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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비검무-24화 (24/184)

024화 다시는 만나기 싫은 공포였다.

청운은 이미 여러 군데 검상을 입어 속전속결로 싸움을 끝내고 싶었지만 상황이 뜻대로 잘 풀리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청운의 속이 타들어 갔다.

어젯밤 반혼시의 독을 몰아내기 위해 무리해서 사용한 내공을 간신히 회복하긴 했다.

하지만 사내들의 차륜진에 의해 또다시 내상이 발작을 할 것처럼 속이 뒤틀렸다.

청운은 사내들의 공격 순서와 방위 그리고 속도를 머릿속으로 꼼꼼히 그려 보았다.

그들의 검진의 본령은 오행에 팔괘를 가미한, 생문이 없고 사문만 있는 오행팔괘진 같았다.

생문이 없다면 생문을 만들어야 한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수밖에 없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모든 방위에 동등한 힘이 작용할 땐 위험을 감수하고 한쪽 방위를 집중적으로 공격해 진을 허물어야 생문이 만들어진다.

청운은 위험을 무릅쓰기로 작정했다.

진을 빨리 벗어나지 못하면 어차피 더 큰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청운은 치우천결을 최대한 끌어올려 몸을 보호하면서, 앞의 상대를 전력으로 공격하는 척했다.

그리고 갑자기 몸을 돌려 뒤에 있던 놈들을 향해 벼락처럼 <쾌—타—절—변—회> 초식을 연속적으로 퍼부었다.

예상을 뒤엎는 청운의 돌변한 공격에 청운의 배후를 맡고 있던 사내 셋이 청운의 강맹한 검기에 휘말려 던진 돌처럼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청운 또한 등과 옆구리에 몇 군데 가볍지 않은 검상을 입었다.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사내들을 더욱 거칠게 몰아붙였다.

더 이상 진의 이점을 이용하지 못하는 그들 각각의 무위는 별것 아니었다.

검진이 깨지자 기계처럼 맞물려 돌아가던 놈들의 공격이 우왕좌왕했다.

이제 놈들이 오히려 열세에 처했다.

모든 건 시간문제였다.

청운은 몸을 풍차처럼 돌리며 놈들의 빈틈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바로 그 순간 놈들 중 하나가 다시 그 검은색 피리를 힘껏 불었다.

그러자 놈들은 청운을 공격하는 척하다 갑자기 몸을 돌려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누구를 추적해야 할지 혼란을 주기 위해 사전에 계획된 도주 방법 같았다.

비록 놈들을 간신히 물리치긴 했지만 청운도 놈들을 추적할 만한 처지가 전혀 아니었다.

자신도 여러 군데 검상과 내상마저 입어 서둘러 안정을 취해야만 했다.

특히 처음에 당한 왼쪽 어깨의 상처가 심했다.

피도 제법 흐르고 있었다.

청운은 소매를 찢어 어깨의 상처 부위를 질끈 동여매고는 서둘러 지혈을 했다.

거의 뼈가 드러날 지경이었다.

칼날이 한 치만 더 깊었더라도 어깨의 근맥과 뼈가 통째로 잘려 나갔을지도 모를 깊은 상처였다.

청운은 하오문의 보표 삼호가 마련해 준 동굴에 들어와 있었다.

동굴 주변에는 사기를 막는 부적으로 진이 쳐져 있었다.

입구는 쉽게 발각되지는 않을 것이다.

청운은 서둘러 윗옷을 벗고는, 검상이 깊게 입어 피가 줄줄 흐르는 어깨의 상처를 급하게 다시 지혈하고는 하오문의 비고에서 가져온 금창약을 듬뿍 발랐다.

그리고는 즉시 내상을 다스리기 위해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청운은 오늘 밤은 꼬박 여기서 보낼 생각이었다.

움직이기에는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을뿐더러 함부로 움직였다가 또다시 반혼시의 공격을 받는다면 낭패를 면치 못할 것 같았다.

어젯밤에 목숨 걸고 싸웠던 반혼시들은 꿈에서도 다시는 만나기 싫은 공포였다.

