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화 시뻘건 불의 꼬리를 단 유성 하나가
그날 밤, 혈불인마와 청운은 얼마의 술을 마셨는지 본인들도 몰랐다.
그냥 밤이 술이고 술이 밤이었다.
처음에는 호형호제한 기념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대취한 후에는 아예 술이 사람을 마시는 형국으로 바뀌고 말았다.
도저히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폭음한 청운과 혈불인마는 간신히 기녀들의 부축을 받고 각자의 방에 들어섰다.
그들은 들어가자마자 그대로 쓰다 버린 물건처럼 침대에 널브러졌다.
청운은 세상모르고 잠이 들었다.
* * *
얼마나 잤을까.
청운은 또 꿈을 꾸고 있었다.
깊은 산에서 귀한 약초를 캐서 정성을 다해 청운에게 달여 먹이던 아버지.
신동이라는 칭찬을 들으며 다니던 서당.
과거에 낙방한 충격에 관도에서 쓰러진 일.
하남표국의 국주에게 구원을 받은 일.
남궁연봉과의 풋풋하면서도 아련한 인연.
수중동굴에서 적곤의 꼬리에 맞아 사경을 헤맸던 일.
반혼시와 혈투를 벌인 절체절명의 순간들이 유성처럼 청운의 잠 속에 쏟아졌다.
청운은 꿈속에서 모든 걱정을 떨쳐 버린 채 맨몸으로 자색의 성운과 반짝이는 성좌들 사이를 마치 한 마리 대붕처럼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었다.
깊디깊은 잠에 빠져든 청운을 노려보는 시퍼런 칼날 같은 시선이 있었다.
그 섬뜩한 칼날은 청운이 잠든 방의 천장에서부터 청운의 얼굴로 곧장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흑의의 복면인이 시퍼런 두 눈만 밤 속의 유리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의 나머지 부분은 깜깜한 밤과 전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밤 속의 밤 같은 흑의 복면인의 입에는 대나무로 만든 손가락 서너 마디만 한 가느다란 대롱이 달려 있었다.
검은 복면인의 두 볼은 밤의 풍선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복면인이 입에 물고 있는 대롱의 아래쪽은 정확히 청운의 목을 겨냥하고 있었다.
살짝 대롱을 불기만 해도 대롱 속에 있는 뭔가가 정확히 청운의 목에 꽂힐 것 같았다.
여전히 청운은 고단하고 나른한 꿈을 꾸고 있었다.
청운은 무수한 성운이 뿜어내는 투명한 자색의 광채에 휩싸인 채 알몸으로 성좌와 성좌를 옮겨 다니며 즐겁게 유영하고 있었다.
청운은 태어나 평생 처음 느끼는 너무나 평화롭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시뻘건 불의 꼬리를 단 유성 하나가 청운의 목을 향해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깜짝 놀란 청운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유성은 청운의 바로 코앞까지 당도했다.
피할 순간을 놓친 청운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시뻘건 유성의 불길에 휩싸인 청운은 성좌와 성좌 사이 무한의 암흑으로 끝없이 추락했다.
바로 그 순간 외마디 날카로운 외침이 청운의 귀를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사자님, 흑림의 살수가 노리고 있습니다.”
잠결에 누군가의 외마디 외침을 들은 청운은 자신의 곤한 잠을 깨우는 그 소리가 싫었다.
청운은 그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자신도 모르게 몸을 반대로 뒤집었다.
바로 그 순간 복면 살수의 입에서 발출된 독침이 청운이 방금까지 베고 자던 베개에 꽂혔다.
정확히 청운의 목이 놓여 있던 자리였다.
처치—지—직—치—익.
독침에 맞은 베개가 금세 시커멓게 삭으며 타들어 갔다.
깊은 잠결에도 본능적으로 절체절명의 위험을 감지한 청운이 찰나적으로 침대 밖으로 몸을 던지며 벌떡 일어났다.
“웬 놈이냐. 모습을 드러내라.”
청운은 자신이 지른 소리를 자신이 채 듣기도 전에 독침이 쏘아진 천장을 향해 그대로 일장을 날렸다.
몇 개의 독침이 연달아 청운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청운의 강력한 장력에 가로막힌 독침들은 사방으로 튕기며 방바닥 이곳저곳에 꽂혔다.
독침이 꽂힌 자리마다 치—이—익, 치—이—익, 하며 바닥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났다.
