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화 그것만 각성하면 이런 수모는 당하지 않을 것이오.
“미천한 저의 회갑에 이렇게 많은 강호의 명숙들께서 찾아주셔서 몸들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접이 소홀하더라도 부디 많이 드시고 즐겁게 놀다 가십시오. 조금이라도 부족한 게 있으면 서슴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남궁가주 남궁일천의 일장 연설이 끝나자, 청운과 허 총표두는 배도 너무 부르고 술도 얼큰하게 취해서 가벼운 산책이라도 하려 했다.
그들은 연회장을 빠져나와 정자가 있는 연못 근처로 걸어갔다.
청운과 허 총표두가 연못가를 두리번거리며 서성거리자, 연못에 급작스럽게 물결이 일며 팔뚝만한 잉어들이 수초를 헤치며 연못가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부잣집 물고기는 크기와 때깔부터 달랐다.
강에 사는 물고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살찌고, 윤기가 좔좔 흐르는데도 무슨 허기가 지는지 사람의 기척만 나면 연못가로 몰려나왔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더 가지고 싶은 게 사람의 습성이듯 물고기도 마찬가지인가 하고 청운은 생각했다.
과식한 포만감과 따스한 오후의 햇살로 인해 한껏 나른함에 빠져 있을 때.
청운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모용후였다.
“안휘현의 천재가 여기 계셨구먼. 강 서기님, 이렇게 또 마주치네, 모르는 글이 없다더니 연못을 보며 시상이나 떠올리나 보지요. 나 같은 무지렁이야 책이라면 딱 질색이지. 남자는 자고로 누가 뭐라 해도 힘이지 힘.”
“…….”
“강 서기도 허리에 검을 찬 걸 보니 무공에 관심이 있나 보네요. 나하고 딱 일합만 섞어 봅시다. 내가 진짜 무공이 뭔지 한 수 가르쳐 주겠소. 나는 당신 같은 먹물들을 보면 영 밥맛이거든.”
다짜고짜 시비였다.
그의 비아냥거림과 비꼬는 말투가 안 그래도 과식으로 거북했던 청운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이런 모욕을 당하고도 참아야 하는가.’
청운은 분개했지만 남의 잔치판에 초를 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모용후의 시비에 차분히 대응했다.
“과거에 몇 번이나 낙방한 저 같은 놈이 천재는 무슨 천재겠습니까. 당치도 않지요. 오히려 모용 공자야야 말로 무공의 천재라는 소문이 강호에 자자합니다.”
끓어오르는 성질을 억누르며 나름 최대한 예를 지키며 말하는 청운이었다.
“그리고 제가 허리에 찬 이 검은 제가 무공을 익혀서가 아니라 저희 국주께서 강호에서 무슨 일을 겪을지 모를 제가 걱정되어 하나 내어 주신 것입니다.”
“글밖에 모르는 서생에게는 검이 아니라 책을 줘야지. 능국주도 벌써 노망이 났나.”
모용후의 호위로 보이는 황의를 걸친, 왼쪽 턱에 깊은 칼자국이 있는 사내가 제 주인보다 더 심한 말로 청운을 모욕하며 모용후를 거들고 나섰다.
자신은 그렇다 치고 국주님까지 모욕하자 청운은 그런 말을 듣고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기어코 한마디하고 말았다.
“아니, 무슨 말을 그리 예의 없게 하시오. 이 자리에 없는 국주님을 왜 험담합니까. 욕을 하려면 나에게 하시오, 그리고 까놓고 말해 내가 당신들한테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시비를 거는지 모르겠소.”
청운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큰 소리를 지르며 대들었다.
“그 이유나 좀 들어봅시다. 내가 잘못했으면 당연히 사과하리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무례에 대해 사과를 받아야겠소.”
“흐흐, 좋지. 좋아. 내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지. 자격도 안 되는 놈이 본청의 연회장에 들어와 감히 남궁세가 둘째 낭자의 접대를 받은 것. 그것이 네놈의 죄다.”
모용후는 아니꼬운 눈빛을 발하며 청운을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두 눈에 흉광을 이글거렸다.
“자격이 되고 안 되고는 오늘의 주최자인 남궁세가가 정하는 것 아니요.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게 자격 운운하는 것이요.”
“뭐라?”
“남궁 낭자가 마음에 있으면 직접 그녀에게 고백하면 될 일. 왜 아무 잘못 없는 나를 걸고 행패요.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았소.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소.”
남궁영봉에게 여러 번에 걸친 구애에도 불구하고 거듭 거절당했던 모용후의 치부를 결국 청운이 건드리고 말았다.
사람들 앞에서 치부가 까발려진 모용후는 급기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두 사람의 말다툼 소리에 무슨 좋은 구경거리라도 발견한 듯 사람들이 속속 그들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많아지자 모용후의 호위무사는 필요 이상으로 허세를 부리며 청운을 겁박했다.
