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38화 (38/184)

038화 켜켜이 낀 녹을 닦아 내자.

청운은 사실 별 기대도 없이 물었다.

한데 점소이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오늘은 조용합니다만, 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무림인들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검과 도 그리고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무기를 소지한 무림인들이 한꺼번에 개점에 들이닥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요.”

청운은 뭔가 실낱같은 단서를 찾은 것 같은 느낌과 어떤 기대감에 들떠서 다시 한 번 자세하게 물었다.

“혹시 그들이 어디로 간다는 소리는 못 들었습니까. 아니면 그들이 간 방향이라도 아시오.”

점소이는 뜸도 들이지 않고 즉시 대답했다.

“모두들 천을령 쪽으로 갔습니다요.”

“천을령은 어디로 갑니까.”

청운이 재차 묻자 점소이가 즉시 대답했다.

“천을령은 우리 객점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삼십여 리쯤 가면 어른이 양팔로도 다 안을 수 없는 수백 년 된 커다란 노송 세 그루가 있습니다. 그 노송을 왼쪽으로 끼고 돌면 바로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이 워낙 험해서 약초꾼과 사냥꾼들도 그 길로 잘 다니지 않습니다.”

청운은 내일 아침을 먹자마자 그곳으로 한 번 가 보기로 생각했다.

그리고 점소이에게 은자 한 냥을 더 주면서 혹시라도 누가 묻더라도 절대로 자신이 이런 사실을 물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점소이는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다가 청운이 내미는 돈을 보고는 금세 머리를 허리까지 조아리면서 절대로 어떤 말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청운은 비스듬한 자세로 침대에 기대어 조금 전 암전에서 산 철함을 꺼냈다.

그리고는 헝겊에 녹 닦는 약을 듬뿍 묻힌 후 철함의 녹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서너 번에 걸쳐 켜켜이 낀 녹을 닦아 내자 철함에 새겨진 글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고대 범어였다.

[三災球]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삼재를 막는 구라.

이건 또 뭔가 싶어 청운은 내공을 살짝 운용해 철함의 뚜껑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철함은 워낙에 녹이 심해 철함의 뚜껑이 아예 본체에 붙어 있었다.

이건 숫제 뚜껑을 여는 것이 아니라 아예 뚜껑을 통째로 뜯어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뚜껑을 열 때 떨어진 녹이 침대보에 수북했다.

침대보는 어차피 점소이에게 다시 갈아 달라고 하면 될 터였다.

청운은 녹이 수북한 침대보를 둘둘 말아 방의 한쪽 구석에 휙 던져 버렸다.

철함 안에는 묵빛의 시커먼 철구 세 개가 들어 있었다.

철구는 한 손으로 다 쥐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크기였다.

재질은 쇠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손으로 들어보니 쇠보다 훨씬 무거웠다.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했다.

철구에는 녹은 아니었지만, 녹 비슷한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껴 있었다.

청운은 헝겊에 녹 닦는 약을 듬뿍 묻혀 철구를 닦았다.

닦을수록 구슬은 더 선명하고도 투명한 묵빛을 발했다.

청운이 구슬을 들어 불빛에 비춰보자 구슬마다 다른 순서의 십이지신상이 그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십이지신상은 철구의 겉면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마치 철구 속에서 표면으로 올라온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철구에 그런 그림을 그려 넣었는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몇 번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청운은 도저히 그 철구의 용도를 알 수 없었다.

철구의 용도를 천천히 알아보기로 작정한 청운은 철함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이번에는 황노야의 서재에서 얻은 [다라XXX]를 꺼내어 살펴보았다.

청운은 천성적으로 호기심이 완성한 사람이었다.

궁금한 건 반드시 해결해야 잠이 오는 체질이었다.

책과 글에 관해서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청운은 몇 번이나 찬찬히 책을 다시 살펴보았다.

청운은 오늘따라 유난히 달이 밝았다.

청운은 자신의 투명한 얼굴을 한없이 창에 투영하는 보름달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 다시 [다라XXX]를 살펴보기를 반복했다.

혼잣말로 달, 달, 보름달 하며 중얼거리던 청운이 불현듯 번갯불처럼 머리를 번쩍 스치는 어떤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청운은 자신의 무릎을 탁 쳤다.

‘맞다! 맞어! 달.’

