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화 다 내 팔자소관 아니겠나.
그 배는 해루사의 해적선보다 더 훨씬 더 컸다.
그 배의 붉은 깃발에는 귀기가 흐르는 듯한 귀면상이 황금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 배가 전장 속으로 미끄러지듯 다가오고 있었다.
갑판 맨 앞쪽에는 적의의 장포를 걸친 기골이 장대한 중년인이 삼지창 비슷한 걸 꼬나쥐고 서 있었다.
검은 수염이 성성한 그 중년인은 해루사의 해적선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그의 공력이 얼마나 높은지 소리를 지를 때마다 배 주변의 강물이 파도를 치듯 일렁거렸다.
“단칼에 쳐죽일 바다의 수귀놈들. 바닷물이 강물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 강호의 법이거늘, 뭐 얻어 처먹을 게 있다고 이 귀수하백이 있는 장강까지 기어들어 왔느냐. 내 오늘 네 놈들 모두를 장강의 물고기 밥으로 수장시켜주마.”
그러자 해적선의 갑판 한쪽이 열리더니 열댓 명의 사내들이 거의 동시에 선상에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왼쪽 가슴에는 <해루사>의 배에 매단 깃발과 똑같은 그림이 수놓아져 있었다.
배 이물 맨 앞에 선 자가 한창 격전을 치르고 있는 수귀들에게 뒤로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작은 배 곳곳에서 칼부림을 하던 수귀들이 일제히 해적선으로 되돌아갔다.
수귀들이 모두 승선하자 해적선은 재빨리 배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수귀들에게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던 사내가 소리쳤다.
“귀수하백, 오늘은 내가 바빠서 그냥 가지만 다음에 반드시 이 빚을 몇 배로 갚아주마.”
귀수하백은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는 <해루사>의 해적들을 굳이 추격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 두 세력은 서로 목숨을 걸고 맞부딪치면 서로가 장담할 수 없는 상대였다.
엄격하게 따진다면 바다에서는 <해루사>가, 강에서는 귀수하백이 조금 더 유리할 것이다.
하지만 둘은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굳이 목숨을 걸고 양패구상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해루사>와 귀수하백은 서로 엄포만 놓고서 서로를 대충 눈을 감아 준 것이다.
바다의 <해루사>와 장강의 귀수하백은 실상 서로 적대적 공존의 관계였다.
서로의 영역을 노골적으로 침범하지만 않는다면 굳이 싸울 필요가 없었다.
하나는 바다에서, 다른 하나는 장강에서 큰소리치며 먹고 살면 그만이었다.
* * *
장강 귀수하백의 수채는 요새 중의 요새에 위치하고 있었다.
수채로 가는 물길 양쪽에는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까마득히 치솟은 절벽이 마주하고 있었다.
그 협곡 사이 거센 물살이 용오름처럼 소용돌이치는 곳이 바로 귀수였다.
바람이 심한 날 그 협곡에서 귀신의 귀곡성 같은 소름 돋는 소리가 난다하여 사람들로부터 귀수라 불려졌다.
그리고 바로 그 귀곡성으로 인해 ‘귀수하백’의 별호인 ‘귀수’가 유래했다.
수채는 절벽이 병풍처럼 마주하고 있는 가파른 협곡 사이를 지나서 있었다.
태고 적부터 절벽을 휘돌아 나가는 거센 물살에 깎이고 깎여 수십여 장 절벽 안쪽으로 움푹하게 파인 곳으로 배가 들어서자 물새의 둥지 같은 수채가 나타났다.
마치 거짓말 같았다.
그곳의 물살은 협곡 사이의 물살과는 천양지차였다.
마치 커다란 항아리 속 같은 그곳의 물살은 병아리 깃털처럼 잔잔했다.
게다가 수채는 위에서 사다리를 내려주지 않으면 아무리 무공이 고강해도 쉽사리 올라갈 수 없는 절벽의 한가운데 널찍한 바위 위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한마디로 수채는 천험의 요새였다.
수채에서는 협곡을 지나가는 배를 모두 조망할 수 있었지만, 협곡을 지나는 배에서는 그곳에 수채가 있는지 없는지도 전혀 알 수가 없는 천혜의 위치였다.
수채의 가장 큰 건물인 본채의 대전에는 지금 한바탕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커다란 탁자들이 수십여 개 맞대어져 있고 그 위에는 장강에서 잡은 온갖 산해진미들이 술과 함께 놓여 있었다.
음식을 만들고 나르는 여자와 아이까지 포함하면 족히 수백이 될 것 같았다.
상석의 탁자에는 덩치가 산 같고 검은 수염이 성성한 사십 대 중반의 얼굴이 붉은 사내와 단단한 근육질의 몸에 눈빛이 깊어 마치 장강의 강심을 보는 것 같은 분위를 풍기는 젊은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 둘은 귀수하백과 청운이다.
