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화 아무 의심 없이 자신들의 목적지를 바로 밝혔다.
옥허산 중턱쯤에 다다르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몇 식경도 채 지나지 않아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폭우로 바뀌었다.
아직 날이 완전히 저물지 않았지만 더 이상 계속 가기는 무리였다.
“강 서기, 이대로 길을 재촉하기엔 힘든 것 같네. 여기서 오 리 정도 가면 폐사당이 하나 있는데 오늘 밤은 거시서 푹 쉬고 내일 일찍 출발함세.”
허 총표두가 청운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예, 그게 좋겠습니다. 빨리 화톳불을 피우고 옷을 좀 말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말도 지쳤으니 콩죽도 좀 끓여야 합니다.”
청운은 즉시 대답했다.
곳곳에 빗물이 뚝뚝 듣는 폐사당 중앙에 화톳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각진 얼굴에 구레나룻이 제법 덥수룩한 중년의 사내와 갓 이십 대가 됨직한 젊은 사내가 흠뻑 젖은 옷가지를 벗어 화톳불 바로 위 서까래에 걸어두었다.
그리고는 술병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육포를 찢어먹고 있었다.
서로의 벗은 상체를 환히 비추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화톳불의 붉은 불빛 속에서 여독을 식히고 있는 두 사람은 바로 허 총표두와 청운이다.
“밤새 비가 그치지 않을 것 같네. 이렇게 많은 비가 오면 아무래도 땅이 너무 젖어 말의 걸음이 늦어져 이틀 안에 산을 넘기가 힘들 것 같네.”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다행히 식량을 넉넉히 준비한 덕에 산을 넘는 대는 별 무리가 없겠지만, 무공을 모르는 강 서기가 걱정이네.”
사십 대 중반의 사내가 짙은 검미를 꿈틀거리며 젊은 사내를 걱정하듯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허 총표두님, 그래도 제가 약초꾼의 아들 아닙니까. 어릴 때 하도 좋은 것을 많이 먹어서 이 정도는 끄떡없습니다. 제 걱정은 붙들어 매십시오.”
청운은 허 총표두에게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빙긋이 웃었다.
“허, 허,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보네. 좋아 그럼 일찍 자고 내일 비가 그치는 대로 바로 출발 하세.”
허 총표두는 육포와 술을 양껏 마신 포만감에 아예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가만, 누군가 이리로 오는 것 같네. 발자국 소리로 보아 모두 세 명인 것 같네. 이 빗줄기 속에서도 발걸음이 가벼운 걸 보니 상당한 고수인 것 같네.”
허 총표두는 말을 마치자마자 벌떡 일어나 대충 마른 옷을 서둘러 입었다.
청운도 팔을 뻗어 서까래에 걸린 옷을 끌어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끼이익!
낡은 사당 문이 귀곡성 같은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슬며시 열렸다.
흑의를 입고 죽립을 거의 턱까지 눌러쓴 사내 셋이 빗물을 뚝뚝 흘리며 사당 안으로 들어섰다.
왼쪽에 선 사내가 아무 감정도 섞이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객이 계셨구먼. 이거 실례지만 곁불을 조금 얻어 쬐어도 되겠습니까. 워낙 비를 많이 맞아서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구려.”
“그렇게 하시지요. 어려운 처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이 강호의 도리 아닙니까.”
허 총표두는 불 근처에서 슬며시 물러나며 그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청운도 가만히 불 곁에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사내들은 웃옷을 벗어 힘껏 물기를 짜낸 후 다시 걸쳤다.
그리고는 거의 동시에 불을 빙 둘러싸고 철퍼덕 앉아 불의 온기를 만끽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전히 깊이 눌러선 죽립은 벗지 않고 그대로였다.
죽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불꽃에 다을 때마다 쉬—익 쉬—익, 하는 소리가 어두운 사당에 울려 퍼졌다.
청운은 불가에서도 죽립을 벗지 않는 그들을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도 생각했다.
그렇게 서로 서먹한 시간이 한 식경 정도 흘렀다.
한 사내가 청운 일행에게 말을 걸었다.
“뭐 먹을 것 좀 없습니까. 우리가 저녁을 걸러서 허기가 지네요. 있으면 좀 적선하시지요.”
“여기 있습니다. 우리도 갈 길이 멀어 많이 드리진 못합니다.”
청운은 자신의 행낭을 풀어 육포와 술 한 병을 꺼내 방금 말을 한 사내에게 건넸다.
충분하지는 못해도 셋이 먹기엔 그리 부족하지 않을 양이었다.
