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화 우연한 나들이는 우연한 기연을 만나고
그는 고서적을 파는 목운서점이 있는 길로 발길을 돌렸다.
고서적 거리는 성도 내에 있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늘 뜸했다.
오래된 목조 건물과 고목이 줄지어 늘어선 고서적 거리의 주변 풍경이 오늘따라 유난히 고즈넉했다.
심지어 퇴락해 보이기조차 했다.
하지만 청운은 이 길을 걸을 때마다 왠지 마음이 차분해져서 성도에 나올 때마다 이곳에 들렀다.
특히 올봄에 우연히 들른 목운서점의 분위기를 좋아해서 자주 갔다.
목운서점의 외관은 곧 허물어질 것처럼 낡고 허름했으나 내부는 고색창연하면서도 기품이 있었다.
청운은 목운서점의 높다란 층고와 천장까지 가득 들어찬 책장과 책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고서 특유의 냄새를 특히 좋아했다.
별로 말이 많지 않으면서도 고서에 대해 나름 해박한 지식과 식견을 가진 서점주인 황 노인도 좋아했다.
젊은 시절 황궁의 하급관리로 황궁의 도서를 관리하는 사서로 일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하지만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청운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궁금해 하지도 알아보지도 않았다.
알 필요도 없었다.
다만 청운은 자신이 좋아하는 수많은 책과 그 책들을 언제나 접할 수 있는 서점과 자신의 책에 대한 기호를 이해해 주는 황 노인이 마냥 좋았다.
처음 우연히 들른 목운서점의 분위기가 자신의 취향에 딱 맞아 청운은 비번 날 성도에 나올 때마다 그곳에 들렀다.
그러다가 서점주인인 황 노인의 책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완전 단골이 되고 말았다.
자신의 관심과 흥미를 끄는 책이 있으면 청운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
차츰 시간이 흘러 청운과 황 노인이 허물없이 친해졌을 무렵부터는 청운이 서점에 들를 때가 되어간다 싶을 때쯤.
황 노인은 청운의 취향에 맞는 책들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가 청운이 오면 한 보따리씩 펼쳐 보여주곤 했다.
그것은 청운이 황 노인의 고서적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인정한 것처럼 황 노인도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깊은 학식을 갖춘 청운의 박식함을 인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 * *
늦가을의 스산한 꼬리가 황량한 초겨울의 입으로 가뭇없이 빨려들고 있었다.
청운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늦가을이 속절없이 부서지는 낙엽 소리를 들었다.
세찬 바람이 불 때마다 구석에서 구석으로 내몰리는 낙엽들이 와그르르, 와그르르 온몸으로 자신을 울며 가없이 가는 세월을 하소연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흐흐흐, 여기서 또 만나는군. 아까 제대로 받지 못한 대가를 지금 몇 배로 받아내야겠어. 이 샌님, 오늘 재수 옴 붙었다고 생각해라. 감히 독아방에 대들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겁대가리 없는 놈.”
청운의 길을 가로막은 적의검사 셋 중 가장 앞에 선 얼굴에 칼자국 흉터가 있는 사내가 음산한 흉광을 발하며 이죽거렸다.
“대체 내가 당신들한테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러시오. 잘못을 한 건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들이오.”
청운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되받아쳤다.
“간이 아주 배 밖에 나왔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살려줄까 말까한데 꼬박꼬박 말대꾸까지 한단 말이지.”
자신이 내뱉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칼자국 사내가 사나운 발길질로 청운의 배를 냅다 걷어찼다.
퍼억.
무방비 상태로 험악한 사내의 일격을 복부에 가격당한 청운은 배를 움켜쥔 채 맞은편 담벼락에 처박히고 말았다.
“맛이 어때, 이 애송이 놈. 천천히 그리고 최고로 고통스럽게 오늘 네 놈을 자근자근 짓밟아주마.”
