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화 운명의 메아리는 다시 내 이름을 부르고 (2)
그녀는 청운이 깨어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려왔다는 듯이 청운이 눈을 뜨자마자 오랫동안 자신의 가슴속에 묻어두기만 한 채 한 번도 속 시원하게 물어보지 못했던 수많은 질문을 한꺼번에 청운에게 퍼부어댔다.
한참을 그렇게 혼자 호들갑을 떨어대던 그녀는 청운의 상태가 뭔가 좀 이상하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아무런 대답도 없이 오히려 자신의 얼굴만을 멀뚱히 쳐다보는 청운의 눈빛에서 그녀는 청운의 상태가 많이 이상하다는 걸 직감했다.
결정적으로 청운이 자신의 이름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는 청운의 상태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그녀는 확신했다.
그의 상태가 아무리 심각해도 엄마인 궁주에게는 사실대로 보고는 해야 할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천장에 늘어뜨려진 푸른색 매듭을 두어 번 아래로 힘껏 잡아당겼다.
잠시 후 열대여섯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 하나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가 소녀를 보고 말했다.
“빙아야, 이분이 입을 옷가지를 좀 챙겨오너라. 그리고 궁주님에게 이분이 깨어났다고 아뢰어라.”
“네.”
“아, 아니다. 내가 직접 가서 보고할 테니 너는 이분이 옷을 다 입으면 접견당으로 곧바로 모시고 오너라.”
그녀는 말을 끝마치자마자 곧장 궁주의 내실로 달려갔다.
“엄마, 그분이 깨어났어요. 방금 막 깨어났어요. 곧 빙아가 그분을 접견당으로 모시고 올 거예요. 같이 가요.”
딸의 외침에 화들짝 놀란 얼굴로 문밖을 나온 궁주가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이냐, 안 그래도 그분이 너무 오래 깨어나지 못해 걱정을 많이 했는데 정말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야. 그래, 나와 같이 접견당으로 가자.”
“네!”
“그리고 유리야, 공적인 자리와 업무에서는 나를 엄마라 부르지 말고 궁주라고 부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제발 조심 좀 하거라. 장로원 노친네들이 알면 너를 잘못 가르쳤다고 또 나를 나무라신다.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아들었지.”
유라궁의 접견당은 하얀 대리석을 얼음처럼 깎아 만든 아름다운 방이다.
바닥에는 초화문 무늬가 빽빽한 붉은 양탄자가 빈틈없이 깔려 있고, 벽에는 갖가지 짐승 모양을 본떠 만든 화려한 등잔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등잔에 불을 밝히자 투명한 대리석 벽 곳곳을 은은히 비추는 불빛이 하얀 대리석의 무늬와 조화를 이뤄 묘한 신비감까지 자아냈다.
설표의 가죽을 멋들어지게 덧씌운 중앙의 탁자에 호남형의 젊은 사내가 한 명 앉아 있다.
그 옆에는 앳된 소녀가 다소곳하게 서서 찻물을 따르고 있다.
젊은 사내는 청운이고 옆에서 차를 따르는 소녀는 빙아다.
접견실의 문이 열리자, 우아한 미모의 한 중년부인과 나이를 제외하고는 그 중년부인을 그대로 쏙 빼닮은 아가씨가 함께 들어섰다.
중년부인이 먼저 상석에 앉자 젊은 아가씨도 바로 옆에 따라 앉았다.
중년부인이 청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연신 질문을 한다.
“공자, 어떻게 하다 망혼단애에서 떨어졌지요. 공자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장강 귀수하백의 서찰은 또 어떻게 지니게 되었나요?”
숨 돌릴 틈도 없이 마구 쏟아내는 중년 미부의 질문 공세를 받은 청운은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며 눈만 껌벅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청운의 눈빛이 그 어떤 의미도 담겨 있지 않은 텅 빈 허공 같았다.
청운의 그런 눈빛에 오히려 당황하고 혼란을 겪은 사람은 바로 청운이 아니라 청운에게 질문을 한 중년 미부였다.
그녀는 무척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바로 그 순간 청운이 그녀를 흘끔 바라보며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횡설수설 지껄였다.
“나는 도대체 누구지요.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를 가던 중이었나요. 여기가 어디고, 왜 내가 여기 있지요. 그리고 내가 누구지요. 당신은 또 누구신가요. 나는 서찰이 뭔지 몰라요.”
