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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비검무-29화 (29/184)

029화 그 누구에게도 무림의 밤은 괜찮지 않다.

청운은 이런 상황에서 도무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말이라도 해서 일단은 여인이 더 이상 나쁜 마음을 먹지 않도록 달래야만 했다.

“부인, 부인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하지만 견뎌야 합니다. 살다 보면 살아지고 나중에 그때 그러지 않은 것이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분명 있을 겁니다. 저도 아직 나이가 어려 세상에 대한 경험이 일천합니다.”

청운은 말을 이어 갔다.

“그래도 제 경험으로 굳이 말씀드리자면 삶의 대부분은 억지로 견디는 겁니다. 그 견딤 속에 잠깐씩 반짝이는 순간이 삶을 지탱하게 하지요. 부인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견디다 보면 틀림없이 반짝이는 순간이 도래할 겁니다.”

처음에 여인은 청운의 말을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결단을 말린 청운을 원망하는 눈빛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운이 설득을 멈추지 않자, 어느 순간 여인이 고개를 들어 청운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청운의 진심에 여인이 차츰 동요의 눈빛을 내비쳤다.

여인은 청운의 눈빛에서 그동안 다른 사람에게서 보지 못한 어떤 진심을 본 것 같았다.

“당신은 최소한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군요. 그런데 당신은 좋은 의도로 이곳에 온 게 아닌 것 같군요. 그랬다면 야밤에 지붕이 아니라 대낮에 정문으로 들어왔겠지요. 나한테 말해 보세요. 내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청운은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여인에게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여인이 처한 상황이 아무리 대륙표국에 적대적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이 여인은 이곳의 식솔이 아닌가, 하고 청운은 생각했다.

지금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오늘 처음 보는 이 여인이 자신의 편이 되어 줄 거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그새 청운의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읽은 여인이 재촉하듯 다시 말했다.

“나는 이제 당신을 믿는데 당신은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는 것 같군요. 그럼 됐어요. 지금 바로 이곳을 나가세요.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할 테니.”

청운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목적 달성보다 여인의 목숨을 확실히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말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사실 저는 이곳에서 어떤 정보를 얻으려고 들어 왔습니다. 대륙표국과 안 좋은 일로 얽혀 있어서 대륙표국의 약점을 좀 찾을까 싶어 이런 야밤에 몰래 들어왔습니다.”

청운의 의도를 안 여인이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며 진작 말하시지, 라는 표정으로 청운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대륙표국의 인원이 얼마고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각각의 건물은 무슨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정보를 보관하는 건물은 어디고 어느 위치에서 어떻게 경비가 지키고 있는지.

자신이 아는 걸 전부 청운에게 말해 주었다.

청운은 너무나 고마워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후 서둘러 방을 나가려고 했다.

청운이 방을 막 방을 떠나려 할 때 여인이 뭔가를 갈구하는 묘한 눈빛으로 청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여인은 마치 절대로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간신히 말하는 것처럼 아주 가늘지만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님, 제 방을 나가시기 전에 저를 한 번만 안아주고 가시면 안 될까요. 딱 한 번만.”

그녀의 뜻밖의 부탁에 청운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여인의 목숨을 구하는 일환이라는 생각에 청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개미 같은 여인의 허리를 오른팔로 깊숙이 두르고는 자신의 가슴 쪽으로 여인을 살며시 끌어당겼다.

“아.”

여인의 비음이 청운의 청각을 자극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살짝 벌어진 여인의 입에서 나온 달큼하면서도 화한 향내가 청운의 코끝을 취하게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인의 몸을 접한 청운은 어찌할 바를 몰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지금 청운은 너무나 혈기 왕성한 이십 대 초반의 청춘이 아니던가.

자기 몸의 감각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달음질치는 것을 깨달은 청운은 이러면 안 되지, 라는 생각에 그만 여인에게 떨어지기 위해 팔을 풀었다.

하지만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여인은 청운의 목에 감은 두 팔에 잔뜩 힘을 주고는 마치 매미가 나무에 매달리듯 청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청운의 몸속으로 아예 들어가고 싶다는 듯이 더더욱 밀착했다.

