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화 한줄기 별빛을 본 것 같은
청운은 자신의 모든 내력과 기력이 한순간 소실되는 느낌과 함께 설표를 향해 마지막 초식을 전개하던 그 자세 그대로 밑도 끝도 없는 까마득한 빙하의 벼랑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청운의 몸은 마치 누가 아래를 향해 던진 돌처럼 파공성을 내며 계속 떨어져 내렸다.
맹렬하게 떨어지는 속도에 못 이겨 의식을 잃어가면서도 청운은 본능적으로 아니, 무의식적으로 치우전륜공의 구결을 읊조리고 있었다.
* * *
밤하늘에 무수하게 뜬 성좌와 그 성좌를 넘나드는 성운이 벌거벗은 청운의 몸을 빙빙 돌고 있었다.
청운이 손을 뻗어 성좌에 올라가려고 할 때마다 성좌는 궤도로 휙 바꿔 버렸다.
성좌를 막 올라타려다 갑자기 발이 미끄러진 청운은 까마득한 암흑의 공간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자황색의 성운이 떨어지는 청운의 몸을 솜처럼 떠받쳐 다시 성좌들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궤도로 청운을 밀어 올렸다.
성좌에서 청운이 떨어지면 성운이 떠받쳐 밀어 올리고, 또 다시 성좌에서 떨어지면 다시 자황색의 성운이 청운의 몸 떠받쳐 성좌의 궤도 위에 밀어 올리는 꿈을 청운은 끝없이 꾸었다.
* * *
청운은 몇 날 며칠 끝없이 반복되는 똑같은 꿈속을 헤매고 또 헤맸다.
얼마나 그렇게 꿈속을 헤맸을까.
청운은 전신에 말로는 차마 다 형언할 수 없는 극심한 통증을 온몸에 느끼며 지독한 꿈속에서 간신히 깨어났다.
꿈속을 벗어나자마자 청운은 자신의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았다.
청운은 자신이 지금 낯선 연못 한가운데 처박혀 있다는 걸 알았다.
그곳은 따뜻한 물이 샘솟는 연못이었다.
사방에 온통 얼음과 눈에 덮인 깎아지른 절벽뿐인 이런 곳에 따뜻한 샘이 솟아나는 연못이라니.
청운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너무나 생경한 나머지 한동안 정신이 어리벙벙하고 혼란스러웠다.
무엇보다 청운은 자신이 왜 이런 낯선 연못 속에 처박혀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자신이 천산의 천도봉에서 파황군이란 초고수의 천수혈녀라는 괴랄한 장력에 직격 당해 심한 내상을 입고 쫓기다 마지막에 모용후의 장력에 맞아 까마득한 절벽으로 떨어진 것을 간신히 기억해냈다.
청운은 자신이 끝 모를 절벽으로 떨어진 건 맞는데 그때 자신이 떨어진 절벽이 바로 이곳이 맞는지 의아했다.
더욱 이상한 것은 물에 비친 자신의 지금 행색이 그때와 전혀 다르다는 것이었다.
지금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은 그 당시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머리 모양 또한 자신이 노상 하고 다니던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청운은 평소에 흰색 영웅건으로 단정히 머리카락을 감싸고 다녔다.
하지만 수면에 비친 지금의 머리 모양은 누군가 정성스레 빗질해 깔끔하게 뒤로 묶은 모양새였다.
모든 것이 하나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그때와 똑같이 유일하게 이해되는 것은 지금 배가 몹시 고프다는 것이었다.
당장 굶어 죽지 않으려면 뭔가 먹을 것을 찾아 나서야 한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주변을 한번 둘러봐야겠다고 생각한 청운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다 그대로 푹 주저앉고 말았다.
몸을 움직이려고 시도하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극심한 통증이 확 밀려들었다.
손가락 하나조차 마음대로 꼼짝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청운이 치우전륜공으로 운기조식을 하려다가 자신도 모르게 이럴 수가! 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물속에 푹 꼬꾸라지고 말았다.
단전에서 세맥으로 이어지는 모든 맥과 혈이 꽉 막혀 극심한 통증만 유발될 뿐 한 줌의 내력도 불러일으킬 수가 없었다.
내공은커녕 손가락조차 꼼짝할 수 없었다.
청운은 깊은 절망감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청운은 이대로 어딘지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눈과 얼음뿐인 이 낯선 설산의 계곡에서 자신의 생을 마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자신의 지나간 삶이 너무나 짠해서 자신도 모르게 두 눈에 눈물이 찔끔 맺혔다.
청운은 자신의 타고난 운명이 여기까지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늘의 이치를 거스를 수 없는 한낱 인간일 뿐인 자신이 이런 지랄 같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청운은 자신의 운명을 이런 식으로 정해 버린 하늘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아니, 원통하고 억울했다.
홧김에 청운은 하늘이 자신을 끝장내기 전에 차라리 자신이 먼저 자신의 목숨을 끝장내 버리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청운은 이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절망에 코를 물에 박고 확 죽어버리겠다는 심정으로 자신의 머리를 물속에 깊이 처박았다.
물이라도 실컷 먹고 죽겠다는 생각으로 한껏 입을 벌렸다.
벌린 입속으로 갑자기 들어오는 물이 갑자기 기도로 넘어가는 바람에 청운은 캑, 캑 거리며 기침을 했다.
바로 그 순간, 청운의 눈에 뭔가 벌겋게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청운이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물속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연한 붉은색을 띤 물풀이었다.
그 물풀은 연못의 바닥에 지천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청운은 물풀의 색깔이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어차피 죽을 거면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란 생각에 자신의 오른발 발치에 있는 물풀을 한 움큼 뜯어 입으로 가져갔다.