생각만 해도 당시의 두려움이 되살아나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청운은 꼬박 두세 시진을 계속해서 치우천결을 운용해 내, 외상을 다스렸다.

어느 정도 원기를 회복하자 청운은 갑자기 배고픔을 느꼈다.

청운은 보표가 마련해 둔 궤를 열었다.

벽곡단과 건량 그리고 황주 한 병이 있었다.

이런 준비성을 보면 하오문은 강호의 장삼이사들이 함부로 무시할 그런 문파가 절대로 아닌 것 같았다.

건량에 술까지 몇 모금 마시고나자 그제야 청운은 조금 살만함을 느꼈다.

청운은 보표가 준비한 깨끗한 흑의로 갈아입었다.

내일은 저번에 보표가 일러준 대로 인피면구를 쓰고 변장을 하고 출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쪽잠이라도 청할 요량으로 벌러덩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때 황 노야에게서 얻은 책이 문득 생각났다.

청운은 드러누운 채 [다라]을 주워들었다.

책의 표지와 귀퉁이 일부가 피에 젖어 있었다.

청운은 책을 펼치고 글자를 들여다봤다.

분명 범어 같기는 한데 해독이 전혀 되지 않았다.

청운은 어린 시절부터 워낙 서책에 관심이 많아 돈만 조금 생기면 안휘현 주변의 서점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안 가 본 서점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서점을 드나들면서 온갖 책들을 사 모았다.

그렇게 사 모은 책들 중에는 범어에 관한 책도 다수 있었다.

그래서 완벽하지는 않아도 범어를 조금 알았다.

그런데 이 글자는 분명 범어 같기는 한데 범어를 해석하듯이 읽으면 전혀 해독이 안 됐다.

글자와 의미가 마치 물과 기름처럼 전혀 통하지 않고 겉돌았다.

황윤 노야 같은 대학자가 이 책을 왜 포기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청운은 책을 머리맡에 밀쳐놓고는 다시 쉽사리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 * *

선잠 속에서 얼핏 사방에서 우는 새소리가 들렸다.

청운은 눈을 떴다.

덩굴과 넌출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아침 햇살이 동굴 바닥과 벽면 곳곳에 싱그럽고도 청명한 무늬를 수놓고 있었다.

마치 태고의 빛으로 무수히 점과 도형을 찍어서 그린 그림 같았다.

일평생 단순한 풍경만을 그려 왔던 대가가 이제 그런 그림이 지겨워져서 새로운 화풍은 실험하는 것 같았다.

어깨의 통증 말고는 몸도 제법 거뜬했다.

청운은 오늘부터는 다소 힘들더라도 길이 없는 산길을 골라서 산을 넘을 예정이었다.

이런 몸으로 더 이상 적과 부딪치면 어떤 심각한 사태가 발생할지 청운은 예단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청운은 누워서 몇 번 게으른 기지개를 켠 후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옷을 추슬러 입고 인피면구도 썼다.

잠시 얼굴에 어색한 이물감을 느꼈다.

청운은 순식간에 사십 대 중반의 인상 좋은 중년인으로 변했다.

청운은 발끝에 있는 책을 집어 들어 품속에 넣은 후, 검을 허리에 차고는 동굴 밖으로 나왔다.

늦가을 아침의 산바람이 아직 청운의 얼굴에 붙어 있던 잠을 일순간에 몰아냈다.

제법 쌀쌀하고 맵찬 바람이었다.

청운은 소나무의 휘어진 가지를 보면서 방위를 가늠했다.

무림맹이 있는 남쪽으로 방향을 잡은 후 경신술을 전개했다.

청운은 일부러 길이 험하거나 아예 길이 없는 곳을 골라서 다녔다.

그렇게 몇 개의 산봉우리를 넘고 계곡을 건넜다.

하지만 길이 아닌 곳만을 다니는데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일부러 길을 피해서 다니니 적을 만나지 않은 것은 좋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혹은 자신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아무에게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청운은 자신이 어디로 얼마만큼을 더 가야 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어 답답함을 느꼈다.

그리고 몇 날 며칠 건량과 육포만 먹으니 그것도 질렸다.

따뜻한 탕과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간절했다.