“감히 누구 안전에서 그따위 망발을 하느냐. 오늘 내가 네 놈을 그냥 두면 사람이 아니다.”
턱에 칼자국이 있는 사내가 욕지기를 내뱉음과 동시에 허리에서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만, 이미 엎질러진 일. 강호의 은원은 원래 힘으로 해결하는 것. 네놈이 내 일 장만 받아낸다면 오늘 일은 없던 일로 하겠다.”
“…….”
“그리고 네 놈이 무공을 모른다니, 나는 단지 네가 죽지 않을 정도의 이성의 공력만을 쓰겠다.”
모용후는 살의가 가득 담은 눈빛을 이글거리며 청운을 노려보았다.
어느새 가문의 독문절기인 분광장을 은연중에 끌어올리고 있었다.
“좋소, 나는 내가 무공을 모르니 대신 내가 가장 잘 아는 다른 것으로 상대하겠소. 잠시 붓과 종이를 꺼낼 시간을 주시오.”
청운은 모용후의 위협에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되받아친 후, 왼 소매에 오른손을 넣어 백지 몇 장과 붓을 꺼냈다.
“나는 무공을 모르니 내가 먼저 공격하겠소.”
청운이 종이를 하늘에 날림과 동시에 신속하게 허공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자 청운을 공격하려고 공력을 끌어올리던 모용후가 갑자기 놀라서 허둥거리며 엉뚱한 허공에 일 장을 쳐내다가 급기야 뒤로 벌렁 넘어져 연못에 빠지고 말았다.
청운과 모용후를 둘러싸고 구경하던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그때 구경꾼들 속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구륵환법!>
그렇다.
청운이 전개한 것은 어린 시절 성도의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어떤 고서에서 배운 환술을 전개한 것이다.
그것은 무공이라기보다는 눈속임에 가까운 마술 같은 것이다.
시술자가 종이에 글자를 쓰고, 주문을 외우면 흥분한 상대가 자신이 평소 가장 두려워했던 환각을 보는 것으로.
결국은 자기가 자신에게 속는 속임수로, 흥분하면 할수록 더 잘 속는 효과가 있는 사술이었다.
요즘에는 팔괘대들이 장터에서 사람들을 끌기 위해 그것과 비슷한 술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노~옴! 누구에게 그런 잡스러운 술법을… 오늘 내가 너를 징계하지 않으면 성을 갈겠다.”
온몸이 젖은 채 물에서 올라온 모용후가 분기탱천한 표정으로 자신의 분신인 단혼도를 빼들고 단칼에 청운을 쳐죽일 듯이 목을 찔러왔다.
모용후는 자신이 청운의 어쭙잖은 속임수에 속았다는 분노와 주변을 둘러싼 군웅들에게 자신의 체면이 구겨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분기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물불 가리지 않고 청운을 요절낼 듯이 달려들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온 푸른 섬광이 째~앵하는 파공음을 울리며 모용후의 도를 옆으로 쳐냈다.
그 일격에 모용후는 제법 충격을 받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비틀거렸다.
<청하지!>
누군가 소리쳤다.
그것은 남궁세가의 둑문지풍이었다.
“멈추시오! 오늘이 어떤 날인데 이곳에서 피를 보려고 하시오. 도대체 두 사람 간에 무슨 원한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오늘 이 신성한 자리에선 불가하오.”
“…….”
“당장 멈추시오. 지금부터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은 본 남궁가를 무시하는 행위로 간주하겠소.”
소리를 지른 사람은 다름 아닌 남궁가의 장자 남궁혁린이었다.
명불허전의 솜씨였다.
청하지 하나만 봐도 그의 무공 수위가 얼마나 높은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분노와 쪽팔림으로 얼굴이 붉어질 대로 붉어진 모용후는 황의 사내에게 가자! 라고 짧게 말하고는 먼저 남궁가를 빠져나갔다.
“천재라고 하더니, 과연.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술법을 펼칠 생각을 한 것이요. 담력도 보통이 아니고. 인재야 인재.”
남궁혁린은 말을 이어 갔다.
“영봉이 덜렁대고 허술한 것 같아도 사람 하나는 잘 보는구나. 강 공자, 내가 아까 말한 그 힘을 잘 생각해 보시오. 그것만 각성하면 이런 수모는 당하지 않을 것이오.”
남국혁린은 청운에게 의미심장한 웃음을 한 번 짓고는 등을 돌렸다.
남궁혁린이 떠나자 구경꾼들도 뿔뿔이 자리를 떴다.
* * *
무림맹이 있는 섬서까지는 거의 천 리가 훨씬 넘는 길이다.
물론 가는 길에 객점이 있으면 당연히 거기서 밥을 먹고 쉬어서 가겠지만 몇 개의 큰 산을 넘어야 하는 험한 길이기에 노숙할 경우도 대비해야 했다.
