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화 그자들의 손이 무섭게 부풀기 시작했다.
청운은 팽이처럼 자신의 신형을 돌리며 쾌―타―절―변―회―접의 초식을 연속으로 전개했다.
거의 이장이나 되는 자황색의 검기가 사내들을 맹렬하게 휩쓸어 갔다.
장내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지옥도 펼쳐졌다.
“악! 으악―”
“으아악!”
처절한 비명과 신음이 밤하늘을 순식간에 수백 가닥으로 찢어발겼다.
처참했다.
목불인견이 따로 없었다.
청운의 무영검에서 발출된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가 스치고 간 자리엔 온전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전의 지붕은 거의 반이나 허물어져 날아갔고 대전 앞을 지키던 돌사자상과 돌기린 상도 좌대만 남은 채 몸체는 어디론가 날아가고 없었다.
거의 폐허가 되어 버린 대전 주변.
그곳엔 팔다리가 잘린 자, 목이 몸에서 분리된 자, 가슴이 쪼개지고 배가 뚫린 자들 수십여 명이 마치 야차의 발에 밟힌 벌레처럼 땅바닥에 널브러진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지옥도 이런 지옥이 없었다.
청운은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무림은 원래 이럴 수밖에 없었던 곳이라고 생각했다.
청운은 상대를 봐주거나 가볍게 여기다가 자신이 죽을 뻔했던 과거의 일들을 떠올렸다.
청운은 다시 대전을 향해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청운은 대전으로부터 일군의 무리가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등장을 본 사내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무상님과 호법님을 뵙습니다.”
청운은 젊은 무사들이 그들을 대하는 태도로 봐서 그들이 흑수방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운은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듯 무심하게 앞만 쳐다보며 직진했다.
청운이 그들의 삼 장 가까이에 다가가자 무리의 맨 앞에 선 자가 청운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그자는 사십 대 중후반이나 오십 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피보다 더 짙은 적의를 입은 그자는 몸집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강인한 인상에 눈빛이 방금 숫돌에 갈아낸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자가 한 손을 들어 자신을 향해 곧장 걸어오는 청운을 제지하며 말했다.
그자의 말투는 안하무인이었던 전의 사내들과 달리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잠깐 멈추시게. 도대체 무슨 일로 이런 참혹한 살상을 저지르는가. 흑수방에 무슨 원한이 있어 이렇게 잔인무도한 살육을 벌이는가. 나는 흑수방의 무상의 직책을 맡고 있는 조양우라고 하네.”
청운이 흑수방의 무상이란 자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무상이 흑수방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일은 방주가 아니면 누구도 해결하지 못하오.”
“…….”
“방주를 불러주면 간단히 해결될 일을 왜 이리 일을 자꾸 번거롭게 만드는지 모르겠구료. 오늘 밤 내가 더 이상 무고한 살상을 하지 않도록 제발 방주를 빨리 불러주시오. 방주를.”
무상의 왼쪽 옆에 있던 호법이란 자가 길길이 날뛰며 소리쳤다.
“젊디젊은 놈이 저렇게 오만방자하다니. 네놈에게 오늘 내가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있음을 단단히 깨닫게 해주마.”
호법이란 자가 자신의 도를 뽑아 들며 청운을 향해 다가가려고 하자 무상이 그를 제지하며 다시 청운에게 말했다.
“방주님을 뵙는 데는 나름의 절차가 있는 법일세. 대체 무슨 일인지 자초지종을 알아야 내가 방주님께 보고를 올리든지 말든지 할 게 아니요. 자, 속 시원히 말해 보시게. 대체 무슨 영문인지를.”
청운이 무상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좋소. 나는 하오문의 호법사자 강청운이오. 하오문의 빚을 받으러 왔소. 이제 방주를 불러주시오.”
청운이 신분을 밝히자 무상을 비롯해 주변에 있던 자들이 깜짝 놀라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일순간에 장내가 벌집을 쑤신 듯 소란스러워졌다.
그 순간 흑수방의 무상이 자신의 왼팔을 크게 허공에 휘저으며 장내의 소란을 가라앉혔다.
그자의 얼굴에는 기어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무상이 자신의 뒤에 서 있던 흑의의 사내에게 뭐라고 말하자 그자가 어디론가 급히 뛰어갔다.