귀수하백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대전에 시립한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오늘은 너무나 기쁜 날이다. 장강을 침범한 <해루사> 놈들을 여러분의 용맹과 결기로 단번에 물리쳤다. 게다가 지금 바로 내 옆에 있는 무위검 아우를 만난 날이기도 하다. 오늘은 음식과 술을 아끼지 말고 마음껏 즐기고 마셔라.”
“네!”
“이렇게 기쁜 날 취하지 않으면 언제 우리가 또 취해 볼 수 있겠는가. 내 형제들이여! 오늘은 모든 근심 걱정을 장강의 물살에 던져 버리고 마음껏 지금을 즐겨라. 형제끼리의 다툼과 살인만 아니라면 오늘 모든 걸 용서하겠다. 자 잔을 들어라! 장강의 형제여!”
귀수하백은 대전에 있는 부하들에게 세 번의 건배를 제안했다.
그리고는 청운을 데리고 자신의 밀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의 탁자에도 이미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도 남을 푸짐한 산해진미와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귀수하백은 만면에 희색을 띠며 청운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청운이 먼저 잔을 올리겠다고 사양했지만, 하백은 청운이 손님이고 자신이 주인이기에 고집을 부리며 청운이 먼저 술을 받을 것을 강권했다.
청운은 몇 번을 극구 사양했다.
하지만 하백의 강권을 못 이기고 결국 하백이 따라주는 잔을 먼저 받았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귀수하백은 그 덩치만큼이나 통도 큰 사람이었다.
청운은 자신의 잔을 단숨에 비운 후 하백에게 술잔을 건넸다.
하백은 청운을 아예 아우로 생각한 듯이 한 손으로 청운의 술잔을 받으며 말했다.
“얼마 전에 혈불 큰형님과 귀왕 형님을 이곳 수채에서 뵈었지. 그때 혈불 큰형님이 자네에 대해 귀가 따갑도록 칭찬을 하시더군. 젊디젊은 나이에 엄청난 인품과 무공 둘 다를 다 갖췄다고 칭찬을 하시더군.”
“아닙니다. 혈불 노형님의 칭찬은 그냥 저를 잘 보신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닐세, 특히 생전 처음 보는 아우의 독특한 무공이 정말 대단하다 하시더군. 내공에서는 자신이 조금 우위인 것 같았지만 자네가 장기인 칼을 뽑아 들었다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고 하시더군. 그리고 지금까지 강대한 후기지수 중에선 아마 최고가 아닐까 하시더군. 나는 사실 그때는 그 말을 전혀 믿지 않았네.”
“…….”
“강호엔 구대문파를 비롯해 오대세가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흑도와 사도에 무수한 기인이사들이 있고, 문파마다 엄청난 독문 절기를 갈고 닦은 인재들이 즐비하고, 기인이사들의 의발전인들이 장강의 모래만큼이나 많은데,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새파란 젊은이의 무공이 그토록 강하다고 상찬하는 혈불 큰형님의 말을 나는 도저히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네.”
하백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나는 그때 혈불 큰형님의 자네에 대한 칭찬을 그냥 자네가 너무 마음에 들어 과장한 것이라 생각을 했었다네. 그런데 오늘 해루사의 수귀들과 싸우는 아우의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는 혈불 형님의 말씀이 오히려 자네를 과소평가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네.”
“감사합니다.”
“대단하네. 정말 대단해. 그리고 혈불 형님의 아우는 무조건 내 아우이기도 하다네. 그래도 되지. 아우님. 자 한잔 더 받게. 오늘 대취해 보세.”
“저도 오늘 또 한 분의 대단한 형님을 모시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앞으로 미숙한 저를 잘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귀수하백이 비록 혈불인마보다 나이가 좀 어리기는 하지만, 실제 나이로 보나 강호에서의 명성으로 보나 청운에게는 까마득한 무림의 선배였다.
그랬기에 청운은 하백에게 깍듯이 예의를 다 갖춰서 대했다.
청운이 예의를 차릴수록 하백은 그게 오히려 더 불편하다고 편하게 대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리고 청운 앞에 얇은 책자 하나를 내놓으며 말했다.
“이건 물에서 아주 유용한 기초적인 심법과 물을 이용해 펼칠 수 있는 몇 가지 신법과 초식이 기술된 비급이라네. 자네 정도의 무공 수위라면 단 며칠 만에 간단히 배울 수 있는 것들이네. 이틀 후 천산 쪽으로 가는 배가 이 협곡을 지나간다는 보고를 받았네.”
“네, 그렇습니다.”