악독하고 지독한 독이었다.
사람이 맞았다면 순식간에 한 줌 시커먼 핏물로 화하고 말았을 맹독이었다.
분기탱천한 청운이 이번에는 자신의 검으로 침이 쏘아진 곳을 향해 번개처럼 쾌의 초식을 발출했다.
“으—윽.”
신음과 함께 검은 인형 하나가 밤하늘에 쏘아진 화살처럼 튀어 오르더니 순식간에 깊은 밤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청운의 눈에 어렴풋이 들어왔다.
잠잘 때 입던 옷 그대로 지붕 위로 솟구쳐 오른 청운이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끝이 보이지 않는 시커먼 밤뿐이었다.
다시 방안으로 내려온 청운은 서둘러 옷을 걸쳐 입었다.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天인가, 아니면 또 다른 곳인가?
‘이제부턴 잠도 제대로 못 잘 것 같다.’
청운은 잠결에 보표가 ‘흑림’이라고 말한 것을 문득 기억해 냈다.
‘흑림이라, 흑림… 어떤 살수 집단인지 반드시 알아봐야 하겠구나.’
그렇게 결심한 청운은 서둘러 방을 나섰다.
청운이 방문을 열어젖히며 밖으로 나섰을 때 옆방에서 자던 혈불인마도 그 소동에 잠이 깨었는지 밖으로 뛰쳐나왔다.
* * *
지는 석양에 서편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할 때 즈음이면 사람뿐 아니라 생명 가진 모든 것들은 어딘가 안온한 곳에 편안히 깃들고 싶어 한다.
다음날의 활기찬 삶을 위해 누구나 자신의 오늘 밤이 세상에서 가장 안락하고 평안하기를 갈구한다.
그건 청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청운은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자, 과연 그런 밤이 오기나 할까 안타까워하며 점점 노을이 검붉게 짙어지는 고독한 길을 하염없이 걸어갔다.
아침을 먹자마자 혈불인마와 헤어진 청운은 천산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청운과 헤어지는 것이 몹시 섭섭했던 혈불인마는 청운과 헤어질 때 청운의 두 손을 꽉 잡고는 그윽한 눈빛으로 한참이나 청운을 바라봤다.
특히 청운이 실체도 없는 거대한 적을 상대로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싸우겠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얼굴에 근심 어린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청운이 가는 길에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무수한 위험이 있을 거라며 부디 잘 헤쳐 나가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리고 청운이 하려는 일을 자신도 최선을 다해 돕겠다가 했다.
청운이 잠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어느새 땅거미가 검은 보료처럼 텅 빈 관도에 깔리기 시작했다.
과음과 흑림의 살수 때문에 잠을 설쳐서 그런지 청운은 오늘 유독 허기와 피로를 평소보다 많이 느꼈다.
마침 백여 장 앞에 소박한 객점 하나가 보였다.
오래된 목조 건물이었다.
낡고 허름해 보였다.
하지만 그 집 말고 다른 개점이 주변에 없기에 선택하고 말 것도 없이 청운은 객점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계산대 앞에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있던 점소이가 청운을 보자 냉큼 자세를 바로잡고는 벌떡 일어섰다.
“어서 오십쇼, 어서 오십쇼.”
점소이 치고는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삼십 대 초반 정도의 사내가 청운에게 연방 허리를 숙이며 호들갑스럽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청운을 탁자로 안내했다.
청운은 탁자에 앉자마자 구운 오리고기와 술 한 병을 시켰다.
점소이가 주방에 주문을 넣을 때 청운은 객점을 한 번 쓱 둘러봤다.
손님은 청운 혼자였다.
아무리 외진 길에 있는 객점이라 해도 이 시간이면 제법 손님이 있을 텐데, 라고 잠시 이상한 생각을 했지만 청운은 워낙 지치고 허기가 져서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청운은 맛이 좀 없더라도 제발 시킨 음식이 빨리 나오기만을 바랐다.
잠시 후, 점소이가 간단한 야채볶음과 술 한 병을 먼저 청운의 탁자로 가지고 왔다.
오리구이가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리니 선 야채볶음으로라도 안주를 하라고 점소이가 말했다.
그리고 야채볶음은 돈 안 받고 그냥 주는 것이라 했다.
청운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후 급하게 술을 잔에 가득 따랐다.
