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6화 (6/184)

006화 자네의 몸속에 잠재된 기운은 그런 것이 아닐세.

남궁세가는 멀리서 보아도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겹겹이 늘어선 건물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달랐고 웅장하면서도 장중했다.

하늘 높이 치솟은 솟을대문이 오 장은 족히 넘을 것 같았다.

정문에서 거의 반 마장 앞에 세워진 거대한 하마비가 세가의 성세를 상징하는 신물 같았다.

청운 일행이 말에서 내려 정문 앞에 다다르자, 번잡한 상황을 정리하는 세가 무사들의 외침 소리가 사방에 쩡쩡 울렸다.

“그렇게 함부로 밀고 들어오면 안 됩니다. 자, 자, 도착한 순서대로 줄을 서시오. 줄을…….”

청의와 백의의 무사 수십 명이 형형한 안광을 번득이며 세가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통제했다.

그들은 들어갈 순서를 정해 주고 있었다.

오동나무를 통째로 잘라 만든 두 개의 커다란 탁자가 좌우에 놓여 있는 대문 양쪽.

그곳엔 아직 사시가 채 되지 않았는데도 세가로 밀고 들어가려는 긴 줄이 수십 장이나 늘어서 있었다.

탁자를 따라 장승처럼 도열한 무사들은 하객들이 내미는 초청장을 세가에서 작성한 명부와 일일이 대조하며, 하객들이 갖고 온 선물의 품목을 장부에 쉴 새 없이 기입하고 있었다.

청운이 남궁영봉이 준 초청장을 내밀자 갑자기 공손해진 백의의 무사가 자기 옆에 선 청의를 입은 무사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둘째 아가씨의 초청장이다. 즉시 아가씨에게 고하고 손님을 본청으로 안내하라.”

백의인의 말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청의의 무사가 청운과 허 총표두에게 자신을 따라오라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중원 곳곳의 이름깨나 있는 문파와 거래처에서 보내온 비단 깃발들이 대문과 본청으로 이어지는 길 양쪽에 끝없이 늘어섰다.

바람이 불 때마다 깃발에 쓰인 글자들이 금방이라도 활개를 치며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았다.

청운 일행이 거의 본청 계단참 아래에 다다랐을 무렵.

화려한 녹의의 궁장을 차려입은 대단한 미인이 청운을 향해 곧장 걸어왔다.

갓 스무 살이 됨직한 그 여인은 다가올수록 더 우아하고 예뻐 보였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공자님, 정말 와 주셨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그 녹의 미인이 그윽한 눈빛으로 청운에게 알은체를 했다.

청운은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여인이 자신에게 인사를 하자, 당황스럽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했다.

청운은 계면쩍고 멋쩍은 미소를 지은 채 공손하게 물었다.

“아가씨, 저를 만난 적이 있으신지요. 제가 둔하고 기억력이 나빠서 어디서 뵈었는지를 영…….”

청운은 말끝을 흐리며 난처한 표정으로 녹의의 미녀를 쳐다봤다.

“공자님도 참. 저 남궁영봉이에요. 정말로 모르시겠어요.”

녹의의 미녀가 손으로 반쯤 입을 가리고는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청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제야 청운은 그녀를 간신히 알아보았다.

전에 무복을 입고 있던 여인이 눈앞에 있는 이 미인과 동일인이라니.

청운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때와 너무 다른 모습이라 제가 잘 못 알아봤습니다. 실례를 용서하시지요. 낭자.”

청운은 최대한 공손히 남궁영봉에게 예를 갖추며 목례를 했다.

“그새 제가 그리 많이 변했나요. 머리 모양과 옷을 좀 바꿔 입었을 뿐인데. 자 저를 따라오시지요. 공자님 자리는 제가 따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남궁영봉은 청운의 그런 당황함을 즐기듯 한 번 더 청운을 향해 묘하게 웃었다.

그리고 왼손으로 치맛자락을 살포시 들고서 계단참을 사뿐사뿐 올라갔다.

