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화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만년설조차 얼려 버리는 거대한 눈보라가 몰아쳤고, 극양의 화공에 녹아내렸던 설산은 다시금 얼어붙었다.
모든 것이 딱딱한 얼음이 되어버린 세상.
사시사철 눈보라가 몰아친다는 이계(異陰), 극음지계(極陰之界)를 현계에 구현한 결과였다.
“헉… 헉… 허억…….”
그 여파로 창백한 안색으로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는 혼몽존자의 온몸에는 식은땀이 비처럼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것들은 곧 주변 냉기에 얼어붙어 서리가 되어버렸다.
“혼몽! 어찌 된 것인가! 흉왕은……!!”
그녀에 의해 뒤편으로 전이되었다가 허겁지겁 돌아온 무결존자가 다급히 물었다.
“…일단, 제 술법에는 그의 존재가 감지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극음지계에 당해 소멸되었다면 좋겠지만…….”
그런 긍정적인 상상으로 죽음을 바랄 수 있는 존재라면, 애초에 흉왕이라고 불리지도 않았겠지.
“그는… 나태종의 권능을 흡수한 것으로 보였다.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지간한 대마수들에 필적하는 속도를 지니고 있는 듯했으니 그대의 술법에 당하기 전 몸을 빼냈을 수도 있다.”
“일리가 있군요. 그럼 감지 범위를 확대해 보겠습니다.”
혼몽존자 역시 결코 방심을 풀지 않았다.
대마법을 펼치느라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 같음에도 정신을 집중하며 수인을 맺었다.
‘그는 재앙이다. 사람의 상상력으로 한계를 재단해서는 안 돼.’
어쩌면 부상을 입은 그가 일시적으로 회복하기 위해 천산 밖으로까지 빠져나갔을 수 있으리라 상정하고 감지 술법을 펼쳤다. 그물망처럼 퍼져 나가는 술법이 가장 먼저 포착한 것은 설산 전체에 드리운 얼음.
그녀가 펼쳐낸 극음지계가 눈 쌓인 설산조차 얼려 딱딱한 얼음산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혹여나 이곳에 파묻혔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적을 경시하지 않아야 한다 해서, 과도하게 상향 평가를 해버리는 것도 금물이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흉왕이 미처 극음지계를 피하지 못하고 갇혔는데, 그가 도망갔을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배제했다간 통탄을 금치 못 할 테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얼어붙은 빙산의 내부도 하나하나 살폈다.
‘마치, 수백 개의 거대한 면경(面鏡)이 서로를 비추는 것만 같은… 잠깐, 면경이라고?’
그녀의 머릿속에 불길함이 스쳤다.
마도의 비의를 탐하며 수천의 주문을 익히고, 수백의 이계에 대한 지식을 익힌 그녀였기에, 모든 것이 면경에 비추어진 듯 그려진 이계의 존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만화경(萬華境)… 설마!’
재빨리 수인을 맺으며 등 뒤로 거대한 눈을 떠올렸다.
단순히 눈으로만 보는 것으론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마법.
흉측하고 거대한 눈알이 그녀의 등 뒤에서 나타났고, 그 대가로 혼몽존자의 감긴 두 눈에선 피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혼몽존자는 개의치 않고 나타난 거대한 눈알로 빙산을 살폈다.
그리고,
“……!!”
그 속에서 그녀는 발견하고 말았다.
빙산을 통해 연결된 이계, 그곳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끔찍한 악의를.
“다, 당장 도망쳐야……!!”
다급히 입을 연 그녀가 위험을 알리려 했을 때,
덥석―
혼몽존자의 뒤편에 있던 빙산에서 뻗어진 손이 그녀의 입과 목을 움켜쥐며 그녀를 수정 속으로 끌어당겼다.
‘커흑!’
물에 빠진 듯한 감각이 닥쳐왔다.
세계와 세계의 경계면을 넘는 기이한 감각.
그 감각 속에서 혼몽존자는 기괴한 세상으로 내던져졌다.
“아…….”
하늘과 땅이 온통 얼어붙은 빙산으로 가득한 세상.
발 디딜 곳을 구분할 수 없이, 온 세상이 거울에 비추어진 듯한 기괴한 세상 속엔 그보다 더욱 기괴한 괴물이 살의로 가득한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인사해. 네 덕분에, 아주 화난 친구들이 많으니까.”
