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53화 (53/184)

053화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오.

청운이 두 손으로 사라유리의 눈물을 살며시 닦아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참았던 울음을 눈물과 함께 펑펑 쏟으면서 그의 가슴에 쓰러지듯 안겨왔다.

청운이 자신의 가슴팍에 힘없이 쓰러지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를 안고 있는 청운의 양손에 흐느끼는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한참을 서럽게 울던 그녀가 살포시 청운의 품을 빠져나왔다.

사라유리는 청운의 말에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다 풀어졌다고 했다.

그녀는 청운이 실종 상태에 있는 동안 늘 청운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했다.

다행히 청운이 모든 걸 다 인정해 주니 이젠 아무 근심도 걱정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청운의 손을 잡아끌며 궁주인 어머니에게 가자고 했다.

유라궁주의 밀실에 세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 있다.

그들의 얼굴에는 서로에 대한 호의와 환대가 가득 담겨 있었다.

청운과 사라유리를 번갈아 바라보는 궁주의 표정에서는 은은한 미소가 설산의 설화처럼 끊임없이 피어났다.

하지만 밝은 표정과는 달리 궁주의 안색은 병색이 완연했다.

한동안 청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궁주가 가만히 입을 뗐다.

“공자, 아니 이제부터 한식구이니 자네라고 불러야 하겠지. 자네가 망혼단애에서 떨어진 것도, 기억을 잃은 것도, 기억을 되찾아 다시 유라궁을 제 발로 찾아온 것도, 내 어머니의 유품을 찾아온 것도, 나는 그 모든 것이 하늘의 섭리라고 생각하네.”

궁주는 말을 천천히 이어 나갔다.

“이런 인연을 어찌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있겠나. 유라궁에는 누대로 내려온 유라궁의 법규가 있다네. 내가 마음대로 고칠 수는 없지만 이번 기회에 조금은 손 볼 생각이네. 자네도 알다시피 유라궁은 원래 금남의 땅이라네.”

“…….”

“그래서 남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이곳에서 살 수가 없네. 하지만 나는 이번에 한 가지 힘든 결심을 했네. 이곳에서 남자가 계속 살 수는 없지만 삼 년마다 한 번씩 찾아와 백일 동안 머무는 것은 허용하기로 했다네.”

“……!”

“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지. 자네는 삼 년에 한 번씩 유라궁에 찾아와 백 일 동안 머물러도 되네. 나는 그것으로 자네가 내 어머니의 유진을 찾아준 일에 대한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 것으로 하겠네. 그리고 유리도 내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네.”

청운은 조용히 궁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자네가 가져온 백무기의 내단과 빙화초, 그리고 설산에서 나는 몇 가지 약초를 섞어서 나는 세 알의 빙혼단을 만들었다네. 하나는 내가 복용할 것이고, 또 하나는 내 딸 유리가 복용할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조금 있으면 태어날 내 손녀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했네.”

조용히 경청하던 청운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지자 궁주는 바로 말을 이었다.

“자네는 아들이 태어나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싶겠지만 그런 일은 절대로 없다네. 유라궁에 사는 여자들은 어릴 적부터 모두 특이한 음기를 바탕으로 하는 무공을 익혔기에 모두가 딸만을 낳는다네.”

궁주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원래 하던 대화 주제로 다시 돌아갔다.

“나는 이제 내상도 치료하고 유라수와 빙혼검결의 대성을 위해 곧바로 연공에 들어가려고 하네. 자네는 아무리 할 일이 많더라도 유리와 한 달만 더 이곳에 있어 주시게. 그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겠지.”

청운은 잠시 유리와 눈을 맞추고 다시 궁주의 눈을 마주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궁주는 다시 깊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끝맺었다.

“그리고 삼 년 뒤에 오시게. 귀수하백과 같이 와도 상관없네. 그럼 삼 년 뒤에 봄세.”

* * *

유라궁에서의 한 달이 꿈처럼 흘러갔다.

청운이 유라궁을 떠날 때 사라유리는 수십 리나 되는 눈길을 따라나섰다.