연회장은 거의 삼백 칸이 넘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그곳엔 화려한 비단으로 둘러싼 수백 개의 탁자가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각각의 탁자에는 도성의 어느 주루와 비교해도 절대로 뒤지지 않는 진귀한 요리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사람들이 탁자와 탁자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서로 인사를 나누느라 연회장은 거의 저잣거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본청의 연회장은 사람들이 중구난방 떠드는 소리와 왁자한 웅성거림으로 소란스럽기가 이를 데 없었다.

본청만 이 정도 규모인데 별채와 다른 전각들에 모인 사람들을 합하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잔치판인지 청운은 도저히 짐작도 되지 않았다.

청운이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연회장을 둘러보고 있을 때.

낭궁영봉이 청운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청운에게 말을 건넸다.

“강 공자님께 제 오빠들을 소개해 드릴게요. 저를 따라오시지요. 이쪽입니다.”

남궁영봉이 허 총표두에게 가볍게 예를 표한 후 청운만을 데리고 앞장섰다.

그녀가 곧장 연단 뒤쪽의 벽으로 가더니 눈높이 정도의 높이에 달린 고리 하나를 살짝 잡아당기자 회랑이 나타났다.

삼 장 정도 되는 회랑의 끝에 아담한 전각이 한 채 자리하고 있었다.

전각 앞에 도착하자마자 그녀가 문을 두어 번 두드리며 말했다.

“오라버니, 저, 영봉이에요.”

문 안에서 들어오라는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문을 열고 방안에 들어서자 청운의 눈에 삼남 일녀가 원탁에 앉아 차를 마시고 모습이 들어왔다.

청운이 방에 들어서자 모두가 일어나 합창하듯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시게, 강 공자.”

“어서 오세요. 강 서기님.”

그녀가 고개를 돌려 청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 오라버니와 언니입니다. 인사하세요. 이쪽부터 큰 오빠, 작은오빠, 셋째 오빠 그리고 언니에요.”

남궁영봉은 자기 가족들에게 마치 청운을 잘 봐달라는 듯이 애살스럽게 굴며 청운을 소개했다.

장자 남궁혁린은 삼십 대 중반으로 서글서글한 미남형으로 근골이 탄탄했다.

둘째 남궁혁휘는 형에 비해 다소 강퍅한 인상의 삼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셋째 남궁혁호는 둘과 별로 닮지 않은 사각형의 얼굴로 심지가 굳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리고 남궁영봉의 언니 남궁영영은 발랄하고 당돌한 동생과 달리 정숙하고 차분한 인상이었다.

그녀는 남궁영봉과 분위기는 사뭇 달랐지만 남궁영봉에 못지않은 미인이었다.

남궁혁린이 청운에게 앉으라고 자리를 권했다.

청운이 공손하게 포권을 취한 후 다소 어색해하며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남궁영영이 차를 따라주었다.

청운이 천천히 차를 마시는 동안, 세가의 형제들은 번갈아 가며 청운에게 이것저것 캐물었다.

청운의 신색을 찬찬히 살펴보던 남궁혁린이 의아해하는 눈빛으로 청운에게 말을 걸었다.

“깊고 좋은 눈빛을 갖고 있구먼. 영봉에게 듣기로는 무공을 전혀 모른다던데 언제 무공을 익혔나. 아주 중후하면서도 맑은 기운이 자네의 몸에서 느껴지네.”

“무공이랄 것도 없습니다. 몇 달 전부터 국주님의 무고에서 우연히 얻은 책자로 아주 기초적인 무예를 혼자 시간 나는 대로 연습하고 있습니다.”

청운이 남궁혁린의 질문에 겸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닐세. 자네의 몸속에 잠재된 기운은 그런 것이 아닐세. 아직 온전히 발현되지 않아서 그렇지, 발현되기만 하면 단번에 보기 드문 고수가 될 것 같네. 혹시 어떤 내공을 익힌 적이 없는가.”

남궁혁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했다.

“어릴 적부터 아버님이 산에서 캐어 오신 좋은 약초는 많이 먹었습니다만 특별히 내공을 닦는 적은 없습니다.”