그 순간 점소이의 눈빛에 날카로운 살기가 반짝하며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청운은 술을 따르느라 잠시 고개를 숙였기에 점소이의 그런 눈빛을 보지 못했다.
청운이 한 잔 가득 따른 술잔을 성급하게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그때, 청운은 술맛에 이상함을 느끼고 갑자기 도로 홱 뱉어냈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급하게 뱉어냈는데도 혀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바로 그 순간, 우지끈 소리와 동시에 주방과 지붕이 부서지더니 흑의의 살수들이 청운의 심장과 목을 향해 번개처럼 검을 찔러 왔다.
점소이까지 모두 다섯 명이었다.
사방은 물론 허공까지 탈출로가 가로막힌 청운은 너무나 위급한 나머지 무림인이라면 가장 싫어한다는 나려타곤으로 다급하게 바닥을 몇 바퀴나 나뒹굴었다.
덕분에 청운은 간신히 치명적인 부상은 면했지만 이미 서너 군데 만만찮은 검상을 입고 말았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청운은 검을 뽑아 들자마자 쾌—타—절—변—회의 다섯 초식을 연속적으로 전개하며 살수들을 짓쳐갔다.
청운의 검에서 뻗어 나온 투명한 자색의 검기가 번갯불처럼 곧장 살수들을 휩쓸어갔다.
청운과 살수들은 공력에선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났다.
청운의 단 일초에 중한 검상을 입은 살수들은 순식간에 줄행랑을 놓았다.
달아나는 살수를 추적하기 위해 개점의 지붕에 올라선 청운이 재빨리 사방을 둘러보았다.
살수들은 제각각 모두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한 명이라도 추적해 볼까 생각하다가 청운은 이내 마음을 접었다.
잡아 봤자 어차피 저들은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괜한 헛수고만 한 번 더 할 뿐이다, 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저들을 추적하는 것보다 우선 독을 치료해야 하는 것이 청운에게 더 다급했다.
저들은 달아나는 와중에도 내가 단혼산에 중독되어 곧 죽을 거라고 했다.
비록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입에 대기만 했는데도 입속은 벌써 불이 붙은 듯 확확 거렸다.
살수들이 검에도 독을 발랐는지 칼 맞은 자리가 여느 때 칼에 베인 것과는 확연히 다르게 아려 왔다.
이미 검상을 중심으로 피부가 시퍼렇게 변하고 있었다.
한시가 급했다.
청운은 독이 더 이상 퍼지지 않도록 상처 주변의 혈을 막고는 객점 안을 꼼꼼히 둘러봤다.
주방 뒤 식자재를 보관하는 창고에 네 구의 시체가 있었다.
원래 이 객점을 운영하던 사람들 같았다.
그 시신을 보자 청운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신과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을 이렇게나 무도하게 죽이다니.
청운은 저런 자들에게는 다음부터 절대로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기로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청운은 한시바삐 독과 상처를 치료할 은밀한 장소를 찾아야만 했다.
살수들이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식자재 창고 한쪽 구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상처에 금창약을 바른 후 즉시 치우천결을 운용해 독기를 태우기 시작했다.
다행히 치우천결에는 어느 정도 피독의 효능이 있어 급한 대로 독을 왼팔에 몰아둘 수 있었다.
하지만 완전한 해독을 위해선 반드시 해독약을 먹어야 했다.
그나마 치우천결의 내공이 워낙 정순하고 신묘해 청운이 당장에 활동하는 데는 큰 지장은 없을 것 같았다.
문제는 아주 강한 적과 맞닥뜨릴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는 공력으로 독을 신체의 한곳에 붙잡아 둘 수가 없다.
완전한 해독이 될 때까지는 그런 상황을 가능하면 만들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청운은 삼호에게라도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이었다.
청운은 하늘에다 대고 최대한 공력을 높인 전음으로 삼호, 삼호, 삼호라고 세 번을 외쳤다.
서둘러 이 근처를 벗어나야 한다.
적에게 자신의 행적이 완전히 노출된 곳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치우천결로 독을 왼쪽 팔에 몰아넣기는 했지만,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어떤 불상사가 생길지 장담할 수 없다.
최대한 빨리 안전한 은신처를 찾아 해독약을 복용하고 치우천결을 최대한 운용해 독을 몸 밖으로 완전히 몰아내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최소한으로 잡아도 족히 한 달은 걸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