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화 거북의 등을 박차고 공중으로 치솟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운은 나무판자 위에서 파도의 출렁임을 타는 것이 제법 재미있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물의 출렁임에도 나름의 법칙과 결이 있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적과 대적해 볼 만하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허리춤에서 검을 빼어들고 자신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는 물속의 수귀들을 노려보았다.
어느 정도 판자의 출렁거림에 익숙해진 청운은 발끝에 모은 공력을 이용해 자신이 탄 판자를 天이라는 글자가 일렁거리는 수면의 중심을 향해 화살처럼 나아갔다.
청운이 天이라는 글자의 중심으로 거의 다가갔을 때, 수면에 무수한 물보라가 일더니 물속에서 수많은 작살이 청운이 탄 판자를 향해 날아왔다.
청운은 검으로 작살을 쳐내며 더 깊숙이 天이라는 글자의 중심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청운을 향해 날아오는 작살의 수도 그만큼 더 늘어났다.
청운은 검으로 작살을 쳐냄과 동시에 물속의 시커먼 수귀들을 향해 사정없이 검을 휘둘렀다.
청운의 검기가 닿은 수면마다 엄청난 물보라가 일며 물의 거죽이 폭죽처럼 터지고 뒤집혔다.
청운의 검기에 충격을 받은 수귀들이 한꺼번에 열댓 명씩 시커멓게 떠올랐다가는 곧바로 물속으로 다시 잠수했다.
낭패였다.
아무래도 물속이라 청운의 검이 내뿜는 검기의 위력이 반감된 것 같았다.
그래도 청운의 공력이 워낙 강맹해서, 공격한 바로 그 순간에는 수귀들이 상당한 충격을 받는 것 같았다.
하지만 청운의 공격이 수귀들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물속의 적과 마주치는 것이 처음이라 청운은 다른 공격법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공격을 멈출 수는 더더욱 없었다.
그것은 곧바로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청운은 하던 공격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모적인 이런 공격은 분명히 한계가 있었다.
지금 당장은 버틸 수 있을지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결국 진력이 소진되어 결국 치명적인 위기를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어느 순간 청운은 갑자기 자신의 발밑이 허전해지는 걸 느꼈다.
수귀들이 청운이 올라서 있던 나무판자를 조각조각 잘라 버린 것이다.
유일하게 자신의 몸을 지탱하던 발밑의 지지대를 잃은 청운은 그대로 수귀들이 우글거리는 강심에 빠지고 말았다.
물속에는 작살을 꼬나쥔 수십여 명의 수귀들이 물고기 떼처럼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어피 같은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을 입은 수귀들의 움직임은 거의 물고기와 흡사했다.
마치 잔물결을 타는 것처럼 물속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수귀들은 열댓 명씩 한 조를 이뤄 청운에게 작살을 던지고는 순식간에 뒤로 빠졌다.
그러면 또 다른 조가 쉼 없이 작살을 날리며 공격해 왔다.
청운은 치우천결을 최대한 끌어올려 물속에서 공기막을 만들어 간신히 호흡하면서 자신을 향해 작살을 날리며 달려드는 수귀들을 짓쳐 갔다.
하지만 물속에서 청운이 펼치는 검의 위력은 땅에서 전개할 때의 반의반도 안 되는 것이었다.
동작은 몇 배로 느려졌고 검기는 채 반 장도 뻗지 못하고 물거품처럼 소멸되었다.
게다가 수귀들의 교묘한 차륜전에 청운은 점점 지쳐 갔다.
무슨 방도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상황을 반전시킬 뾰족한 방법이 머릿속에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청운은 수귀들의 작살을 간신히 막으면서 최대한 안력을 끌어올려 주변의 지형지물을 살펴보았다.
오십여 장 밖에 닻을 내린 시커먼 배의 밑바닥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배의 밑바닥 한쪽에 사람 크기 정도의 둥근 구멍이 있었다.
수귀들은 그 구멍으로 들락날락했다.
저곳을 쳐야 한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최대한 공력을 끌어올린 채 그 구멍 근처로 빠르게 접근했다.
그 순간, 갑자기 살귀들의 공격이 더 거세어졌다.