사내는 담벼락에 나동그라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청운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주먹과 발길로 사정없이 청운의 얼굴과 전신을 때렸다.
“나를 죽이려면 확실히 죽여야 할 것이다. 내가 만약 오늘 죽지 않는다면 이 빚은 반드시 이자까지 다 더해서 받아낼 테니까.”
청운은 사내에게 맞는 와중에도 신음 하나 흘리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또박또박 다 했다.
“아직도 기가 살아 있단 말이지. 네 말 대로 오늘 완전히 끝장을 내주마.”
사내는 청운이 무슨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듯, 두 발로 마구 짓밟았다.
일방적으로 너무 많이 맞은 청운은 거의 의식을 놓칠 지경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나쁜 놈들은 꼭 뒤끝이 이렇단 말이야. 그냥 보내주면 얌전히 돌아가 자숙할 것이지. 무공도 모르는 선량한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놔.”
남궁영봉이었다.
남궁영봉은 벼락같이 사내들에게 달려들며 일장을 날렸다.
퍼—퍼—엉, 퍽, 팍.
그녀의 장력에 맞은 사내들은 추풍낙엽처럼 담벼락에 피를 흘리며 처박혔다.
남궁영봉은 쓰러진 독아방 놈들을 내버려둔 체 청운의 등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조그마한 약병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녀는 약병에서 두 알의 금색 환약을 꺼내 청운에게 먹인 후 등에 장심을 대고 진기를 주입했다.
* * *
잠시 후, 쿨럭 거리며 한 모금 피를 토해 낸 청운이 서서히 정신을 차리며 일어섰다.
“강 공자, 괜찮으십니까.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녀는 한없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청운을 빤히 바라봤다.
“또 구명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낭자, 이 빚을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 제가 죽지 않는 한 잊지 않겠습니다.”
청운은 진심으로 그녀에게 예를 갖췄다.
“별 말씀을요. 제가 한 일은 단지 나쁜 놈들을 혼내 준 것밖에 없습니다. 괘념치 마시지요.”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한쪽 구석에 쓰러져 있던 사내들이 입가의 피를 닦으며 주섬주섬 일어나 반대쪽으로 슬금슬금 도주하기 시작했다.
“네년이 세가의 힘을 믿고 언제까지 설치나 보자. 이 빚은 꼭 이자를 쳐서 갚아주마.”
골목이 굽어지는 모퉁이에서 그들 중 하나가 달아나면서 분기에 찬 소리를 질렀다.
“시간이 허락하면 제 아버지 회갑에서 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공자님은 골격도 괜찮은 것 같은데, 무공에 관심을 가져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강호는 공자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흉악한 곳입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최소한 자기 몸을 지킬 정도의 무공이라도 익혀야 이런 낭패를 당하지 않지요. 제 말을 허투루 여기지 말기를 바랍니다.”
남궁영봉은 청운에게 잠시 예를 취한 후 사내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신형을 날렸다.
* * *
청운은 그곳에서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목운서점을 향해 제 갈 길을 갔다.
청운이 서점에 당도했을 때쯤, 남궁영봉이 청운에게 무슨 약을 먹였는지, 얼굴의 부은 느낌을 제외하고는 그놈들에게 얻어맞기 전보다 몸이 훨씬 더 가뿐함을 느꼈다.
그가 서점에 들어서자 계산대에 앉아서 졸고 있던 황 노인이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강 공자, 조금만 기다리시게. 내 금방 차를 내올 테니.”
“매번 차는 무슨, 저는 괜찮습니다.”
청운은 포권을 취하며 진심으로 사양했다.
“이번 차는 멀리 운남의 고원에서 온 귀한 것이네. 사양 마시게. 그렇게 사양하면 내가 섭섭하지.”
황 노인이 환하게 웃으며 지지 않고 청운의 말을 되받았다.
“차가 참 은은하고 향기가 좋네요. 그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차를 한 모금 깊게 음미한 청운이 황 노인에게 말을 건넸다.