실제 달은 아무 관계가 없다.

실제 달에 달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그렇게 부르자고 사람끼리 약속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 글자 또한 글자의 의미와 상관없이 범어의 음만 차용하여 쓴 것이 틀림없다.

청운은 다시 첫 장부터 [다라XXX]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바로 그거였다.

그랬다.

이 글자는 음 그 자체가 의미가 되는 방식이었다.

책의 제목은 [다라패엽경]이었다.

청운은 뛸 듯이 기뻤다.

도저히 풀 수 없는 어떤 난해한 문제를 해결했다는 흥분감에 휩싸였다.

청운은 내친김에 아예 [다라패엽경]을 첫 장부터 독파하기 시작했다.

[다라패엽경]은 한편으로는 불교의 경전과 유사한 것 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와 별반 관련성이 없는 종류의 서책 같기도 했다.

이 책은 육체를 극강으로 벼리는 방법을 기술하고 있었다.

무서와 의서와는 전혀 다르게 육체를 오로지 종교적 목적으로 단련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저자의 일반적인 무서와 의서가 먼저 강한 육체를 만든 후 그 그릇에 강인한 정신력을 다는 방식을 취한다면.

[다라패엽경]은 오로지 강인한 정신력을 담기 위한 그릇으로 육체를 벼리는 방식이었다.

그 둘의 차이는 얼핏 비슷해 보여도 전혀 달랐다.

일반적 무서와 의서로 단련된 몸에는 굳이 육체의 모든 혈과 맥에 정신의 힘을 담을 필요도,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반면에 [다라패엽경]은 육체의 모든 혈과 맥, 심지어 세맥까지 정신의 힘을 온전하게 담지 못하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진 서책이었다.

[다라패엽경] 완전한 무서도 완전한 경전도 아니었다.

온전한 무서라고 하기에는 일반적인 무의 원리와 상이했고, 온전한 불교의 경전이라 하기에는 불성에 관한 기술이 거의 없었다.

일반적인 불교의 경전이 주로 인간의 번뇌와 분별을 멸하고 깨우쳐 스스로 부처가 되는 길을 찾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다라패엽경]은 깨달음보다는 오히려 육체의 맥과 혈을 벼리는 과정에서 다른 깨우침에 이르는 길을 일러주고 있었다.

책은 경전 같기도 하고 무공비급 같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경전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경전 같았고, 무공비급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비급 같았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대단히 귀한 책임은 틀림이 없었다.

청운은 자신이 [다라패엽경]을 이해한 게 너무 기쁜 나머지 책을 공중으로 던졌다.

책이 펄럭거리며 거의 천장까지 닿았다 떨어졌다.

그 순간 거의 반이나 아무 글자도 없이 빈 여백으로 채워져 있던 책자의 후반부에서 청운은 뭔가를 언뜻 본 것 같았다.

다시 책자의 후반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역시 아무 글자도 그림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다시 청운이 책자를 공중으로 던졌다.

또 뭔가가 얼핏 보였다.

청운은 책자를 천장으로 던졌다 살펴보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분명 던질 때는 보였던 그림 같은 것이 앉아서 자세히 살펴보면 아무것도 없었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청운은 지친 나머지 책을 펼친 채로 침대에 던져 버리고는 객점에서 먹다가 남겨 온 술병을 집어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소매로 입술을 닦으며 침대 쪽을 보자 아무것도 없던 책자의 후반부 빈 여백에 그림이 빼곡한 걸 발견했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청운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 창 너머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 한가운데에 쟁반보다 더 큰 둥근 보름달이 환하게 떠 있었다.

달무리 하나 없는 밝은 달빛이 객점의 창을 통해 비치고 있었다.

책자는 그 달빛을 정면으로 받고 있었다.

청운은 한순간 자신도 모르게 아! 하는 감탄사를 연이어 내뱉었다.

그랬다.

달빛이었다.

비밀은 달빛에 있었다.

달빛이 가장 밝게 비치는 창가로 [다라패엽경]의 후반부를 한 장 한 장 비춰보았다.

확실했다.

드디어 [다라패엽경]의 비밀이 풀렸다.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있단 말인가?

오로지 보름 달빛에만 나타나는 그림과 글자라니.

