순간 기습적으로 내던진 암기는 작은 태양마저 꿰뚫고 그의 복부에 구멍을 뚫었고, 그렇게 생긴 빈틈에 흉왕은 주변에 쌓인 눈을 움직여 자신의 불꽃을 꺼트렸다.
“아, 이거? 설독(雪毒)이라고. 오랜만이지?”
당연 그가 던진 눈이 그냥 눈은 아니었다.
깊게 쌓인 눈에 특수한 독약을 투여하여 그 성질을 변이시켜버린 것. 일반적인 불꽃에 강한 저항력을 만들고, 그 일부라도 맞으면 사람의 온몸이 녹아내릴 정도로 지독해진 눈 형태의 극독이 바로 설독(雪毒)이었다.
“삼십 년 전에 너희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거였는데, 보고 있으면 향수가 생기지 않아?”
설독에 뒤덮인 채 온몸이 녹아내리는 겁화존자는 어느새 다가온 손아귀에 목이 움켜쥐어져 번쩍 들어 올려졌다.
“그런데 이건 또 뭐야.”
문득 흉왕의 눈이 그의 가슴팍에 생긴 빙정에 향했다.
“큭큭… 내가 예쁘게 뚫어준 곳을 얼음으로 잘도 포장해 놨군. 세상을 태울 불꽃이라는 겁화(怯火)가, 겨우 이런 얼음 조각에 의지해 목숨줄을 붙잡고 있는 거냐?”
모독적인 말들이 퍼부어졌지만, 겁화존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크흐… 상관, 없다…….”
텁, 텁…….
끔찍한 고통에도 두 손을 움직였고, 자신의 목을 움켜쥔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설령… 구차할지라도… 내 신성한… 의무를… 다할 수 있다면……!”
그 순간 흉왕과 겁화존자를 함께 가두는 육면체의 반투명한 상자가 생성되었다.
“…이건.”
흘깃 시선을 돌리자 저편에서 두 손을 맞잡고 진언을 외우는 무결존자가 보였다.
“쯧, 늦었군.”
피하긴 늦었다.
어느새 그들을 봉인한 투명한 결정이 생성되었고, 거기에 더해 흉왕의 머리 위와 발밑으로 두 개의 원이 생성되었다.
“소매치기냐?”
전이 문을 만들어낸 혼몽존자는 겁화존자만을 후방으로 빼돌렸다. 그리고 별안간 혼자 남게 된 흉왕을 향해 무결존자가 안광을 뿜어내며 진언을 완성시켰다.
“압(壓)!”
쿠구구구…….
그들의 상공에서 파문이 일며, 그 중심에서 거대한 손아귀가 떨어져 내렸다.
일전에 겁화존자가 만들어낸 작은 태양만큼이나 거대한 손아귀는 흉왕이 가두어진 봉인을 통째로 짓누르며 틀어박혔다.
구구구구!!
상위 마수 중에서도 그 힘을 현계가 감당하기 버거워 이계에만 머물러 있는 강자의 손을 소환하는 성법이었다.
“죽어라… 흉왕!”
콰와아앙!!
굉음과 함께 거대한 손이 흉왕이 봉인된 육면체의 결정을 짓눌렀다.
근육과 핏줄로 가득한 손아귀가 바닥에 내리꽂힌 모습은 하늘에서 거대한 기둥이 떨어진 것만 같았다.
“놈!”
주변 삼 장 여를 통째로 짓누른 상태에서도 무결존자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가 아는 흉왕이라면, 저 하늘에 연결된 것만 같은 거대한 기둥조차 번쩍 들어 올리며 부활할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
무언가 이상했다.
분명 저항이 있을 거라 확신했는데, 상대는 아무런 미동도 없다.
‘천하의 흉왕이 이렇게 쉽게 당해줄 리가…….’
의혹이 차오를 때,
“뒤!”
혼몽존자의 다급한 외침이 귓전을 때렸다.
그에 다급히 뒤로 몸을 돌린 무결존자는 깨달았다.
‘아…….’
늦었다고.