“…….”
“서찰이 어떻게 생겼지요. 그건 맛있는가요. 하긴 배가 몹시 고프네요. 여기선 무슨 음식을 팔지요. 돈은 충분히 있으니 나에게 맛있는 걸 많이 주세요.”
청운의 말은 종잡을 수 없는 횡설수설로 일관했다.
그리고 그의 눈빛은 마치 짙은 운무 속을 헤매는 듯 몽롱하고 흐릿하다.
청운의 황당한 반응에 몹시 놀란 궁주와 유리는 서로의 얼굴만을 마주 쳐다보며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던 궁주가 청운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공자, 망혼단애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잠시 기억을 잃었나 봅니다. 이십 년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지요. 이곳에서 편히 지내시다 보면 곧 기억이 돌아오실 겁니다. 이십 년 전에도 그랬으니까요.”
“…….”
“공자께서 정신이 맑아지면 다시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군요. 빙아야 ,이분을 접객당의 가장 좋은 별실로 모시고 밤낮으로 세심히 보살펴드려라. 공자, 그때 다시 뵙시다.”
궁주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접견당을 떠나자 유리는 청운의 옆에 좀 더 바짝 붙어서는 청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공자님, 내가 지극정성으로 보살펴드리면 금세 회복하실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공자님의 기억을 되찾도록 하겠어요. 공자님은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데 모든 힘을 기울이시면 됩니다.”
* * *
이십 대 초반의 준수한 한 청년이 아침부터 점심때가 가까워진 시간까지 줄곧 눈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다.
아무리 자세히 바라봐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하얀색 옆에 또 하얀색, 하얀색 위에 또 하얀색밖에 없는 창밖을 청년은 전혀 지겹지도 않다는 듯 줄기차게 바라보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설경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 설원에 어떤 미세한 변화조차 없는 지루한 풍경을 청운은 몇 날 며칠 계속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자세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접객당에 입실하고 나서부터 청운은 아침에 눈을 뜨기만 하면 저녁에 눈을 감을 때까지 계속해서 창밖만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렇게 창밖을 바라보는 것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할 일인 것처럼 청운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예 자신의 두 눈을 창에 붙여 버렸다.
청운이 또다시 그렇게 멍하니 창밖만을 바로 보고 있던 어느 순간.
살며시 방문이 열리며 양손에 점심상을 받쳐 든 절색의 여인이 살포시 들어섰다.
그녀는 바로 유라궁주의 딸 사라유리다.
그녀는 청운이 접객당에 든 이후로 궁주가 극구 제지하는데도 불구하고 청운의 삼시세끼를 직접 챙기고 있다.
정성도 그런 지극정성이 없다.
상을 탁자에 조용히 내려놓은 그녀가 청운의 소매를 살며시 잡아당겨 그를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는 젓가락을 집어 청운의 오른손에 쥐여 주었다.
그녀는 청운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얼굴에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기다렸다.
청운이 그릇을 깨끗이 비우자 청운의 소매를 끌어 청운을 다시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청운의 상의를 떨리는 손으로 벗기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방법은 제가 이상한 여자라서 그런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때 공자께서 그 일 이후에 이렇게나마 깨어나셨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 번 시도해 보는 것뿐입니다. 어쨌든 나는 이미 당신의 여자이니까요.”
* * *
그녀가 자신의 옷매무새를 꼼꼼히 바로잡은 후 방을 나가자 청운은 또다시 창밖의 설원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바라보고 있었을까.
갑자기 유라궁 전체를 뒤흔드는 다급하고 요란한 종소리가 계속 울렸다.
귀청을 찢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시 몸을 움찔했던 청운이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무심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청운이 있는 방으로 다급히 빙영이 들어왔다.
얼굴에 온통 불안한 표정밖에 없는 빙영이 청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말했다.
“공자님,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절대로 이 방을 나오시면 안 됩니다. 절대로 나오지 마세요. 절대로! 이건 공주님이 신신당부하신 것입니다. 공자님, 제 말 잘 알아들었지요. 그럼 저는 이만 갑니다.”
빙영는 청운이 자신이 하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아닌지 확인하지도 않고 무슨 시급한 일이 있는지 곧바로 청운의 방을 나가버렸다.