청운은 그것이 차라리 독초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그 풀은 독초는 아닌 모양이었다.
첫맛은 조금 쌉쌀했으나 끝만은 달큰하면서도 화했다.
오히려 속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청운은 발밑의 연한 붉은 색을 띠는 물풀을 한 움큼 뜯어내 자세히 살펴보았다.
물풀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청운은 문득 어릴 적 아버지의 [약초집성방]이란 의서의 한 귀퉁이에서 읽었던 한 구절을 문득 기억해 냈다.
청운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갑자기 아—하! 하는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빙화초는 오직 설산의 한빙열천에서만 자란다. 그것은 워낙 세상의 절지에서 자라는 것이라 일반적인 약재로는 사용하고 싶어도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과거 누가 복용해 본 사람이 있었는지 고대의 의서를 통해서 그 효능만 전해지고 있다.
빙화초의 크기는 젓가락 정도의 길이이고 그 표면이 미끄러우면서도 돌기가 있다. 그 색깔은 연한 붉은색을 띤다. 효능은 내상을 치료하고 강한 충격으로 인해 끊어진 맥을 잇고 막힌 혈을 뚫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이것이 설마 빙화초!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이 연못은 한빙열천!
이곳이 진짜 한빙열천이고, 이 물풀이 빙화초라면 자신이 살아날 희망이 있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칠흑뿐인 밤 속에서 낯선 길을 가다 앞길을 밝히는 한 줄기 별빛을 본 것 같았다.
깊고 깊은 어두운 절망 속에서 한 가닥 희미한 희망을 붙잡은 느낌이었다.
그날로부터 청운은 빙화초를 밥 삼아 먹으며 끊어지고 막힌 맥과 혈을 뚫기 위해 치우전륜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운기를 한 기가 꽉 막힌 맥과 혈에 부닥칠 때마다 유발되는 극심한 통증 때문에 청운은 매일 거의 기절 직전의 상태에까지 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운은 종일 죽기 살기로 맥과 혈을 뚫는데 전심전력을 쏟아부었다.
운기를 할 때마다 전신의 혈관을 찢어발기는 듯한 지독한 통증에 청운은 몇 번이나 포기하고 이대로 죽는 것이 차라리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대로 죽는 것은 오히려 너무 쉬운 선택이라고 스스로의 생각을 거듭 부정하면서 청운은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청운은 자신이 삶을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남궁연봉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청운은 여태껏 살아오면서 인연을 맺었던 얼굴들이 눈에 밟혀 도저히 남은 삶을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
악착같이 이곳에서 생환하여 다시 한 번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고 바라는 삶을 살고 싶었다.
* * *
얼마의 날들이 지났을까.
이곳에 떨어진 날로부터 청운은 끝이 뾰족한 돌로 바위에 바를 정(正)자를 새겨 왔다.
正자가 거의 스무 개가 다 되어 갈 무렵, 청운은 간신히 꽉 막힌 맥과 혈을 뚫어내는데 겨우 성공을 했다.
그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다시 백여 일 정도가 더 지나자 자신이 지닌 대부분의 내공도 거의 회복했다.
오히려 한 번의 크나큰 좌절과 상실은 그동안 강한 것만이 최고의 무공이라고 생각했던 청운 자신의 잘못된 편견을 바로잡는 계기가 되었다.
청운은 구무자가 [구천무록]에서 누누이 강조한 무공의 근본에 대해 자신이 그동안 건성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다는 반성을 했다.
청운은 자신의 무공을 예전과 다르게 새롭게 인식했다.
새로운 생각으로 치우천결과 전륜공을 다시 이해하자, 그 둘의 관계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근본에서 같은 것임을 깨달았다.
그동안 그것이 다르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자신의 편향 때문이었다.
치우천결은 성좌의 궤도와 성운의 움직임에 바탕으로 한, 즉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본떠 만든 무공이었다.
마찬가지로 전륜공 또한 우주 안의 작은 우주인 인체에 참된 질서를 부여하는 무공이었다.
치우천결이 큰 우주인 자연의 질서를 따른 것이라면, 전륜공은 소우주인 인체의 질서를 무공으로 구현한 것이었다.
그 둘은 다르면서도 같은 것이었고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었다.
둘 다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하는 무위로 귀결되었다.
백여 일정도 더 지나자, 청운은 자신의 원래 무공 이상을 성취했다.
확실히 자신의 무위가 한 단계 더 격상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자 다시 청운의 타고난 호기심이 또 발동하기 시작했다.
[약초집성방]의 내용에 따르면 한빙열천 근처에는 드물게 천빙열화수가 자랄 수도 있다고 했다.
또한 그 열매인 천빙열화과는 일반인이 먹으면 평생을 무병장수하고 무림인이 섭취하면 순식간에 일갑자 이상의 내공을 얻을 수 있는 천고의 신외지물이라고 했다.
천빙열화과는 백 년에 한 번씩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에 천고의 인연이 있어야만 만날 수 있는 것으로, 함부로 욕심을 내면 오히려 화를 당할 수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청운은 한빙열천 주변을 찬찬히 세심하게 둘러보기 시작했다.
청운은 한빙열천의 수위가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이 늘 이상하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어딘가에 끊임없이 뜨거운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을 것이고.
어느 정도 연못에 물이 차면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 물길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청운은 우선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는 곳을 먼저 찾아보기로 작정했다.
청운은 거의 차이가 없지만 미세하게 물의 온도가 조금 더 높은 곳을 중점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청운은 깎아지른 얼음 절벽 사이로 자그마한 틈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