“그럼 그때까지 이 책자에 있는 내용을 다 암기하게. 전혀 부담 갖지 말고 받게. 이건 내가 아우를 만난 기념으로 주는 선물일세. 자네가 하려는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네.”
청운이 아무리 받지 않겠다고 사양을 했지만, 하백은 막무가내로 청운의 품속에 비급을 집어넣어 버렸다.
청운은 빨리 외우고는 되돌려 줄 생각으로 책을 받으며 말했다.
“처음 보는 저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시니 앞으로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최대한 빨리 익히고 돌려드리겠습니다.”
하백은 청운이 자신이 건네는 비급을 받자 호탕하게 껄껄 웃으며 청운에게 또 술잔을 내밀었다.
그 술잔은 더 이상 청운이 자신에게 미안해할 필요도 인사도 할 필요가 없다는 하백의 진심이 담긴 마음이었다.
그렇게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하백이 한순간 청운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르게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우, 자네가 하려는 일은 정말 힘든 일 같네. 적은 안개 속에 가려져 지금까지 명확한 실체도 파악할 수 없으니…….”
“각오는 되었습니다.”
“천산행만 해도 그렇네. 거리가 멀고, 길이 험한 건 아우 정도의 무위라면 아무 문제가 될 것 없겠지. 하지만 문제는 아우가 그들의 전력과 본령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들과 맞서야 한다는 것이네.”
“…….”
“그들은 자네를 속속들이 안다는 점일세. 부디 그 점을 조심해야 하네.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나에게 부탁하게. 그리고 나도 부탁이 하나 있다네.”
하백은 마치 가슴속 깊은 갈증을 식히기라도 하듯이 연거푸 술을 서너 잔이나 더 마셔댔다.
잠시 후, 하백은 까마득한 과거를 회상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백의 기나긴 이야기는 그것을 듣는 청운의 가슴을 싸하고 아리게 만들었다.
“아우, 아마 내가 아우님보다 서너 살 많았을 때인 것 같네. 그때 아버님이 깊은 병에 들어 용한 의원에게 물으니, 그 병은 아버님이 평생 숯 굽는 일을 해서 오장에 화기가 치밀어 생긴 것이기에 병을 치료하려면 설산에서만 나는 몇 가지 약초를 구해야 한다고 했네.”
“약초 말이십니까?”
“맞네, 나는 약초를 구하려고 설산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천길 절벽에서 떨어졌다네. 깨어나니 전부 얼음으로 만들어진 방에 내가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네.”
하백은 그때를 회상하며 말을 이어 갔다.
“그 얼음으로 만들어진 방은 설산 유라궁의 의방이었고 그 방의 한가운데에 빙혼대라는 신외지물이 있었다네. 빙혼대는 심장만 뛰고 있다면, 육신을 떠나려는 혼을 백일 동안 붙잡아 둔 채 상처를 치료하는 기물이네.”
“…….”
“나는 깊이를 잴 수 없는 까마득한 절벽에서 추락하여 거의 석 달이나 의식도 없는 혼수상태에 빠졌다네. 다행히 잠시 궁 밖으로 외출을 나온 유라궁의 한 궁도에게 발견되어 유라궁의 지보인 빙혼대의 효험으로 간신히 다시 살아났다네.”
“그렇군요.”
“그러다 나는 그곳에서 나를 지극정성으로 돌봐 준 아가씨와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네. 그녀는 마치 인세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예뻤다네. 중원의 미녀와는 달리 눈처럼 하얀 피부와 하늘같은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네.”
“네.”
“아버지와 함께 산중에서만 평생 살아서 여자라고는 전혀 몰랐던 나는 그런 예쁜 그녀를 보자마자 불같이 나를 태우고 말았다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지. 그녀 또한 여자들밖에 없는 궁에서 태어나 한 번도 남자라는 이성을 모른 채 살다가 나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버렸지.”
그는 말을 이어 갔다.
“그녀는 설산 유라궁 궁주의 딸이었지. 유라궁은 대대로 여자들로만 유지되는 문파로 남자들은 절대로 그곳에서 살 수가 없다네. 나는 그녀가 내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고도 그곳에서 쫓겨나올 수밖에 없었지. 그 후 몇 번을 더 찾아 갔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네.”
“…….”
“천산은 설산과 그리 멀지 않으니 혹시라도 자네가 그곳에 가서 그녀를 우연히 조우하기라도 한다면, 내 안부라도 전해 주었으면 하네. 그것이 내 부탁일세. 내가 다시 그녀를 뭐 어찌해 보겠다는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네.”
“알겠습니다.”
“단지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소식이라도 전해 주고 싶네. 그녀의 이름은 사라진하일세. 하백은 청운에게 서찰까지 한 장 써주었다.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지는 말게. 그것도 다 내 팔자소관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