그 구멍을 필사적으로 방어하려는 것 같았다.
청운은 꾸역꾸역 살귀들을 상대하며 거의 구멍 근처까지 다다랐다.
청운이 그 구멍에 십여 장 가까이 다가갔을 때 살귀들이 순식간에 그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구멍을 닫아 버렸다.
청운이 최대한의 공력을 끌어올려 배의 밑바닥을 베고 찔렀지만 두꺼운 철로 이루어져 있어 흠집조차 내기 어려웠다.
호흡 때문에 청운이 수면으로 머리를 내밀자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진퇴양난이었다.
물속에 있을 수도, 물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청운이 물속으로 들어가면 수귀들이 작살로 공격을 했고 수면으로 머리를 내밀면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바로 그때 청운은 자기 옆으로 자신의 두세 배는 족히 되는 커다란 푸른 거북 한 마리가 지나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청운은 재빨리 거북의 꼬리를 낚아채듯 붙잡고는 등에 올라탔다.
거북은 한동안 이물질 같은 청운을 떨치려고 발버둥 쳤다.
하지만 청운이 몇 번 머리를 쓰다듬자 그만 잠잠해졌다.
청운은 거북의 머리를 툭툭 치며 거북이 해적선의 옆으로 다가가도록 유도했다.
거북이 거의 해적선 가까이 접근했을 즈음에 청운은 모든 공력을 최대한 발끝에 모은 채 거북의 등을 박차고 공중으로 치솟았다.
적선의 갑판에 뛰어오르기 위해서였다.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진 청운의 신형을 허공에서 뒤늦게 발견한 수귀들이 잠시 우왕좌왕했다.
그때 허공에 떠 있는 청운을 발견한 갑판의 수귀 하나가 자신이 쥐고 있던 커다란 흑번을 청운을 향해 세차게 휘둘렀다.
그러자 놀랍게도 커다란 물기둥이 용오름처럼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곧바로 그 물기둥은 마치 물로 만든 작살처럼 수십 가닥으로 갈라진 채 허공에 떠 있는 청운의 전신요혈로 쏘아졌다.
대경실색한 청운이 있는 힘을 다해 쾌—타—절—변—회의 초식을 연속으로 전개하며 간신히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연이은 흑번의 공격에 청운은 또다시 물속에 빠지고 말았다.
청운이 물로 떨어지자마자 또 아까의 그 수귀들이 배의 밑창을 통해 상어처럼 나타났다.
한 조가 청운을 향해 작살을 던지고 뒤로 빠지면 뒤에 대기하고 있던 다음 조가 작살을 던졌다.
진퇴유곡, 아니 진퇴수곡이었다.
청운은 물속에 있을 수도, 물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물속에는 수귀들의 작살로 청운을 공격했고 물 밖에서는 흑번이 만들어 내는 물 작살이 청운을 노리고 있었다.
청운은 진작 수공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걸 이번처럼 후회한 적이 없었다.
후회막급이었다.
이런 식으로는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무슨 방책이라도 구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달리 뾰족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급기야 청운은 육로를 놔두고 수로를 택한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좀 더디더라도 육로로 갔으면 죽을 때 죽더라도 마음껏 싸움이라도 해봤을 텐데, 수로를 택하는 바람에 제대로 힘도 한번 못 써보고 장강의 물고기 밥이 될지도 모른다는 자책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청운의 뒤쪽에서 작살 공격을 하던 수귀들이 갑자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급기야 수귀들의 대열이 흐트러지더니 썰물처럼 다급하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청운이 무슨 일인가 싶어 뒤돌아보자 은색의 어피를 입은 수십 명의 또 다른 수귀들이 검은 수귀들을 향해 연방 작살과 화살을 쏘아대며 공격하고 있었다.
은빛 어피를 입은 수귀들의 몸놀림은 검은 수귀들의 움직임보다 훨씬 더 민첩하고 유연했다.
검은 수귀들에 대한 그들의 공세는 마치 커다란 은빛 돌고래 떼가 먹이를 에워싸고 희롱하는 것 같았다.