청운은 자신도 이유를 모르겠다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 큰오빠의 무공에 대한 호기심은 아무도 못 말린다니까. 초면의 인사 자리에서 별걸 다 캐묻고 난리네.”

“…….”

“자, 자, 인사를 끝냈으니 이제 마시고 즐겨야지요. 공자, 저를 따라오세요. 이제 같이 온 일행에게 갑시다.”

그녀가 난감한 상황을 단번에 정리했다.

그녀의 상황판단과 순발력은 아주 뛰어났다.

덕분에 청운은 불편한 자리를 벗어나 편하게 총표두에게 되돌아갈 수 있었다.

* * *

연회장으로 돌아온 청운은 조금 전 남궁혁린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았다.

자신의 몸속에 엄청난 기운이 잠재되어 있다는 그의 말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전혀 내공을 수련한 적이 없었다.

수련을 하고 싶어도 자신이 알고 있는 내공심법이 없었다.

한참을 생각하다 혹시 하는 생각이 번득 뇌리를 스쳤다.

‘설마 그 치우천결이 상승의 내공심법이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그 구결을 운용할 때마다 몸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팔목에 찼던 환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 생각을 하자 급박하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청운은 느꼈다.

청운이 그런 생각으로 잠시 상념에 빠져 있을 때 남궁영봉이 청운에게 말을 건넸다.

“공자님, 이것 좀 드시지요. 용봉탕과 불도장입니다. 속을 다스리는 데는 그만입니다. 그리고 이건 특별히 주문한 삼십 년 된 소홍주입니다.”

영봉은 시비를 시키지 않고 매번 청운의 식탁으로 자신이 직접 음식을 나르며 청운에게 살갑게 대했다.

남궁영봉의 지극한 대접에 청운은 민망하고 어색했다.

그래서 그녀의 지나친 호의를 극구 사양했지만 남궁영봉은 개의치 않고 수시로 그의 탁자로 진미를 들고 왔다.

영봉이 다정하게 청운을 대하는 모습을 사내 무리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그들은 청운과 대각선으로 몇 탁자 떨어진 탁자에서 떠들썩하게 대화를 주고받던 사내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청운의 탁자로 다가왔다.

그리고 청운에게 포권을 취하며 말을 걸었다.

“우리 연배도 비슷한데 통성명이나 합시다. 저는 모용가의 둘째 모용후입니다. 공자는 어느 문파 출신이신지요.”

“아, 예 저는 하남표국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강청운입니다.”

청운도 그에게 공손하게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본청 연회장은 명문정파와 세가의 사람들만 초청된 걸로 아는데 어떻게 표국 사람이 여기에 있을 수 있지요.”

모용후는 청운에게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인상을 구겼다.

바로 그때 남궁영봉이 발끈하고 나섰다.

“강 공자님은 제 손님이에요. 내가 초청했어요. 우리 집 잔치에 내가 초청했는데 뭐가 문제이지요.”

남궁영봉은 모용후를 향해 쏘아붙이듯 말했다.

남궁영봉의 도발에 무안을 당한 모용후는 얼굴이 벌게져서 많이 드시오, 라는 말을 남긴 후 서둘러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후에도 모용후는 청운의 탁자를 계속 주시하며 날 선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남궁영봉이 또다시 음식을 가지러 갔을 때 허 총표두가 귓속말로 청운에게 말했다.

“강 서기, 모용후가 남궁영봉 낭자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네. 영봉 낭자가 강 서기에 잘 대해 주니까 질투심이 끓어오르는 모양이네. 아무래도 조심하는 것이 좋겠네.”

“그렇습니까?”

“그렇네. 모용후는 후기지수 중에서도 제법 알아주는 고수네. 그리고 속이 좁고 성정이 독해서 한 번 원한을 가진 자에게는 아주 모질게 한다는 소문이 있네.”

“걱정 마십시오. 설마 이곳에서 무슨 시비를 걸겠습니까. 이 맛있는 음식이나 드시지요. 저는 남의 시선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저는 제 삶 하나만으로도 두 어깨가 너무 무겁습니다.”

청운은 허 총표두를 빙긋이 웃으며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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