그러다 마침내는 청운의 입에 자신의 입을 갖다 대고 말았다.

깜짝 놀란 청운이 여인을 급하게 밀쳐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부인, 이러시면 안 됩니다. 더 이상은 제가 부인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만 가 봐야 하겠습니다.”

청운이 부인에게 가볍게 묵례 후 방을 나서다가 갑자기 신형을 비틀거렸다.

청운은 자기 몸에 이상을 느꼈다.

갑자기 온몸의 모든 피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혈관이 풍선처럼 팽창했다.

급기야 전신이 불덩이처럼 뜨겁게 달궈졌다.

단 한 가지 생각을 빼고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여체를 안고 싶은 욕망만 살아 숨 쉬고 다른 모든 욕망은 숨을 놓고 말았다.

그녀가 청운 몰래 음약을 입에 물고 있다가 청운과 입을 맞대는 순간, 청운을 중독시켜 버린 것이다.

음약의 기운에 중독된 청운의 상태는 그 어떤 굳은 의지로도 자신의 욕망을 이길 수 없었다.

감당할 수도 걷잡을 수도 없는 단 하나의 욕망이 순식간에 청운의 몸을 지배하고 말았다.

인간의 의지로는 절대 끌 수 없는 불을 지피고 말았다.

급기야 눈까지 벌겋게 충혈된 청운은 뒤돌아서 짐승처럼 여인에게 달려들었다.

여인은 이미 예상하고 기다렸다는 듯 청운에게 자신을 통째로 맡겨 버렸다.

그리고 청운에게는 거의 들리지 않은 혼잣말로 읊조렸다.

“공자님, 미안합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제가 조금 더 살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 * *

청운은 여인이 가르쳐 준 전각의 지붕 위에 서 있었다.

번을 서는 경비병을 제압하고 잠입할까 하다가 오히려 그게 더 위험을 초래할 것 같아 그냥 몰래 잠입하기로 했다.

그만큼 청운은 [묘묘보허]로 터득한 자신의 신법에 자신감이 붙어 있었다.

젊은 미부의 이름은 임소아라고 했다.

청운이 자신의 몸에 들끓던 열기를 간신히 가라앉히고 그녀의 처소를 떠날 때 그녀가 가르쳐 주었다.

여인은 몇 번이나 청운에게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청운은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인간의 의지를 무력화시킬 때도 있다.

청운은 이번 일은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다고 연신 자신을 다독였다.

그래서 방을 나설 때 청운은 여인을 한 번 더 꼭 안아주었다.

기와와 산자를 뜯어내자 무수한 서류가 빼곡히 정리된 밀실이 나타났다.

서찰은 서찰대로, 두루마리는 두루마리대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청운은 밀실로 내려가기 전에 어떤 것이 최신의 정보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밀실의 구조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밀실을 쭉 둘러보던 청운의 눈길이 아직 채 정리되지 않은 중앙 탁자 위에 수북이 쌓인 서류에 고정되었다.

아마도 저 정리 안 된 서류들이 최신 정보인 것 같아 보였다.

청운은 묘묘보허의 신법으로 마치 깃털이 내려앉듯 바닥에 내려섰다.

청운의 동작에는 그 어떤 미세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청운은 조심스럽게 서찰과 두루마리가 무작위로 뒤섞인 상자를 헤집으며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허탕이었다.

그곳에 있는 대부분의 서류들은 표행과 관련된 사항을 기록한 것이었다.

나머지 것들도 표행 일을 상의하기 위해 지국과 지국이 주고받은 서찰이었다.

이런 것들 말고 더 중요한 기밀 서류가 틀림없이 어딘가 보관되어 있을 것이라 확신한 청운은 다시 한 번 꼼꼼히 밀실의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특별히 눈에 띠는 곳은 없었다.

아무 소득도 없이 이곳을 떠나야 하는가, 라고 체념한 청운이 신법을 전개해 지붕으로 다시 올라가려다가 조금 이상한 것을 느꼈다.