“이리 고마울 때가 있나, 따뜻한 불에 육포와 술이라. 오늘 우리 형제가 횡재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디 먼 길을 가시는지요. 저희는 섬서로 갑니다만.”
한 사내가 툭 던지는 말투로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예, 우리도 섬서로 갑니다. 무림맹에 볼 일이 있어서요.”
아직 강호 경험이 태부족한 청운은 아무 의심 없이 자신들의 목적지를 바로 밝혔다.
순간 옆에서 듣고 있던 허 총표두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설핏 서렸다.
무림에서 자신의 행선지를 낯선 사람에게 함부로 발설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경험 많은 무림인들은 그런 질문에는 대충 에둘러 말하는 것이 강호의 상례였다.
청운이 너무 무림의 생리를 몰라서 작지만 중대한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무림맹. 무림맹이라! 당신들은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굳이 가는 것 때문에 오늘 여기서 죽는다.”
사내 중 하나가 으스스한 괴소를 흘리며 말했다.
“하긴 거기 가도 헛일이지만. 오늘 이렇게 적선을 하고 죽으니, 당신들은 아마 틀림없이 극락에 갈 것이오.”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허리춤에 찬 검을 뺌과 동시에 청운의 목을 찔러왔다.
검이 닿기도 전에 검풍이 청운의 목으로 쇄도했다.
“엎드려!”
소리친 허 총표두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신의 검집으로 사내의 검을 순간적으로 쳐냈다.
허 총표두는 역시 고수였다.
채엥! 채챙! 챙!
허 총표두와 사내가 몇 합을 겨루어도 승패가 갈리지 않자, 옆에서 관전하던 사내 둘도 자신의 검을 뽑아 들고 청운 일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청운은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태에서도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헛일이라니, 그게 무슨 의미지?”
“죽으면 알아도 아무 필요 없는데 그게 왜 궁금하지. 너희들은 오늘 여기서 반드시 죽는다는 것만 알면 된다.”
오른쪽의 사내가 청운 앞으로 한 발을 더 내디디며 검을 들어 올렸다.
“강 서기, 이곳은 내가 어쨌든 막을 테니까 지금 당장 뒷문으로 빠져나가 유사시에 우리가 만나기로 한 곳에서 만나세. 어서 빨리 뒷문으로.”
허 총표두가 청운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
“개꿈 꾸지 마라! 이미 이곳 주변에는 내 부하들이 포위하고 있다. 너희들은 오늘 반드시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한다.”
사내가 입가에 음침한 미소를 흘리며 비아냥거렸다.
사내는 곧바로 청운의 가슴을 향해 검을 찔러왔다.
청운은 엉겹결에 뒤로 나동그라지며 아슬아슬하게 사내의 일검을 피했다.
하지만 사내의 검기에 청운의 가슴 부위의 옷이 대각선으로 갈라졌다.
맨살이 드러난 청운의 가슴에는 한 줄기 가는 붉은 실선이 그어져 있었다.
실선을 따라 마치 새벽의 풀잎에 이슬이 맺히듯 청운의 맨가슴에 핏방울이 몽글몽글 맺히기 시작했다.
허 총표두는 청운이 위기에 빠진 것을 두 눈 뻔히 뜨고 보고도 청운을 도울 수가 없었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당장이라도 자신을 난도질할 것처럼 달려드는 흑의인의 공세를 방어하기에도 급급했다.
허 총표두는 청운을 흘깃거리며 가슴만 태울 뿐이었다.
나자빠진 청운을 향해 사내가 재차 검을 내리쳤다.
절체절명의 순간, 낡은 사당 문이 산산조각 박살나며 가슴에 ‘맹’이라는 큼직한 글자가 새겨진 청의를 입은 사내 둘이 청운 앞에 날아 내렸다.
“개소리는 저분들이 하는 게 아니라 너희들이 하고 있지. 이곳은 이미 무림맹의 관할지역이다. 맹의 허락 없이 그 누구도 여기서 살인을 할 수 없다.”
앞에 선 무림맹의 소속의 사내가 소리쳤다.
“밖에서 망을 보던 네놈의 부하들은 이미 우리가 제압했다.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어라.”
“이런 제기랄! 되는 게 없군. 다음에 보자.”
욕지기를 내뱉은 세 사내는 동시에 지붕으로 솟구쳐 올라 도망쳤다.
하지만 밖에도 무림맹의 무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는지 쏟아지는 빗소리와 함께 쇠된 칼부림 소리가 한참 동안 들려왔다.
