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화 선앵을 보다.
어느새 청운의 눈앞에는 이곳에서 강제 노역을 하는 사람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족히 백여 명은 될 것 같았다.
청운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수석 순찰을 쏘아보며 물었다.
“이 사람들이 전부냐. 한 사람이라도 빠졌다면 뒷일은 네 놈이 책임져야 한다.”
“예, 전부입니다. 한 사람도 빠진 사람이 없습니다.”
수석 순찰은 다른 호위들과 눈빛을 주고받은 후 즉시 대답했다.
청운은 자기 앞에 선 사람들의 면면을 한차례 천천히 둘러보았다.
뒷줄 중간쯤에 영아의 친구 선앵이 보였다.
얼마나 노역이 심했는지 희미한 달빛에도 몰골이 말이 아니게 수척해 보였다.
하지만 알은체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이곳을 떠난 뒤에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뒤탈을 아예 방지해야 했다.
청운은 자신의 앞에 있는 모두에게 돈과 금을 골고루 나누어 준 후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에 있는 여러분은 지금부터 자유입니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셔도 됩니다. 뒷일은 모두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자, 머뭇거리지 말고 짐을 챙겨 떠나십시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이게 정말 사실인가!”
“진짜 가도 되는가.”
“뒤탈은 없을까.”
사람들은 웅성거리기만 할 뿐 누구 하나 선뜻 자리를 뜨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 누군가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불쑥 말했다.
“공자는 도대체 누구신지요.”
여기저기서 지금의 사태를 의심하는 소란스러움이 끊이지 않았다.
성질 급한 몇몇은 벌써 자신의 짐을 챙겨 천막에서 나오고 있었다.
청운은 다시 한 번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힘주어 말했다.
“뒷일은 걱정하지 마시고 속히 자신의 갈 길을 가세요. 그리고 아무리 급해도 다시는 급전을 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모두 떠나자 청운은 수석 순찰에게 반은 윽박지르고 반은 협박하듯이 말했다.
“지금 당장 독아방으로 가자. 그곳은 어디에 있느냐. 앞장서라.”
“방의 총단은 이곳에서 약 오십여 리 떨어진 화현산 계곡 초입에 있습니다. 하지만 협객님, 제가 협객님을 모시고 방에 가면 저는 죽은 목숨입니다. 살펴주십시오.”
수석 순찰은 청운에게 간청하듯 말했다.
“네 목숨은 내가 반드시 책임진다. 그건 걱정하지 마라. 당장 앞장서라.”
청운은 다시 한 번 단호하게 수석호위를 다그쳤다.
그리고 혹시나 이곳에 남은 놈들이 앞서 길을 떠난 사람을 해코지하지 못하도록 전부 혈을 짚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세 시진이 지나면 혈은 저절로 풀릴 것이다. 혹시라도 이곳에서 일한 사람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내 반드시 돌아와서가 징치할 것이다.”
“…….”
“그리고 당신들도 즉시 이곳을 떠나 새 삶을 찾아라. 비록 칼밥을 먹고 살 수밖에 없다고 해도 가능하면 남을 착취하거나 해하지 않는 일을 하며 살도록 하시오. 내 장담하는데 오늘 이후로 강호에 독아방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오.”
청운은 자신의 의지와 단호함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왼쪽에 있는 채석장의 절벽을 향해 거의 전력으로 <쾌—타—절> 세 초식을 연달아 펼쳤다.
모두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거의 수십 장에 달하던 절벽이 청운의 검에 마치 종잇장처럼 베어져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시작을 안 했으면 몰라도 했으면 반드시 끝장을 봐야 한다는 것이 일에 대한 청운의 철학이었다.
청운은 곧장 수석 순찰을 데리고 독아방으로 향했다.
독아방은 제법 규모가 그럴 듯했다.
대여섯 채의 전각이 보기에도 일반 장원의 크기를 훨씬 능가했다.
그리고 이곳으로 오는 동안 수석 순찰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독아방은 내당과 외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방의 총인원은 방주와 좌우 호법 그리고 총사를 포함해 이백이 조금 넘는다고 했다.
청운이 정문 앞에 당도하자 수석 순찰을 알아본 문지기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니, 이 야밤에 무슨 일이요. 뭐 급하게 보고할 일이라도…….”
“그게 아니라, 이분께서 방주님에게 볼일이 있다고 해서…….”
수석 순찰은 말을 얼버무리며 청운을 가리켰다.
청운이 불쑥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지금 즉시 귀 방주에게 보고해라. 광산 문제로 찾아온 손님이 있다고.”
“당신이 누군데 이 밤에 방주를 찾는 것이요. 내일 날이 밝거든 다시 오시오. 대낮에 와도 방주님께서 만나 줄까 말까 한데 어디 이 야밤에 무례하게 방주님을 찾는 것이오. 썩 꺼지시오. 경을 치기 전에.”
문지기는 아예 청운을 무시하며 손사래를 쳤다.
이래서는 시간만 끌 것 같았다.
청운은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작심하고는 자기 앞에 있는 문지기를 그대로 밀어버리고는 대문을 향해 일장을 날렸다.
우지끈.
꽈—쾅.
대문은 그대로 박살이 나 버렸다.
“대체 무슨 일이냐!”
야밤의 소란에 무기를 빼든 수십 명의 사내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그들을 본체만체한 청운은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너희들은 빠져라.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은 방주다.”
“이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나 보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행패를 부려 행패를…….”
말과 동시에 청운을 향해 서너 개의 검이 청운을 향해 날아들었다.
청운은 초장에 기선을 제압해야겠다는 생각에 거의 오성의 공력을 사용해 자신에게 달려들던 자들을 향해 몸을 회전시키며 일장을 날렸다.