그 가운데에 엉망진창의 몰골이 된 흉왕이 있었다.
“흉왕……!!”
문답무용.
죽음을 직감한 혼몽존자는 자신이 가진 모든 마력을 모아 술법을 전개했다.
* * *
콰아앙!!
폭음과 함께 빙산 하나가 붕괴하며 그 속에서 하나의 인영이 데굴데굴 땅바닥을 굴렀다.
“이놈!! 흉왕!!”
혼몽존자가 빙산 안으로 납치된 후 다급히 성법을 전개하던 무결존자는 거대한 폭발에 휩쓸려 튕겨 나갔고, 벌떡 일어난 이후 그 안에서 굴러나온 흉왕을 발견하고 안광을 폭사했다.
“혼몽은 어디 있느냐!!”
“…흐, 그렇게 애타게 찾지 않아도 돼. 곧 곁으로 보내줄 테니까.”
“이노오옴!!”
홀로 남았다.
그 사실에 무결존자는 모든 마력을 폭발시키며 달려들었다.
“이놈!! 흉왕!!”
그의 목을 움켜쥐며 빙벽에 처박았다.
“너를 죽이겠다!!”
이제 자신 홀로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무결존자는 가지고 있던 모든 마력을 폭사시켰다.
다른 이가 휩쓸릴까 걱정할 필요도 없어졌고, 그런 걱정을 할 수도 없어졌다.
“너를… 너를… 죽이겠다!! 무슨 수를 써서도… 너만은!!”
“큭… 큭큭… 화가 나나? 분노가… 치밀어… 오르나?”
목이 졸려 켁켁 거리면서도 흉왕은 웃었다.
‘당연한 말을!’
너무도 당연한 말이기에, 답할 가치도 없는 말이라 여겼다.
그때, 흉왕이 입 모양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럼, 대체 왜 그랬어…….’
흠칫!
무결존자의 눈이 크게 뜨였다.
지독한 살기만이 담긴 줄 알았던 눈.
하지만 그 안에는 살기로 덮어진 더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원망, 증오… 그리고…….’
회한과 슬픔.
‘아…….’
그저 분노밖에 모르고, 파괴밖에 모르는 흉험한 왕이라는 존재의 눈에 비추어진 자신이 보였다.
또한, 그런 자신에게 비추어진 흉왕이 보였다.
‘저건…….’
그 감정은 자신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지독한 감정.
지난 삼십 년을 자신의 속에서 응어리져 왔던 그 감정.
‘지독히도… 닮아 있구나…….’
그 사실에 무결존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터져 나올 정도로 억세게 깨문 그는 두 눈에서 귀화를 피워내며 스스로 되뇌었다.
‘…그래서, 그래서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분노와 복수심으로 물들어 자신들을 찾아왔다 생각한 상대가, 사실은 자신의 후손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과 공멸하러 왔음을 깨달았다.
그게 마치, 자신들이 존경해마지 않는 구주를 구하기 위해서 흉왕에게 무릎까지 꿇을 수 있던 자신과 크게 다를 바 없음도 깨달았다.
조금만 더 그 사실을 일찍 알았다면, 서로가 더 이상 전쟁을 원치 않음을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다면 이렇게까지 파국으로 이르지 않았을지도 모름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걸 깨달아봐야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파국이다. 이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음이니!’
이미 끝의 끝까지 치달은 파국 속에서 무결존자는 자신이 가진 모든 마력을 동원해 수인을 맺었다.
“함께… 가자… 흉왕!”
거대한 그림자가 생겼다.
그것의 정체는 흉왕과 자신을 동시에 집어삼킬 듯 벌어진 커다란 입.
‘깊은 늪의 포식자…….’
극음지계에 의해 얼어붙은 빙산의 봉우리마저 삼킬 만큼 거대한 동체를 지닌 상위 마수가 소환되었다.
무결존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느끼며 남은 마력을 총동원해 상대를 옭아맸다.
비록 예상 못 한 최후라지만, 교의 대적과 함께 가는 최후라면 나쁘지 않을 터.