펄럭―
흉왕은 어느새 거대한 호접의 날개를 등 뒤로 뻗어낸 채 뒤를 점하고 있었다. 자신이 소환해 낸 마수의 팔이 봉인 수정을 부수는 그 찰나의 순간 몸을 빼냈을 뿐 아니라, 어느새 자신의 뒤를 점하기까지 한 것이다.
“죽어라.”
그의 입가가 비틀리며 분명한 의지를 토했다.
다음 순간, 그의 시야에 검은 선이 그려졌다.
그 궤적은 분명 자신의 심장 어림을 향하고 있었으니, 상위 마수를 소환한 직후의 자신은 감히 막을 수도 없는 쾌속무비의 일격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건가.
순간 주마등이 머리를 스칠 때,
퍽―
둔탁한 충격이 들이닥쳤다.
하지만 예상한 그런 충격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자신을 구하기 위해 누군가 밀쳐낸 것.
그리고 이런 큼지막한 손아귀를 가진 이는 여기 있는 이들 중 하나뿐이었다.
푸욱―
“겁화!!”
“크윽…….”
자신 대신 흉왕의 손에 심장이 꿰뚫린 겁화존자의 모습이 보였다.
“크흐… 광신도 놈들 주제, 동료애라도 품으려는 건가?”
“흐… 흐흐… 나와… 같이 가자… 흉왕…….”
겁화존자는 큼지막한 두 팔로 흉왕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조금 전과 비슷하지만, 이번엔 그 의지가 달랐다.
구구구…….
불꽃이 피어올랐다.
겁화존자를 중심으로 피어오른 불꽃은 삽시간에 거대한 화마가 되었고, 거대한 열기가 둘을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흉왕!! 지옥으로 떨어져라!!”
극양마공(極陽魔功).
극열지옥(極熱地獄).
발할 수 있는 최대한의 화력의 화공(火功).
작은 태양을 넘어, 거대한 극양의 폭풍이 설산 중앙에서 몰아쳤다.
‘겁화!!’
그것은 그와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두 삼대존자들도 본적이 없던 화력이었다. 그렇기에, 그것이 겁화존자가 자신의 생명마저 태워 최후로 빚어낸 불꽃임을 모를 수가 없었다.
막대한 증기가 태풍처럼 몰아치고, 시야를 가렸던 안개가 걷히며 하나의 인영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홀로 우뚝 서 있는 것은,
“이놈, 흉왕!!”
“확실히, 이번 것은 제법 위험했어.”
온몸이 반쯤 얼어붙은 채 한 손에는 아직도 타오르는 불꽃의 심장을 쥔 흉왕이었다.
“삼십 년 전, 내 원한을 아직도 떨쳐내지 못했나 보군. 그 빈틈이 아니었다면… 한쪽 팔을 내줘야 했겠어.”
툭―
타오르는 심장을 바닥에 내던진 그가 발로 짓이겨 마지막 불씨를 꺼트렸다.
“……!!”
그 모습에 무결존자의 머릿속에 무언가 뚝 끊기는 듯한 기분이 일었다.
“흉왕!!”
무결존자는 비명에 가까운 포효를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그와 함께 하단전이 열리고, 중단전이 개방되며, 상단전까지 열어젖혀 졌다.
무인과 사제, 마도의 길을 모두 걷고 있는 그였기에 가능한 기예.
체내의 소우주가 활짝 개방되며 천지타통(天地打通)이 이루어졌다.
하늘과 땅 사이 기운을, 일개 인간이 오롯이 통로로 하여 흐르게 하는 상태.
겁화존자가 그러했듯, 무결존자 역시 그 자신이 지금껏 한 번도 도달하지 못했던 영역에 이르렀음을 직감했다.
‘지금이라면!’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음에 기뻐하기보다, 그러했음에 자신이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다.
저 괴물의 숨통을 끊을 만한 그런 가능성을!
‘가능하다, 지금이라면 가능해!’
온몸에 마기를 휘감은 그가 손을 내뻗었다.
흉왕 역시 그에 반응하며 마주 손을 내뻗었다.
그리고 그 두 손이 맞닿기 직전,
“건곤대나이(乾坤大挪移).”