청운은 이게 대체 뭔 일인가 궁금해 살짝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 순간 고막을 찢을 것처럼 요란하게 요고와 편종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시끄러운 소리는 <해루사>의 수귀들이 타고 있는 검은 배를 불화살을 쏘고 작살을 던지며 에워싼 채 빙빙 돌면서 있는 여러 척의 작은 배들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둥, 둥, 둥 울리는 둔중한 소리는 그 작은 배들의 후미에서 공격을 독려하는 모선의 갑판에서 울리고 있었다.
그 배는 <해루사>의 검은 수귀들을 공격하는 작은 배들의 지휘소 같았다.
그 배의의 크기는 해루사의 모선과 비슷했다.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나타내는 그 어떤 표식도 없는 작은 배들에는 한 척당 열 명 남짓 타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척의 작은 배를 지휘, 독려하는 모선은 <해루사>의 검은 해적선보다는 크기가 다소 작았으나 그 움직임은 해적선보다 훨씬 더 민첩했다.
<해루사>의 모선이 풍랑과 파도가 거센 바다에서의 싸움에 적합한 배라면.
<해루사>를 공격하는 다소 작은 저 배는 물살이 빠른 강에 최적화된 배 같았다.
여러 척의 작은 배들은 <해루사>의 모선을 소용돌이처럼 빙빙 돌면서 쉼 없이 불화살을 쏘아대고 작살과 창을 던지고 있었다.
그런 방식의 싸움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해루사>의 해적들 중 일부는 급기야 작은 배가 쏘아대는 화살 공격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작은 배로 뛰어내렸다.
해루사 해적들 검법은 대단히 매섭고 잔인했다.
화려함을 배제하고 극도의 간결함을 추구하는 그들의 검초는 중원의 무학이 아니라 동영의 무예에 더 가까웠다.
금세 싸움의 양상이 뒤바뀌었다.
작은 배에서 쏘아지는 화살의 숫자도 급격히 줄어들었고 여기저기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해루사>해적들의 무공 수위가 작은 배에 탄 사람들보다 다소 높은 것 같았다.
청운은 수면을 박차고 튀어 올라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작은 배의 갑판에 내려섰다.
청운은 지금까지의 곤경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던 참이라 앞뒤 가리지 않고 살초를 전개했다.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검은 수귀들부터 모조리 도륙했다.
어느 순간부터 청운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를 죽이는 것에 더 이상 인간적 연민과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강호에 나온 이후 손속에 인정을 두었다가 오히려 역공을 당해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던 경험 때문이었다.
청운의 강맹한 검기에 휩쓸린 수귀들은 작살을 맞은 물고기처럼 쓰러졌다.
그들은 청운의 엄청난 무위에 공포에 질린 채 주춤주춤 뒤로 물러날 뿐 이렇다 할 반격도 하지 못한 채 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아예 청운을 공격할 엄두가 나지 않는 듯했다.
물속에서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청운은 주변의 배들을 물새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해루사>의 수귀들을 참살했다.
과거의 청운이라면 그들이 아무리 악한일지라도 절대로 함부로 살육하지는 않았다.
여태껏 청운은 무엇보다도 사람의 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모든 목숨이 하나의 유일무이한 소우주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한 사람이 죽으면 하나의 우주가 영원히 소멸된다는 생각에도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청운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악에 물들어 도저히 개선의 여지가 없고 사람의 목숨을 파리 죽이듯 하는 자들을 극도로 혐오하게 되었다.
목불인견의 죄를 저지르면서도 그 어떤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인간 백정 같은 자들에게까지 무한정 관대할 필요가 없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그런 자들 때문에 더 많은 무고한 목숨이 희생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거기다가 어느 정도 무림의 생리를 알고 난 후부터 청운은 손속에 사정을 둘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철저하게 구분했다.
바로 그때, 청운은 자신의 아주 가까운 등 뒤에서 중후하고 둔중한 북소리가 넘실거리는 수면 위로 커다란 파문처럼 울려 퍼지는 것을 들었다.
청운이 뒤를 돌아보자 높다란 돛에 귀기가 흐르는 듯이 붉은 깃발을 매단 배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