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화
정천(正天) 이십 년.
정천맹이 세워진 지 이십 년이 흘렀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길, 그전은 참으로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오십 년 전 일어났던 전쟁의 여파로 나태해진 협의가 땅바닥을 굴러다녔다던 나타협의(懶打俠義) 시대를 지나, 그 틈을 타 온갖 세력들이 패권을 잡기 위해 날뛰던 만가쟁패(萬家爭覇)의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이 세상은 참으로 살기 힘들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제때 뭉치지도 못하던 사파들이 구패(九覇)니 구천(九天)이니 하더니 슬금슬금 몸을 일으켜 지금의 사패천(士覇天)이라는 대집단을 만들어 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걱정하는 이가 없다.
왜냐면, 작음의 무림에는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가 있으니까.
스스로 아니라고 하지만, 정천맹을 만들며 무너진 정파의 의기를 되살리고, 진정 협의의 기치를 높이 부르짖으며 찬란한 새 시대를 열어젖힌 그들이 있으니까.
세상의 혼란을 잠재운 그들의 의기를 높여, 사람들은 작금의 시대를 이리 부르고 있었다.
정천협의(正天俠義).
진정, 옳은 하늘이 열린 시대가 찾아왔다고.
* * *
만화평(萬和平).
거대한 평야에 수만에 이르는 인파가 몰려 있었다.
그들은 작금 시대를 둘로 나누어 운영한다 평가받는 정천맹과 사패천이었다.
“이렇게 만나 뵈니 실로 영광입니다.”
그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사패천의 선두에 있는 이였다.
머리 위에는 삿갓이 쓰여 있어 그 안을 아무도 본 적이 없다 하여 무면(無面). 온 세상마저 자신의 손해득실에 따라 팔아먹을 수 있다 하여 천상(天商)이라 불리는 이가 있으니, 현 사패천의 천주(天主)인 무면천상(無面天商)이 바로 그의 정체였다.
“오랜만입니다.”
그런 무면천상의 등장에 정천맹에서도 한 명의 인영이 앞으로 나섰다.
마주 포권을 취하는 그 모습은 겸손하면서도 당당했으니, 그 인물의 등장으로 하여금 정천맹의 무인들은 딱히 무언가를 하지 않았음에도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나선 이가 바로 정천맹의 이대 맹주이자,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의 가주, 독천(毒天) 당위혼이었기 때문이었다.
“십 년 전에 뵌 이후, 이렇게 다시 뵙게 되는군요.”
“그때 끝을 내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당금 천하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두 지존의 대화치고는 실로 공손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있나.
한 명은 한때 흑상(黑商)이라 불린 상인 출신에, 한 명은 당금제일의 협객이라 불린 이니까.
그리고, 그들은 사실 십 년 전에도 이러한 자리를 갖춘 적이 있었다.
‘그때는, 무승부였던가.’
이십 년 전.
지금은 홀연히 사라져 버린 존재이자, 정파에서도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한 명의 괴인이 당가에 있었다.
그 존재는 당시 정천맹을 함정에 몰아넣고 궤멸 직전까지 밀어붙였던 사패천의 공세를 막아내고, 십년지약을 이루어냈다.
그 약속 이후 괴인을 다시 찾아볼 수 없었고, 그 사실에 기세를 얻은 사패천은 십년지약이 끝나는 날 대회전을 치루려 했으나 무승부로 끝났다.
결국 십년지약은 한 번 더 이루어져 다음 십 년이 흐를 때까지 정사 간의 불가침 조약이 연장되었고, 지금에 이르러 사패천주가 된 흑상, 아니, 무면천상은 총 이십 년간의 결실을 볼 준비를 한 채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
‘이번엔 다를 것이다.’
사패천을 결성해 사파를 일통하기까지 십 년이 걸렸고, 그 사패천의 천주가 되기까지 또다시 십 년이 걸렸다.