오늘은 그동안 청운이 계속 보아 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창밖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짐승 가죽을 껴입은,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날이 뒤로 한껏 휘어진 기형의 도와 검을 든 수십 명의 사내들이 유라궁으로 이어지는 출렁다리를 흔들흔들 건너오고 있었다.
그자들이 막 출렁다리를 건너 유라궁 앞까지 왔을 때 궁주와 그녀의 딸 유리를 비롯한 수십 명의 유라궁 궁도들이 채찍과 검을 들고 그들을 가로막고 섰다.
맨 앞에선 유리가 사내들 무리를 향해 날카롭게 소리치고 있었다.
“이놈, 파륵미찰, 내가 그토록 알아듣기 좋은 말로 타일렀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이렇게 나를 찾아와 치근덕거리느냐 치근덕거리길. 나는 네가 전혀 마음에 없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혼쭐이 나기 전에 지금 당장 돌아가라.”
무리의 맨 앞줄에 선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옷과 모자를 쓴 체격이 건장하고 인상이 바위처럼 강인해 보이는 사내가 날이 뒤로 휘어진 커다란 검으로 땅을 꾹꾹 짚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사라유리, 네가 내 여자만 된다면 너희 모녀가 평생을 쓰고도 남을 재물과 보화를 유라궁에 주겠다. 나는 원래 통이 큰 사람이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마라성을 통째로 너에게 내어 줄 용의도 있다. 이젠 제발 고집을 꺾고 내 여자가 되어 평생 편하게 살아라.”
“미친놈, 마라성 따위는 나에게 아무런 가치도 의미가 없다. 너나 그 성에서 잘 먹고 잘살아라. 그리고 너는 이미 두 명의 여자와 결혼하지 않았느냐.”
“…….”
“나를 넘보지 말고 그녀들이나 잘 챙겨라. 달 없는 야밤에 도망가지 않도록. 그리고 어떻게 매번 우리가 설치한 진을 무용지물로 만드느냐.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절대 아닐 텐데.”
사라유리가 마치 징그러운 뱀을 보듯 파륵미찰을 혐오가 가득 담긴 눈빛으로 쳐다보며 경멸했다.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고개를 수십 번이나 세차게 가로저으며 진절머리를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파륵미찰은 유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가에 능글맞은 웃음을 있는 대로 흘리며 말했다.
“사라유리, 네가 뭘 잘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우리 마라성에서는 세 번째 부인이 최고로 좋은 자리다. 첫째 부인은 애들을 돌봐야 하고, 둘째 부인은 음식을 만들어야 하지만 셋째 부인은 아무런 집안일도 하지 않고 그냥 먹고 즐기는 자리다.”
“이런……!”
“우리 성의 여자들은 서로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해서 안달이다. 사라유리, 네가 마라성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그리고 네가 유리궁 주변에 설치한 진은 백날을 공들여도 모두 헛일이다. 마라성에는 진법만을 연구하는 전문가가 수십 명이 넘는다.”
“…….”
“그래서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내 집처럼 유라궁을 드나들 수 있다. 자 이번이 진짜 내 마지막 제안이다. 내 여자가 되겠느냐 말겠느냐. 거절하면 무력밖에 없다.”
“파륵미찰, 내가 몇 번을 더 말해야 알아듣겠느냐. 나는 네가 완전 밥맛이고 옴 붙은 재수덩어리다. 그게 진짜 내 마음이다. 이제 알아들었으면 썩 꺼져라. 그리고 다시는 유라궁에 발을 들여놓지 마라. 이번이 내 마지막 충고다.”
사라유라가 파륵미찰에게 얼음이 갈라진 틈새로 새어 나오는 것 같은 차가운 목소리로 표독스럽게 말하자 파륵미찰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네년이 결국 권주는 마다하고 벌주를 받는구나. 그렇다면 힘으로 네년을 마라성에 끌고 갈 수밖에. 얘들아! 저년을 사로잡아라. 절대 상처가 나서는 안 된다. 상처가 나면 보기도 안 좋을 뿐 아니라 내가 즐기는데도 방해가 된다.”
파륵미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무기를 빼든 사내들이 유라궁의 여인들을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유라궁 궁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들의 사나운 공세에 점차로 수세에 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