하늘과 땅이 뒤집혔다.
“…뭐?”
천하의 흉왕조차 당황하는 게 보였다.
정말, 말 그대로 그들이 서 있던 하늘과 땅이 뒤집혔으니까.
하지만 당황도 잠시.
흉왕은 밟고 선 땅이 하늘이 되고, 머리 위에 둔 하늘이 땅이 되는 기괴한 경험에도 곧 침착을 되찾으며 움직였다.
‘실로, 괴물 같은 것!’
괜히 교의 대적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전투에 있어 경이로울 정도의 천부적 재능.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괴이함 속에서도 곧잘 익숙해지고, 어떤 고난과 역경에서도 답을 찾아낸다.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기어코 적응해 낸 흉왕이 자신의 뒤편을 향해 손을 뻗어 숨어 있던 자신을 노릴 때, 무결존자는 이를 악물며 다시 한번 건곤대나이를 발동시켰다.
“……!”
또다시 하늘과 땅이 뒤바뀌고, 흉왕은 완전히 무방비한 허점을 드러냈다.
그 상황에서,
천마신공(天魔神功).
건곤대나이(乾坤大挪移).
무결존자는 다시 한번 건곤대나이를 발동시켰다.
‘바로, 지금.’
무결존자는 그제야 움직였다.
상대를 무너트린 뒤에도 방심하지 않고, 한 번 더 상대의 균형을 일그러트린 뒤에서야 일장을 날렸다.
쩌엉!!
등판을 후려치는 일격에 흉왕의 몸이 뒤로 꺾였다.
천마신공(天魔神功).
건곤대나이(乾坤大挪移).
다시 한번 하늘과 땅이 뒤집혔다.
이번엔 앞으로 돌아간 무결존자의 주먹이 흉왕의 복부에 꽂혔다.
“커헉!”
검게 죽은 피가 토해졌고,
천마신공(天魔神功).
건곤대나이(乾坤大挪移).
또다시 하늘과 땅을 뒤집어, 이번엔 그의 발목을 노렸다.
빠악!
흉왕의 신형이 무너져 내리고, 과부하에 달한 무결존자의 두 눈과 코, 입에서 검은 피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더, 더… 더!’
한 번의 일격을 가할 때마다, 그의 몸은 눈에 띌 만큼 죽어가지만 도저히 맹공을 멈출 수 없었다.
유효타를 먹일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욱 피해를 입혀 놔야 한다.
몰아치는 것은 무결존자였지만, 쫓기는 듯한 것도 그 자신이었다.
‘더… 더… 더!’
그렇게 온몸이 피 칠갑이 될 정도로 몰아붙이던 그때,
터턱―
“…아, 이제야 알겠네.”
무언가가 자신의 발목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이건…….’
그것은 그림자에서 솟구친 촉수였다.
‘탐식종의…….’
드문드문 끊기는 사고가 거기까지 이어질 때, 그의 몸이 거칠게 내동댕이쳐졌다.
바닥에 그려진 원을 통해 십여 장이나 떨어진 곳에 내던져졌고, 자신이 있던 공간은 어느새 거대한 화마가 들이닥쳐 있었다.
아니, 단순히 불꽃만이 들이닥치는 게 아니었다.
‘혼몽…….’
자신과 겁화가 시간을 끄는 동안 혼몽존자는 대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로 수십 개의 원이 생겨나 있었고, 그로부터 수십 개의 손이 뻗어 나와 수인(手印)을 맺고 있었다.
그에 따라 흉왕을 향해 날벼락과 번개, 얼음덩어리, 불꽃 폭풍이 사정없이 몰아쳤다.
“아…….”
저게 과연 한 사람에게 쏟아질 수 있는가 싶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폭격.
하지만 혼몽존자의 공격은 결코 그것이 끝이 아니었으니―
자신과 같이 피눈물을 흘리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그녀가 소리쳤다.
“영멸하시지요, 흉왕!”
대마법(大魔法).
극음지계(極陰之界).
쿠구구구!!
잠시 후, 만년설조차 얼려버리는 거대한 눈 폭풍이 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