홑몸도 아니니 이제 제발 돌아가라고 청운이 사정사정을 해도 그녀는 고집을 부렸다.

정 고집을 피우면 다시는 유라궁에 오지 않겠다고 청운이 으름장을 놓자 그제야 그녀는 청운에게 봇짐을 내어 주고는 억지로 돌아섰다.

봇짐 속에는 그녀가 손수 백무기의 가죽으로 지은 옷 한 벌과 다른 여벌의 옷 한 벌, 그리고 약간의 음식과 술 두 병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차마 돌아가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청운이 설산의 까마득한 소실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제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청운도 몇 번이나 되돌아보며 일부로 한 발 한발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일을 때려치우고 유라궁 옆에 초막이라도 짓고서 매일 그녀 곁에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자신이 그동안 벌여 놓은 일을 그대로 놔두고 설산에 죽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거의 일 년여 동안이나 행방불명된 자신을 찾아 헤매는 다른 사람도 생각해야 한다고 청운은 자신을 다잡았다.

그런 생각을 하자 청운의 마음이 더 급해졌다.

그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마자 청운은 경공을 펼치며 내달렸다.

* * *

사라유리와 헤어진 청운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서야 낙양에 도착했다.

먼저 하오문의 총단에 가 볼 참이었다.

저번에 들렸을 때가 초가을이고 지금이 늦가을이니 낙양에 다시 오는 데 거의 일 년이 더 걸렸다.

“문주님과 총사님은 잘 계시는지 모르겠구나… 그리고 나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해준 삼호도 잘 있는지…….”

청운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천산과 설산에서 우여곡절을 겪느라 거의 일 년이라는 세월이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물론 그 시간이 모두 허송세월만은 아니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얻은 것도 많았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우선 天의 실체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고, 무공도 몇 단계나 더 격상되었다.

무엇보다도 사라유리를 얻었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그동안 청운은 중원에 있는 그 누구에게도 소식을 전하고 못 했고 그 누구로부터도 소식을 받지도 못했다.

‘내 간절한 마음과는 상관없이 내가 그들 모두에게 너무 무심한 사람이 되어 버렸구나.’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몽환루’와 총단이 있던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몽환루와 총단이 있었던 자리는 있는데 몽환루와 총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부서진 건물의 잔해와 간간이 그 잔해를 들쑤시고 가는 쥐새끼와 스산한 바람뿐이었다.

청운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자신의 애간장이 다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청운은 자세한 사태의 전말은 차치하고서라도 급한 대로 우선 사건의 정황이라도 대충 알고 싶어서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객점에 들어갔다.

끼니때가 아니어서 그런지 객점 안은 무척 한산했다.

청운이 간단한 소채와 황주 한 병을 시켰다.

잠시 후, 점소이가 음식과 술을 들고 청운이 앉아 있는 탁자로 왔다.

청운이 뭔가 물어볼 것이 있다고 잠시 점소이에게 앉으라고 했다.

청운이 은자 한 냥을 주자 화색이 환하게 밝아진 점소이가 무엇이든 물어보라고 했다.

청운은 ‘몽환루’가 왜 저 지경이 되었는지 물었다.

점소이가 아연 긴장된 표정을 짓고는 경계하듯 주변을 한 번 휙 둘러보고는 조심스레 말했다.

“무사님, 그게 말입니다. 저도 정확히는 잘 모르는데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반년 전쯤 폭설이 내리던 어느 날 밤, 검은 옷을 입은 수백의 무림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저곳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들었습니다.”

“……!”

“그날 밤 저곳에 있던 수많은 사람이 그자들에 의해 생목숨을 잃고 일부만 간신히 빠져나갔다고 했습니다. 그자들이 누군지는 저는 하나도 모릅니다.”

청운은 갑자기 천근의 돌을 얹은 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연거푸 황주를 다섯 잔이나 마시고도 성에 차지 않아 아예 병을 입에 대고 나발을 불었다.

나와 관련된 사람들은 왜 매번 이런 불행을 겪는가.

청운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자신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을 잔뜩 주었다.

손에 쥐고 있던 술병이 일순간 금이 가더니 박살이 나 버렸다.