처음 자신이 눈여겨보며 천하일통의 패로 쓰려던 괴인은 예상을 넘어 괴물이 되어버렸고, 그자가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지만, 무슨 일인지 이십 년의 시간 동안 그는 무림에 그림자 하나 비추지 않았다.
그 사실이 무면천상에게 자신감을 실어주었다.
‘높은 확률로 그자는 잠력을 대가로 힘을 빌어다 쓰는 대법을 발동시키고, 그 여파로 죽음에 이르렀을 것이다. 당가에는 그런 수법이 왕왕 존재한다 했으니까.’
당시 그자를 천하일통의 패로 쓰기 위해 온 정보망을 가동하여 감시하고 있었기에 무면천상은 그리 추측했다.
그리고, 이십 년을 지켜보며 확신하게 된 지금 그는 자신이 가진 패를 총동원하며 평생의 숙원을 이루기로 결심했다.
‘사패천의 천주가 되어 진정한 사파의 지존이 된 지로부터 십 년이 흐른 오늘이야말로, 천하를 한 손에 쥘 진정한 천상(天商)이 되겠다.’
야욕에 가득 찬 그의 안광이 삿갓 아래로 빛을 발했다.
“하면, 정천맹주의 의지는 지난 십 년과 같으시겠지요?”
“일대일로 겨루어 승부를 보자는 말씀이시라면, 제 생각은 그와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승부를 결해 봅시다.”
무면천상이 앞으로 나섰고, 그에 호응하듯 당위혼 역시 마주 앞으로 나섰다.
그들을 주위로 백여 장의 공터가 생겼다.
당대 정사의 지존끼리 승부를 겨루는 장소이니, 그 정도의 공간은 당연히 마련되어야 했다.
그런데 그때,
씨익―
삿갓 아래로, 무면천상의 입가가 올라가더니 비릿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역시, 핏줄은 숨길 수 없다더니. 그자의 동생답게 오만하기 짝이 없으시군요.”
그는 한쪽 손을 번쩍 들어 내공을 모으더니, 그대로 지면을 후려쳤다.
콰아앙!!
경천동지할 내공에 의해 주변 일대가 폭발하며 지각이 갈아엎어지고, 그 여파로 지면 아래에 숨겨져 있던 것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쿠쿠쿵!!
“그것이, 당신의 사인(死因)입니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세 개의 관.
솟구쳐 오른 세 개의 관이 열리며, 그 안에서 세 구의 시체… 아니, 세 구의 강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투왕, 흑시문주, 그리고 저자는…….”
“흘흘, 얼굴을 보긴 처음입니까? 소개해 드리지요, 전대 모용가주님이십니다.”
“흑시문의 최근 동태가 심상치 않다고는 들었는데, 설마 그들을 몰살시키고 비술을 강탈한 것입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비의를 완성시켜 준 것이지요.”
“그으으…….”
“그르르…….”
몸을 일으킨 강시들에게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들의 몸에서 흉험한 혈기(血氣)가 뿜어져 나왔다.
“전설에나 나오던 혈강시(血殭屍)를 제가 완성시켜 주었으니, 흑시문주 역시 제게 감사할 것입니다.”
그들의 등장에 정천맹 측에서는 이상함을 감지하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둘 이쪽으로 달려오려 했으나, 그들 사이에 벌어진 간극이 너무나 아득했다.
“자, 그럼 끝입니다!”
무려 초절정의 경지를 넘어선 이들로 만들어진 혈강시가 세 구.
그 자신과 함께라면 초절정의 경지를 밟은 고수만 넷이 존재하는 상황이다.
저들이 백여 장의 거리를 좁히기 전에 못해도 치명상을 입히는 건 확실한 상황!
파팟!!
동시에 땅을 박찬 네 인영이 당위혼의 사방을 점하며 달려들었고, 그중에서도 전방을 향해 달려들던 무면천상은 섬뜩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
승리를 확신하고 쇄도하던 무면천상은 무언가 기이한 기시감에 빠졌다.