“나야 늘 잘 지냈지. 여름에 보고 처음이니까, 한 서너 달 됐지.”
“그렇죠.”
“참, 내가 과거에 개봉의 서점에서 일할 때 같이 일했던 동료 하나가 요령 지방을 지나다가 깊은 산 속 어떤 폐 장원에서 껍데기도 없는 고서 몇 권과 낡은 옥함 하나를 주워서는 혹시나 하고 나한테 가져왔다데.”
“오, 그렇군요.”
“나도 제법 박식하다는 소리를 듣고 살았지만, 그 고서에 쓰인 글자가 도무지 그림인지 문자인지 조차 알 수가 없네. 자네가 한 번 살펴보게. 바로 이것들이네.”
황 노인은 탁자 위에 있던 검은 보자기를 풀어헤쳤다.
보자기 속에는 네 권의 고서와 귀퉁이가 다 닳은 손바닥 크기의 낡은 목함 그리고 목함 속의 푸른 녹이 슬대로 슨 한 쌍의 환이 있었다.
청운은 맨 위의 책을 들어 살펴보았다.
문자는 글자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문자인지 당장은 전혀 해독이 불가했다.
책을 도로 내려놓고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낡은 옥함을 열어 보았다.
청운은 그 안에서 환을 하나 발견하고는, 꺼내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푸른 녹이 세월의 이끼처럼 켜켜이 슬어 있어서 환을 만든 재질조차 확실히 알 수 없었다.
환을 들어 불빛에 가까이 비춰 보자 성좌와 성운의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진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청운은 환을 다시 옥함에 넣고는 황 노인을 바라봤다.
“저도 이게 어느 나라 문자인지 잘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한자 이전의 어떤 문자 같은데, 알아보려면 고대의 어느 시기, 어느 나라 문자인지 일일이 대조해 봐야 할 것 같군요.”
“그렇지. 다행히 나에게 고대 문자와 관련된 서적도 몇 권 있다네. 이건 자네 아니면 여기 하남 땅에서 아무도 해독을 못 하네. 이제부터 이건 자네 것이네.”
“…….”
“구워 먹던 삶아 먹던 자네 맘대로 하게. 나는 이제 나이가 들어 골치 아픈 건 딱 질색이네.”
황 노인은 마치 밀린 숙제를 해결했다는 듯 청운에게 그것들을 떠넘기듯이 건넸다.
* * *
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청운은 세안을 마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청운은 곧바로 책장에서 고대 문자를 기록한 책들을 전부 꺼내 놓고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 책자들에서도 쉽게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그 문자들은 본격적으로 한자가 사용되기 전의 상형문자와 한자의 중간쯤 시기에 쓰인 상나라 이전의 고대 문자 같았다.
청운은 황 노인에게서 얻어 온 용정차를 몇 모금 마시다가 보름달이 뜬 창가로 다가가서 한쪽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고서로 골머리를 앓던 청운의 어지러운 머릿속을 늦가을 밤의 찬 공기가 헹궈 주는 것 같았다.
어디로 가는지 모를 기러기 떼들이 달을 가로지르며 남으로, 남으로 줄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청운은 처음부터 다시 곰곰이 고서의 문자들을 생각해 보았다.
고대의 상형문자와 초기의 한자를 토대로 유추하면 어쩌면 해독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날로부터 청운은 표국 일을 끝내면 곧바로 고대 문자를 해독하는 일에 매진했다.
처음부터 쉽지 않을 일이라 여겼지만 고서의 해독은 생각보다 더 힘들고 지난한 일이었다.
가끔은 그 고서들을 괜히 황 노인으로부터 받아왔다고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학문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한 청운은 책이 난해할수록 오히려 더 집착하는 경향이 강했다.
만약 황 노인이 그에게 그 고서들을 주지 않고 다른 누군가에게 팔아버렸다면 청운은 황 노인에게 섭섭함을 넘어 오히려 서운함을 느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