그 모습을 우연히 지켜보았던 점소이가 너무 놀라 뒷걸음을 치다가 그만 뒤로 벌러덩 넘어지고 말았다.

청운이 천빙열화과를 복용하고 급격히 늘어난 자신의 내공을 분노 때문에 잠시 통제하지 못하고 분출하고 만 것이다.

그는 점소이에게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술값으로 은자 한 닢을 더 주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청운은 곳곳에 하오문도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기를 남기고는 하오문의 총단이 있었던 곳으로 다시 갔다.

그곳에는 총단은 사라지고 없고 총단의 있던 자리만 휑하니 남아 있었다.

청운은 작은 단서라도 찾기 위해 총단이 있던 자리에 산재한 잔해를 하나하나 들추기 시작했다.

구석구석에 채 수습되지 못한 인골들이 잔해와 함께 파묻혀 있었다.

청운은 분노와 안타까움에 복장이 뒤집혀 구토가 올라올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 하나의 단서라도 발견하기 위해 세심하게 현장의 구석구석을 뒤졌다.

한참 동안 잔해를 살피던 청운이 마침내 검은 목패 하나를 주워들었다.

목패에는 ‘흑수방’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섬서분타의 그 사소한 일 때문에 그놈들이 이런 잔혹한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목패를 뚫어져라 들여다보던 청운의 눈에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바로 그때, 이십여 장 정도 거리의 등 뒤에서 미약한 인기척을 느낀 청운은 몸을 홱 돌리며 소리쳤다.

“누구냐. 당장 앞으로 나서라!”

잠시 묵묵부답의 침묵이 흘렀다.

청운이 당장 앞으로 나오지 않으면 즉시 출수를 하겠다는 으름장을 놓으며 무너진 담장 옆의 고목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위치가 발각당한 흑의의 복면인이 사뿐히 바닥으로 날아 내렸다.

그자는 청운을 보고 너무 감격한 나머지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혹시, 호법사자님이십니까. 저는 삼호입니다. 그동안 어디 계시다가 이제야 이렇게 나타나셨는지요. 문주님과 총사님도 사자님을 많이 걱정했습니다.”

청운은 삼호를 바라보면서 너무나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에 죄책감이 가득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총단에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내가 죽일 놈이오. 변명 같지만 나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느라 경황이 없었습니다. 나를 용서해 주시오.”

삼호는 그런 게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사자님,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사자님을 책망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사자님이 이렇게라도 다시 돌아오셔서 너무 기뻐서 한 말입니다. 그건 문주님도 똑같은 생각이실 겁니다.”

삼호는 진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들은 사자님이 무슨 횡액이라도 당하셨을까 늘 노심초사했습니다. 이렇게 다시 사자님을 뵙게 되어 참으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청운은 삼호의 말이 끝나자마자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하오문을 이렇게 만든 놈들이 흑수방입니까.”

삼호는 즉시 대답했다.

“예, 사자님. 지난겨울의 끝 무렵 폭설이 밤새 내리던 밤이었습니다. 삼백여 명이 넘는 흑수방 놈들이 야음을 틈타 총단에 들이닥쳤습니다.”

“…….”

“그 사건으로 총단에 있던 문도들 수십여 명이 죽고 반 이상이 다쳤습니다. 다행히 문주님과 총사님께서는 안가로 재빨리 몸을 피하셨습니다. 사자님, 지금 당장 문주님을 뵈러 가시지요.”

청운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안간힘으로 누르며 삼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니요. 문주님을 뵙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소. 흑수방을 징치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문주님을 뵙는 건 그다음 일입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내 죄책감이 덜어질 것 같습니다. 흑수방 놈들은 아마 섬서분타의 일 때문에 이런 일을 저지른 듯싶소.”

청운의 결의에 찬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늘 밤 내 그들을 이곳 섬서땅에서 말살시킬 것이오. 그들이 하오문에 행한 짓 그 이상의 대가를 내가 반드시 받아낼 것이오. 문주님이 계신 곳이 아니라 먼저 흑수방의 총단으로 날 안내하시오. 삼호님,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