‘뭐지?’
이제 당가의 가주까지와의 거리는 불과 일 장도 남지 않았다.
빠져나갈 틈도 없고, 지원군과의 거리는 아득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분명 그런 상황인데,
‘왜… 저자는 이렇게 평온한 것이지?’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무면천상의 두 눈에 당위혼의 표정이 확대되어 비추어졌다.
그렇게 보인 상대의 표정은 평온 그 자체.
자연체의 상태로 가만 서 있던 그는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무언가 잘못됐다.
그 사실을 직감한 무면천상은 서둘러 뒤로 빠지려고 했다.
확실히 치명타를 입히기 위해 정면에서 달려들었으나, 그의 오감이 소리치는 위기 상황은 그에게 회피를 부르짖었다.
‘무, 물러나야……!’
일단 혈강시들을 먼저 보내 상황을 살펴야 했다.
아니, 그들을 제물로 바쳐 어서 이 자리를 빠져나가야 했다.
그 사실에 몸을 뒤로 내빼려는 그 순간,
“…확실히.”
당위혼의 입술이 달싹였다.
“끝을 볼 때가 왔군요.”
그 순간이었다.
“아…….”
시야를 뒤덮는 꽃비가 흩날렸다.
상대를 중심으로 피어난 꽃은 삽시간에 만개해 온 하늘에 피어올랐고, 그것은 곧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화려하고 아리따운 꽃비처럼 가지각색의 그것들은, 전후좌우 자신을 덮쳐오는 혈강시와 허겁지겁 뒤로 물러나려던 무면천상을 공평하게 뒤덮었다.
‘늦었…….’
그의 의식은 거기까지였으니, 깜짝 놀라 달려오려던 정천맹의 무인들도, 이미 계획된 대로 그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달려들던 사패천의 무인들도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스스스…….
흩날린 꽃비가 내려앉으며 소란은 잦아들었으니, 다섯이 있던 만화평에는 오로지 하나만이 서 있었다.
“오…….”
“오오오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무인들은 전율하기 시작했으니,
“당위혼! 당위혼! 당위혼!!”
“독천! 독천! 독천!”
당대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 *
짝짝짝.
“어흐흑, 어흐흑…….”
“…왜 그러십니까, 대형.”
“내가 울지 않을 수 있겠냐. 우리 가주님께서 천하제일인에 등극하셨다는데.”
“…형님께서 그러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내가 왜?”
“형님께서 진정 천하제일인이시잖습니까.”
“아니야. 난 천상천하제일인이야.”
“…….”
표정이 왜 이러지?
난 진심인데?
“…아무튼, 감사합니다. 대형께서 계시기에 제가 이 자리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흠, 그건 격히 동감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 은혜는 내가 아니라 무당에 갚아라.”
“그 역시 잊지 않았습니다. 태청신단, 그 신단이 아니었다면… 전 다시 무공을 익히지 못했을 테니까요.”
태청신단.
원래 마교랑 마지막 일전을 치르러 가기 전 검천에게 받았던 그 단환은, 어쩌다 보니 천마랑 결착을 낼 때까지도 고이 숙성시켜 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으니 집에 돌아간 김에 위혼이한테 던져줬다.
‘여별의 목숨이라더니, 틀린 말은 결코 아니었지.’
무인에게 있어 무공이란 목숨과 같으니, 독인지경의 대가로 모든 내공을 잃고 폐인이 되어야 했던 위혼이는 태청신단을 복용하고 다시금 무공을 익힐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태청신단은 녀석의 신체를 최고의 상태로 만들어 줬으니, 고작 십 년 만에 사패천의 최고수들과 동수를 이루어 냈고 이십 년이 지난 지금은 그들 전부를 제압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그래그래. 소림사 땡중들이랑 무당파 말코들 좀 챙겨줘. 그래도 나랑 나름 인연이 깊던 친구들이니까.”