으—악, 아—악.
퍼—버—퍽, 쿠—쿠—쿵.
청운의 일장에 함부로 달려들던 자들이 추풍낙엽처럼 피를 토하며 사방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때였다.
대기를 울리는 우렁찬 목소리가 정면의 전각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멈추어라. 대체 무슨 일이냐.”
모든 전각에 동시에 불이 환하게 켜졌다.
정면의 전각에서 제법 신분이 높아 보이는 세 사람이 장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가장 앞에 선, 가슴에 銀자가 새겨진 황의의 도포를 걸친 사십 대 중반의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흉광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청운을 노려보았다.
청운도 한 치의 물러남이 없이 사내를 마주 노려보며 짧고 단호하게 소리쳤다.
“방주를 만나러 왔소.”
“이놈이 실성을 했나. 여기가 어디라고 한밤중에 들이닥쳐 다짜고짜 방주님을 찾다니. 네 오늘 네 놈이 이승을 하직하게 도와주마.”
황의인 옆에 서 있던 관자놀이에 칼자국이 깊게 팬 흉터를 가진 흑의의 사내가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기며 곧바로 자신의 검으로 청운의 목을 찔러왔다.
자세히 보니 객점에서 청운에게 함부로 욕을 하고, <목운서점> 근처의 골목에서 청운에게 잔인하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대던 바로 그놈이었다.
그자를 보자 청운은 그날의 참담함이 떠올라 분노의 불길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인성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는 저런 놈은 틀림없이 또 다른 사람을 함부로 해코지할 것이 뻔했다.
저런 놈에겐 인정사정없이 따끔한 맛을 보여 줘야 한다는 작심을 하자마자 청운은 구무자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창안한 무위검의 쾌초식을 발출했다.
청운의 검에서 뻗어 나간 투명한 적색 검기가 청운을 공격하던 흑의인의 가슴을 향해 빛살처럼 쏘아졌다.
“피해라!”
외침과 동시에 사십 대 중반의 銀자가 새겨진 도포를 입은 사내가 청운의 검기를 자신의 검으로 맞받아쳤다.
청운의 검기와 황의인의 검기가 충돌한 찰나의 순간.
하지만 이미 흑의인은 왼팔이 잘려 나가고 옆구리가 베어 진 채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다급하게 청운의 검을 막아섰던 황의인마저 충격을 못 이겨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 입가에 한 가닥 핏줄기를 입가에 흘리며 연신 몸을 휘청거리고 있었다.
“은 검사님! 괜찮으십니까.”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내 몇몇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귀하는 도대체 누구요. 우리 방과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 야밤에 찾아와 이런 행패를 부리는 것이오.”
청운의 무위에 놀라서인지 한결 공손한 목소리로 황의인이 말했다.
“하월산 광산에서 볼모로 잡혀 강제 노역을 하던 사람들 문제 때문에 왔소. 빨리 방주에게 안내하시오.”
청운이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
“광산과 선금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이 쓴 빚 때문에 그리된 것이오. 다시 말해 그들은 모두 정당하게 계약서를 쓰고 일을 하는 것인데, 귀하는 왜 부당하게 본방을 찾아와 이렇게 핍박하는 것이오.”
황의인이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청운의 말을 반박했다.
“무엇이 정당이고, 무엇이 부당이오? 이보시오! 아무리 일을 해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터무니없는 이자로 선량한 사람에게 굴레를 씌워 평생을 노예로 부린 것이 정말로 정당하단 말이오?”
“…….”
“내 오늘 당신들이 말하는 그 ‘정당’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 단단히 깨우쳐 주겠소. 어차피 당신이 책임지지도 못할 일. 빨리 방주를 이 자리에 불러오시오.”
“대체 무슨 일로 이 난장판인가.”
뾰족한 턱에 염소수염을 기른 오십 대 초반의 청의를 입은 중년인이 마치 자신의 목소리를 타고 날아오듯 장내로 날아들었다.
“구호법님을 뵙습니다.”
청운을 에워싸고 있던 장정들이 일제히 그자를 향해 포권의 예를 취했다.
“네 놈이 이 푸닥거리를 했느냐. 네 놈은 누구냐. 대체 우리 방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느냐. 그 이유를 바른대로 대지 못하면 오는 네 놈은 이곳에서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다. 내 장담한다.”
청의의 중년인이 푸른 섬광이 번뜩이는 분노의 눈빛으로 청운을 쏘아보았다.
“좀 전에도 말했지만 광산에서 강제노역을 하는 사람들 문제로 왔소. 당신이 책임질 수 없는 일이라면 일찌감치 방주를 불러오시오.”
청운도 전혀 지지 않고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청의인의 눈빛을 되받아치며 말했다.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순 없지만 네 놈을 없애 버릴 순 있지. 네놈이 없어지면 결국 문제는 해결되겠지. 내가 모든 걸 정리해 주마. 내 도를 갖고 오너라.”
구호법은 옆에 있던 사내에게 말했다.
“안 그래도 여기 대령하고 있었습니다.”
청의인의 뒤에 시립하고 있던 흑의의 사내가 위맹해 보이는 큼직한 도를 청의의 중년인에게 내밀었다.
“이놈. 오늘, 내 귀호도법에 죽는 걸 영광으로 알라.”
도를 받아 쥔 구호법이 공력을 운행하자마자 마치 도가 우는 듯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청운은 그 기세를 보고 직감적으로 방심할 수 없다는 생각에 바짝 긴장하며 공력을 끌어올렸다.
청운의 검 끝에서도 자색의 투명한 기가 마치 둥근 환처럼 피어올랐다.
그 광경을 본 구호법은 한번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도를 다시 고쳐 잡았다.
“어디 네 놈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한번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