청운은 자신이 결국 [다라패엽경]의 비밀을 풀었다는 희열감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각 장마다 인체를 그린 그림과 도해와 설명이 빼곡했다.

그 인체의 도해 위에는 무수한 수레바퀴 같은 둥근 선이 가득 이어져 있었다.

끊어질 듯 이어진 선들이 도해 위에 거미줄처럼 빼곡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모든 선이 조금씩 다르게 서로 이어져 있었다.

어떤 선은 더 굵고 또 어떤 선은 가늘었다.

그 선들은 인체의 맥과 혈을 갖가지 방식으로 이어 놓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다라패엽경]의 앞부분에 기술된 글은 뒷부분의 도해를 이해시키기 위한 설명이었다.

그러니까 [다라패엽경]은 인체의 맥과 혈을 극한으로 단련하는 경전이었다.

다르게 해석하면 인간의 정신력을 오롯이 육체에 담지하기 위한 무공비급기도 했다.

[다라패엽경]은 인체의 가장 근본적인 힘을 기르는 방법을 기술한 책자였다.

[다라패엽경]을 잘 이해하면 그동안 자신이 풀 수 없었던 숙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도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수중동굴에서 구무자의 [구천무록]을 통해 무공의 기초적 원리를 이해하고, 치우천결을 심법으로 활용하는 검법을 스스로 창안했다.

그리고 나름의 성취를 이루어 어느 정도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높은 성취는 마치 철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전혀 진전이 없었다.

강호행에서 맞닥뜨린 수십 차례의 대적에서 청운은 몇 차례 죽음 직전까지 몰리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

특히 하오문 비선인 삼호의 조력이 없었다면 자신은 아마 지금 이곳에 없을 것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거의 죽음까지 내몰린 싸움 대부분이 물론 정상적인 무공 대결은 아니었다.

하지만 암계와 귀계가 횡횡하는 강호에 정상 대결 운운하는 것은 그 자체로 언어도단에 불과하다.

그 어떤 악독한 수단에도 불구하고 강호에선 적을 제압하고 이기는 것이야말로 유일하게 정상인 것이다.

나머지는 다 비정상이다.

강호에선 이기는 것 말고 그 어떤 선(善)도 없다.

최종적으로 유일하게 자신이 살아남는 것.

그것 말고 어떤 善도 위선일 뿐이다.

어떤 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야 한다.

강호에선 그것만이 유일무이한 정의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모든 일이 자신의 무공 수위와 관련이 있었다.

자신이 완전히 적을 압도했다면 목숨이 경각에 달하는 위급한 사태는 아예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

자신이 앞으로 하려고 하는 일은 그리고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은 지금까지 겪었던 위험은 조족지혈에 불과할 것이다.

대파산의 수중동굴에서 대붕의 체액을 먹고 생사현관이 타통되어, 내공도 그렇게 부족하지 않았고.

그동안의 숱한 실전 경험을 통해 초식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많은 깨우침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운은 자신이 창안한 마지막 두 초식인 멸환과 멸환겁을 전혀 펼칠 수가 없었다.

펼치려고 하면 온몸의 맥과 혈에 극심한 통증이 동반되고 혈관과 근육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하나의 초식을 따로따로 전개하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하나 이상의 초식을 연환해 다른 새로운 초식으로 전개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하나의 초식이 다른 초식과 연동되어 새로운 초식이 된다면 그 자체로 수많은 새로운 초식을 창안하는 것이나 진배없는 일이다.

청운은 [다라패엽경]의 후반부에 빼곡하게 그려진 도해를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마지막 숙제를 해결할 비책을 찾고자 했다.

[다라패엽경]의 단련법은 ‘전륜공’이라고 명명되어 있었다.

청운은 달빛 아래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다라패엽경]의 도해를 따라 치우천결을 천천히 운용해 보았다.

청운은 전륜공으로 혈과 맥에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새롭게 개통된 길에 치우천결로 일으킨 진기를 밀어 넣었다.

치우천결의 진기가 천륜공으로 새롭게 뚫은 혈과 맥을 지날 때마다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극심한 통증이 유발되었다.

치우천결의 강맹한 진기가 새롭게 뚫린 혈과 맥을 자극할 때마다 온몸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저릿저릿했다.

그것은 마치 끝이 뾰족한 정으로 돌에 구멍을 뚫는 것같이 더디고 힘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