그렇다고 언제 어디서 적이 나타날지 모르는 판국에 산짐승과 물고기를 잡아 함부로 화식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얼마나 몇 개의 산을 더 넘자, 다시 서녘 해가 허리 굽은 노인네처럼 산정마다 뉘엿뉘엿 구부러지고 있었다.

청운이 길이 없는 곳을 골라서 길을 잡는 바람에 오늘 밤은 보표가 마련해 주는 편한 잠자리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을 청운 자신이 해결해야만 했다.

청운은 주변의 가장 높은 봉우리의 뾰족한 바위에 올라선 후 최대한 안력을 돋우어 천천히 주변을 한차례 휘둘러보았다.

동쪽으로 이십여 리 떨어진 곳에 풀과 나무껍질로 지붕을 이은 조그마한 산막 한 채가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희미하고 가는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저녁밥을 짓는 연기 같았다.

청운은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산막을 향해 곧장 신형을 날렸다.

밥을 얻어먹기 위한 욕망보다는 현재 자신의 위치를 묻기 위해서였다.

산막은 멀리서 볼 때와는 달리 소박했지만 나름 깔끔했다.

주변에 자생하는 나무들을 대충 자르고 다듬어 지은 것 같았지만, 기둥이며 벽체가 제법 튼실하고 단단했다.

많이 가공하지 않은 재료를 그대로 사용해서 오히려 어떤 측면에선 저자의 그렇고 그런 여염집보다 더 운치가 있었다.

집안에서는 전혀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누구 계십니까?”

그냥 돌아설까 하다가 청운은 서너 번 소리친 후 슬며시 방문을 열어 보았다.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어두컴컴한 방안에서는 약초 말라가는 냄새와 함께 삶은 감자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맡자 안 그래도 허기진 배가 더 고파졌다.

청운이 안력을 돋우어 찬찬히 둘러보니 방 한구석의 나지막한 탁자 위에 흰 무명으로 덮어놓은 큼지막한 목기가 보였다.

잰걸음으로 방에 들어간 청운이 목기를 덮고 있는 무명을 들추자 목기 안에 삶은 감자가 가득했다.

청운은 몇 개만 먹고 갈 심산으로 허겁지겁 두세 개의 감자를 게 눈 감추듯 집어삼켰다.

꿀맛이었다.

저자에서는 그냥 먹으라고 해도 잘 손이 안 가는 삶은 감자가 이렇게나 맛이 있다니,

청운은 입맛을 포함한 인간의 욕망은 상황과 처지가 어떤지에 따라 달라지는 변덕을 부리는 요물 같다고 생각을 했다.

청운이 막 네 개째를 집어 입에 넣으려는 순간, 이 마장 정도 밖에서 누군가 이리로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불과 일 년 전의 청운이라면 절대로 듣지 못할 미약한 발자국 소리였다.

땅을 디디는 발자국의 무게로 미루어 봐서 어른 한 명과 아이 하나인 모양이라고 청운은 속으로 짐작했다.

이 집의 주인인가, 하고 생각한 청운은 먹고 있던 감자를 퍼뜩 삼키고는 서둘러 방을 나가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봤다.

산봉우리를 벌겋게 불사르며 지는 해를 등지고 망태를 등에 짊어진 초로의 노인이 겨우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사내 아이 하나를 앞세운 채 청운이 있는 쪽으로 허청허청 걸어오고 있었다.

청운은 노인을 향해 몇 걸음 다가가며 노인에게 공손하게 말을 건넸다.

“노야께서 이 집의 주인장이신지요.”

“그렇소. 그런데 공자는 누구신데 이렇게 내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소.”

노인은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청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저는 우연히 이곳을 지나가던 사람인데 길을 묻고자 이런 실례를 했습니다. 그리고 너무 배가 고파 그만 염치없이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감자 몇 알도 먹었습니다. 감자값은 돈으로 드리겠습니다.”

청운은 품속에서 은자 두 개를 꺼내 노인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노인은 어이없다는 듯이 청운을 휘둥그레 쳐다본 후 툭 던지듯 청운에게 한 마디 했다.

“그깟 걸로 돈은 무슨 돈. 다시 넣어 두시오. 그리고 이리 들어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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