잠시 후 가슴에 ‘맹’자가 수놓아진 백색의 두건을 쓴 사내 둘이 사당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실망에 가득 찬 목소리로 적의를 입은 사내에게 밖의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보고했다.
“지붕으로 튀어나온 셋은 그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어쩔 수 없지. 너희들의 무공 수위로는 그들을 완벽히 제압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사로잡은 놈들이 있으니 다행이다. 그들을 끌고 맹으로 가자. 취조를 하면 뭔가 나오겠지.”
적의를 입은 왼쪽의 사내가 아쉬운 표정을 내비치며 말했다.
“구명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희가 이리로 오는 줄 어떻게 아셨습니까?”
청운은 공손하게 포권을 취하며 맹의 무사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조금 전 말을 했던 적의의 장한이 즉시 청운 일행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까? 저희는 무림맹 외감찰당 소속 현무대원들입니다.”
“아, 그렇군요.”
“며칠 전 능국주님이 다급히 보낸 전서구를 받은 저희 당주님께서 혹여 무슨 불상사가 생길지 모르니 저희로 하여금 당신들을 찾아 호위하라고 하셨습니다.”
* * *
무림맹 감찰전의 외당 내의 객당.
청운 일행과 외당주 서일기는 제법 두툼한 서류를 앞에 두고 장시간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림맹 외당주 서일기는 사십대 중반의 강인해 보이는 인상을 갖고 있었다.
청운 일행과 서일기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거의 사무적 말투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야기의 주제가 상당히 무거운 듯 모두의 표정이 진지하고 딱딱했다.
외당주 매화절검 서일기는 비록 명문세가 출신은 아니었지만 어릴 적 무당의 속가제자로 들어가 탄탄한 무공의 기초를 익히고 쌓았다.
그는 매사에 끊고 맺는 것이 확실해서 외호에 ‘절검’이라는 말이 붙었다.
특히 그의 매화검법은 거의 십성 경지에 올라 검법을 전개할 때마다 무수한 매화꽃이 분분하고 코를 자극하는 짙은 향기까지 동반된다는 소문이 무림에 돌았다.
서일기가 말하고 있었다.
“나는 물론 최선을 다해 이번에 의뢰된 사건을 조사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추측이고 확실한 물증이 없는 이런 부실한 증거들로는 분명히 조사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 점을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제혼침이 나온 건 분명 큰 문제이긴 합니다만, 이런 물건은 워낙 은밀히 만들어지고 유통되다 보니 거의 추적이 불가능합니다.”
“음…….”
“그리고 대륙표국과 중원표국 그리고 사해표국 또한 맹의 회원으로서 매년 막대한 자금을 맹을 위해 지원하고 있습니다. 보나 마나 윗선에서는 대충 조사하는 흉내만 내고 끝내라 할 것입니다. 너무 큰 기대를 하시지 않는 게 좋습니다.”
서일기는 청운 일행에게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희도 그런 점은 충분히 감안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을 그냥 묵과하면 일이 점점 커져 결국엔 무림에 엄청난 소용돌이를 몰고 오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어쨌든 서 당주님께서 최선을 다해 주신다니 고맙습니다.”
허 총표두는 예의를 다하면서도 어느 정도 서일기를 압박하는 태도로 말했다.
무림맹에 가도 헛일이라는 흑의인의 말이 청운의 마음에 가시처럼 자꾸 걸렸다.
그자들의 그 말이 이런 사태를 두고 한 말인가, 하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이 한동안 난감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당주전의 문이 열리며 사당에서 자신들을 구해 주었던 적의의 사내가 들어왔다.
“당주님, 고문을 비롯한 온갖 수단을 동원해 취조해도 별 성과가 없습니다. 알고 보니 잡혀온 저들은 모두 돈을 받고 검을 파는 떠돌이 낭인들이었습니다.”
“…….”
“신분을 조사해 보니 모두가 사실이었습니다. 저들은 이번 사건에 단서가 될 만한 어떤 것도 아는 게 없었습니다.”
적의의 사내가 서일기에게 아무 성과도 가져오지 못한 자신을 무능을 책망하듯이 말했다.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 난감하군. 난감해. 하여튼 제가 최선을 다해 다시 조사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심려 마시고 표국으로 돌아가 계십시오. 좋은 소식이 있으면 제가 바로 전서구를 띄우겠습니다.”
서일기의 말은 예를 충분히 갖추었지만, 사실은 이제 그만하고 가라는 일종의 가벼운 축객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