“인연이라…….”
그 말에 녀석은 우묵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별달리 말은 하지 않았다.
“묻지 않을 거냐?”
“무엇을 말입니까?”
“내 정체 말이다. 이십 년 전에도 이미 봉문한 지 삼십 년을 넘은 이들과 내가 어떻게 연이 있는지, 그 이십 년 전에 나란 놈은 어디서 떨어졌는지. 그런 것 등등 말이다.”
이젠 물어볼 만도 하건만, 여전히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을 굳이 따지지 않는 가주 동생 녀석을 향해 묻자, 당대의 천하제일인께선 언제나와 같이 여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제게 중요한 것은, 형님께서 본가의 대형이며, 개인적으론 저의 형님이란 것일진대.”
“…짜식, 괜히 사람 감동시키고 그러냐.”
이십 년이 흘렀음에도 변함없는 녀석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자, 받아라.”
그리고, 품에서 서책 하나를 꺼내 던져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내가 근래 계속 외유를 반복했지 않느냐.”
“이십 년 동안 말입니까?”
“…그래, 근래라고 하긴 좀 그렇구나.”
여하튼.
“그동안은 좀 바빠서 못했던 일이지만, 이제 얼추 일이 끝났기에 원래 계획했던 대로 책이나 한번 쓰려 하느니라.”
그것은 그 초고(草稿)고.
“거기 내 이야기가 다 적혀 있으니, 심심하고 할 거 없으면 읽어 보거라.”
“꼭 챙겨보겠습니다.”
“뭐, 꼭 챙겨볼 필요는 없고. 웃차.”
“어딜 가십니까?”
“응, 아직 일이 덜 끝나서. 옛날에 알던 원수 놈이 있는데, 그 후손을 챙겨주려 하니 너무 멀리까지 가버려서 말이다. 이래저래 일이 많구나.”
“원수의… 후손을… 챙겨준단 말입니까?”
“뭐, 어쩌다 보니 그리됐다.”
세상이 요지경이란 말이 괜히 나왔겠니.
웃차.
그럼, 진짜 가볼까?
“나 간다. 찾지 말거라.”
“알겠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찾아주라.”
너무 안 찾아주면, 나 조금 섭섭하다고?
* * *
덜컹―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형님은 떠나갔다.
“…….”
그와 함께 찾아온 침묵.
정천맹의 맹주를 위한 맹주전이 얼마나 넓고 공허한지를 알려다 주는 침묵에, 그 침묵마저 씻겨 내리던 형님의 존재감을 새삼스레 체감했다.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고 나서, 당위혼은 부쩍 외로움이 늘어났다.
가주 자리를 지켰던 것이야 어릴 적부터 계속된 일이지만, 그의 어린 대형이 이십 년 전부터 다 해결했다는 듯 말하고는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아지고 난 뒤로 그 체감이 더더욱 커졌다.
그래서였다.
당유혼이 외유가 잦아져도 싫은 소리 한마디하지 않게 된 것은.
‘이 고독을, 형님께선 지금껏 견뎌오셨을 테니까.’
이제 그 편린이나마 알게 된 당위혼이기에, 더더욱 당유혼에게 어느 하나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부디, 이제부터라도 인생을 즐겼으면 하니까.
“그럼.”
드르륵―
자리에서 일어선 당위혼은 창가로 다가가 닫힌 문을 열어젖혔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적셨다.
봄바람이었다.
꽃비가 만연할 봄이 찾아왔으니, 이젠 또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할 시기였다.
“부디, 이제부터라도 형님께 봄이 찾아오셨으면 합니다.”
바람처럼 찾아와 바람처럼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당위혼은 남은 업무를 다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그때,
펄럭―
문득 불어온 봄바람이 그의 책상 위에 있던 서책의 표지를 열어젖히며 그 제목을 보였다.
『당가유혼(唐家流魂)』.
“하하…….”
참으로,
“형님다우신, 제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