아주 미세한 차이었으나 밀실의 공기와는 조금 다른 공기가 어딘가로부터 들어온다는 느낌을 받았다.

청운은 하오문의 비고에서 익힌 은잠술로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린 채 밀실의 공기와 다른 공기가 들어오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곳은 밀실의 오른쪽 벽에 붙은 책장 뒤였다.

청운은 혹시, 하며 책장을 슬쩍 뒤로 밀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책장이 빙그르르 돌며 어딘가로 통하는 입구가 나타났다.

청운은 책장을 원래대로 돌리면서 주저 없이 들어갔다.

서류는 모두 세 종류였다.

한쪽은 관부와 관련된 것, 다른 한쪽은 무림과 관련된 것, 나머지 한쪽은 어디와 관련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서류였다.

관부와 관련된 문서에는 주로 대륙표국이 상납한 금액과 날짜 그리고 누구에게 상납했는지가 적혀 있었다.

정사를 구분하지 않고 무림의 여러 방파에 정기적으로 상납하고 있었다.

문제는 나머지 서류들이었다.

서류에는 왕부와 구대문파, 사련과 마련에 소속된 문파의 이름과 숫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서류에 적시된 숫자만 가지고는 도무지 내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청운은 문파와 그 숫자가 틀림없이 어떤 깊은 연관성이 있을 것 같아서 모두 외웠다.

다른 서류와 달리 빨간 비단에 흰 글자로 써진 특이한 서류도 있었다.

그 비단에는 섣달그믐이라는 날짜와 천산 천도봉, 그리고 뜻 모를 숫자들이 가득 적혀 있었다.

의미는 파악할 수 없었지만 틀림없이 아주 중요한 내용일 것 같은 강한 확신이 청운의 뇌리를 순간적으로 강하게 강타했다.

일단 모든 것을 나름대로 숙지한 청운은 자신이 잠입했던 길을 거꾸로 되짚어 밤안개처럼 몰래 밀실을 빠져나왔다.

* * *

무림에서 밥을 빌어먹고 산다는 것은 누구와 어떤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가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무림에서는 관계가 바로 밥이다.

그건 하남표국도 대륙표국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집단이든 그 관계를 통해 일을 청탁하고 수탁 받으며 일을 진행하고 처리한다.

그러다 더 큰 이해관계 때문에 관계가 틀어지면 순식간에 동료가 적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그것이 무림과 강호의 생리이고 비정함이다.

청운이 대륙표국을 밤안개처럼 빠져나간 후 채 일다경이 되지 않아 대륙표국의 주요 전각에 불이 훤하게 켜지고 종소리가 한동안 요란스레 울렸다.

정보각을 지키던 경비무사들의 우두머리가 헐레벌떡 총사의 집무실이 있는 전각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사내는 계단 아래에 부복하자마자 큰 소리로 총사를 불러댔다.

잠결에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총사는 대충 옷가지를 걸친 채 계단참에 나타났다.

계단 아래 부복한 사내는 총사를 보자마자 자기 이마를 거의 땅에 찧다시피 조아리며 다급하게 상황을 보고했다.

“총사님, 아무래도 정보각의 비고에 누가 침입했던 것 같습니다. 입구 책장에 설치해 놓았던 비표들이 헝클어져 있었습니다.”

“어찌 그런 일이… 이 일을 국주님께 어찌 보고한단 말인가. 침입자의 정체는 파악했는가. 하긴 비고에 침입할 정도의 고수라면 너희들도 속수무책이었겠지. 하지만 누군가는 이 일에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네, 총사님.”

“비고에 출입한 자의 몸에는 우리가 특수하게 배합한 천리향이 묻어 있다. 너는 지금 즉시 총표두에게 이 사실을 연통하고 추적조를 가동시키라고 해라. 그리고 흑림에도 전서구를 띄워라. 전서구의 내용은 사로잡지 못하면 현장에서 척살하라고 쓰라. 나는 바로 이 길로 국주님께 보고 드리려 가 봐야겠다.”

총사는 자신이 할 말을 마치자마자 입은 옷 그대로 국주의 처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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