청운과 총표두는 저잣거리의 푸줏간과 잡화점에 들러 말린 육포와 몇 병의 술과 노숙에 필요한 물품도 몇 가지를 사서 말에 실었다.
하루를 멀다 하고 봄기운이 점점 완연해졌다.
이름 모를 울긋불긋한 꽃들이 지천에 가득 피었다.
들녘에는 농부와 아낙들이 논에 물을 대고 밭에서 김을 매느라 분주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청운은 또 부모님 생각에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봄이 되면 다른 계절보다 더 바쁘게 삶을 꾸렸다.
겨울보다 몇 시진은 더 일찍 일어나 부지런을 떨었다.
자신들의 삶이 어떻게 영위되는지도 모르고 깊이 잠든 자식들의 머리맡에 밥상을 차려 놓고는 산으로 들로 일을 나가셨다.
그리고 한두 시진이 지난 후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는 자식들이 먹고 남긴 밥상에서 급하게 한술 뜨셨다.
그리고는 다시 일터로 나가서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오셨다.
여태껏 이 나이가 되도록 부모님에게 받기만 하고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다는 생각에 청운은 갑자기 눈시울이 뿌예졌다.
이 팍팍한 세상을 실제로 떠받치는 것은 바로 지금 들녘에 나와 한 톨의 알곡이라도 더 얻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뼈 빠지게 노동하는 범부들의 노력이다.
저들의 피와 땀으로 생산한 곡식과 가축을 헐값으로 강탈해 자신의 배에 기름기를 채우는 부자와 권력자들은 평생 단 한 번이라도 저 범부들의 힘든 노동을 진심으로 고마워한 적이 있기나 할까.
남의 노동을 착취해 호위호식을 일삼는 자들은 자신들의 욕망이 좌절되거나 가로막히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 타인의 목숨을 담보로 전쟁도 불사한다.
어차피 그런 전쟁에 실제로 피 흘리고 죽는 사람은 평생 남의 노동으로 잘 먹고 잘 사는 자신들과 제 자식들이 아니고 지금 저렇게 뼛골 빠지게 일하고도 늘 가난한 저 범부들과 그 자식들이다.
잘못된 세상을 너무 오래 살아서 왜 세상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는 저 범부들의 안타까운 삶이 청운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저 범부들이 매일 저렇게 피땀을 흘리지 않는다면 세상은 금세 혼란에 빠지고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 있고 힘 있는 자들은 스스로 자족하기는커녕 자신의 권력을 더 누리고 부를 더 축적하기 위해 끝없는 탐욕과 간계를 부린다.
아! 이 세상은 그런 자들 때문에 얼마나 더 피폐해지고 잔인해져야 하는가.
왜 잘못된 세상에서 죽어나는 건 늘 저 착하고 선한 저 민초들이어야 하는가!
“강 서기,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시나. 하긴 생각에 잠긴 강 서기가 더 강 서기 답지. 나 같은 무지렁이야 원체 글과 생각을 싫어 하니 조금만 난해한 책을 봐도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네.”
“하하. 아닙니다.”
“그래도 나는 강 서기처럼 글을 많이 알고 생각이 깊은 사람을 존경하네. 내 아들도 이런 무림에 몸을 담지 않고 하급관리나 되어 우여곡절 없이 편하게 살기를 바라마지 않네.”
허 총표두는 부러워하는 눈빛을 담아 청운을 바라봤다.
“총표두님, 무슨 그런 민망한 말씀을. 저는 거듭 과거에 낙방해 관리도 아니고 뭣도 아닌데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오히려 제가 총표두님의 높은 경지의 무공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청운은 쑥스러운 듯 자신을 바라보는 허 총표두의 눈빛을 부담스러워하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허 총표두의 말을 받았다.
“허, 허, 그게 정말인가. 자네가 등용되지 못한 건 전혀 자네 탓이 아니네. 미쳐 날뛰는 세월이 잘못된 탓이지.”
“…….”
“그리고 나는 강호에서 고수 축에도 못 끼네. 그건 그렇고 이 산의 고갯마루에 객점이 하나 있네. 오늘 저녁은 거기서 해결하고 내일 아침 일찍 떠나세.”
허 총표두는 말을 마치자마자 자기 말에 박차를 가했다.
옥허산.
그리 이름 있는 명산은 아니지만 제법 산세가 웅장하고 곳곳에 봉우리가 높으며 계곡도 깊었다.
이제 이 산만 넘으면 힘든 길은 거의 다 온 셈이었다.
이 속도로 가면 그들은 예정보다 이틀 정도 빨리 무림맹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일정의 단축은 전적으로 표행 경험이 워낙 많아 세상의 길이란 길을 모두 훤히 꿰고 있는 허 총표두 덕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