이젠 정말 죽을 힘을 다해 몰아붙이는 그때,
푸욱―
“죽어라… 흉… 컥?”
무언가가 그의 복부를 꿰뚫으며 쑤셔박혔다.
‘무… 슨…….’
등허리에서부터 삐죽 튀어나와 복부를 꿰뚫고 바닥까지 박힌 것은 거대한 암창(暗槍).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기둥과도 같은 그것은, 자신을 꿰뚫은 것 하나가 끝이 아니었다.
푹, 푸푸푸푹…….
“…아.”
검은 비가 쏟아 내리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기둥과 같이 굵고 흉험한 기둥이었다.
그것들은 ‘깊은 늪의 포식자’를 꿰뚫고 박혀 들고 있었으니, 그 정체가 사실은 무언가의 이빨이란 것을 깨달은 것은 차마 알고 싶지 않았던 현실이었다.
“흉… 왕…….”
거대한 짐승이 있었다.
‘깊은 늪의 포식자’보다 더욱 거대하고, 탐욕스러운 이빨을 지닌 짐승이.
그 모습이 마치 흉왕을 똑 닮아 있었기에, 그 악의에 꿰뚫린 무결존자는 악으로 버텨왔던 지난 삼십 년의 세월이 흘러나가는 것을 느꼈다.
‘끝…인가…….’
더 이상은 서 있을 힘도 남지 않게 된 무결존자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깊이 읍했다.
‘죄송…합니다…….’
그 방향은 지금쯤 저 멀리 떠났을 대마수가 있는 곳과 정반대 방향.
그의 구주가 향했을 위치를 숨기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속임수였다.
하지만,
‘부디… 강녕하십시오…….’
그의 마지막 의지만큼은 진심이었으니,
“천마재림(天魔再臨)… 만마앙복(萬魔仰伏)…….”
눈이 감긴 그의 시선이, 어둠에 휩쓸려 나갔다.
* * *
“…하.”
죽겠네, 진짜.
결국 마지막 남은 세 놈까지 싹 다 족쳤다.
“죽겠다, 죽겠어.”
암만 심각한 부상을 입은 놈들이라지만, 하나도 힘든 데 세 명을 동시에 상대하려니 진짜 죽을 맛이었다.
“하긴, 결국 죽겠지만.”
이미 ‘나’를 유지하는 그릇은 깨졌다.
이번 전투에서 칠대 금기 중 세 개를 동시에 사용했으니, 살아남길 바라는 게 오히려 꿈과 같은 일.
툭―
“응?”
가만히 끝을 회상하고 있자니, 발치에 걸리는 게 보였다.
“쯧.”
그건 엎드린 자세 그대로 죽어 있는 무결존자였다.
“마지막까지, 그 녀석을 지키겠다는 거냐?”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다.
떠나는 그 순간까지 천마를 향한 마음은 진심이지만, 이렇게 정반대 방향을 향해 읍함으로써 내가 허탕을 치길 바라는 그런 잔수겠지.
그야말로 죽어가며 발휘한 최후의 기지겠지만,
“…전부, 부질없는 것임을.”
이 녀석은 알까?
사실, 그런 행위는 애초부터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는 것을.
단순히 내가 천마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거나, 녀석이 도망친다고 끝까지 쫓아간다 하는 의미가 아니었다.
왜냐면,
“애초에, 네 녀석들이 그리 바라마지 않던 녀석은 처음부터 여기 있었는데.”
그걸, 오로지 네 녀석들만 모르고 있었을 뿐.
“슬슬 나와라. 암만 때려죽일 네 녀석들이라지만… 이 꼴을 더 보고 있으면, 진짜 더러워진 이 기분을 주체하기 힘들 것 같거든.”
가만히 자리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이런, 이미 눈치채고 있었는가?”
얼어붙은 빙하 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콰득…….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후 누군가가 빙하 속에서 걸어 나왔다.
봉두난발의 몰골과 엉망진창의 행색.
분명 사지를 다 짓이겨 놨건만, 어느새 팔다리 멀쩡하게 걸어 나오는 녀석을 과거, 사람들은 불가살(不可殺)이라 불렀다.
그러나,
“역겨움에 역겨움을 곱하니 이루 말할 수가 없군.”
나는 그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체를 입에 담았다.
“천마(天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