잠시 후 수백 명의 무리가 한꺼번에 우르르 장내에 등장했다.
그들은 은연중에 청운을 포위하는 모양새로 도열했다.
곧이어 누군가가 외쳤다.
“방주님이 나오십니다. 모두 예를 갖추시오.”
그 외침과 동시에 십여 명의 인물들이 대전의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무상을 비롯한 장내에 있던 자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이며 무리의 가운데 황의를 입은 자에게 예를 갖췄다.
그는 바로 섬서의 밤을 지배한다는 흑수방의 방주 묘하연인 모양이었다.
흑수방의 방주는 오십 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몸집은 다소 왜소한 축이었고 검은 낯빛에 염소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옆으로 쭉 찢어진 눈이 아주 매서워 보였고 그에 걸맞게 안광 역시 잘 벼린 비수처럼 날카로워 빛났다.
흑수방 방주 흑수마장 묘하연.
그는 중원이 아니라 남만 출신이라고 강호에 알려져 있었다.
그가 남만에서만 자생하는 독초들과 독충들을 이용해 익힌 흑수마장은 독나기로 무림에 소문이 자자했다.
공력이 낮은 사람은 흑수마장의 장력이 내뿜는 냄새만 맡아도 혼수상태에 빠진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의 장력을 살짝 스치기만 해도 살이 썩어 들어간다는 소문도 있었다.
흑수방주가 일부러 잔뜩 공력을 실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장내를 쩌렁쩌렁 울렸다.
“빚은 네놈의 능력만큼 받아 갈 수 있다. 그래, 네가 받고자 하는 빚의 한도가 어디까지인지 그 능력을 보여라. 내가 참고하겠다.”
청운이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먼저 방주의 한쪽 팔을 스스로 자르고, 당신들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하오문도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고, 당신이 죽인 그들의 목숨 값과 파괴한 하오문 총단의 건립비용으로 은자 오십만 냥을 내놓으시오. 이것이 오늘 내가 반드시 그대에게서 받아내야 할 빚이오.”
“으하하하하, 호기는 좋다만 네놈에게 과연 그 정도의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구나. 그것보다 내가 너의 능력을 높이 사서 제안을 하나 하겠다.”
방주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하오문을 당장 때려치우고 우리 흑수방에 들어오너라. 네가 평생을 쓰고도 남을 황금과 무공을 급상승 시킬 수 있는 천고의 영물, 그리고 그에 걸맞은 총호법 자리도 주겠다.”
“…….”
“어떠냐, 내 제안에 구미가 당기지 않느냐. 이 정도 조건이면 구대문파의 장로급들도 당장 변절시킬 수 있다. 내가 너의 능력을 그만큼 높게 산 것이다. 삼 일간의 생각할 말미를 주겠다. 이쯤에서 물러나면 내가 너그러운 아량으로 오늘 있었던 일은 모두 불문에 부치겠다.”
청운이 입가에 한 줄기 고소를 베어 물고는 방주를 향해 말했다.
“내 능력을 그 정도까지 인정해 주니, 어쨌든 무척 고맙소. 다른 사람에게는 방주의 그 제안이 아마 썩 괜찮은 조건임이 틀림없을 것이오.”
청운의 말에 방주는 당연하다는 듯 미소가 깊어졌다.
“하지만 나는 이미 흑수방이 악의 소굴이란 걸 잘 알고 있소. 그래서 방주가 흑수방을 내게 통째로 준다고 해도 나는 전혀 관심이 없소. 나는 오늘 내가 흑수방에서 반드시 받아내야 할 빚에만 관심이 있소.”
자신이 청운에게 우롱 당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흑수방주 묘하연은 안 그래도 시커먼 안색을 더 새까맣게 일그러뜨리며 두 눈에서 흉광을 줄기줄기 내뿜었다.
그는 자신의 오른손을 허공에 들어 올리며 일갈했다.
“흑살조는 당장 나서라. 저 오만방자한 놈을 제압해 당장 내 앞에 꿇려라. 내가 친히 저놈의 목을 치겠다.”
방주의 명령이 채 땅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전각의 지붕 위에서 수십 명의 흑의인들이 청운을 포위하며 장내로 날아 내렸다.
그들 모두는 고도의 수련을 받은 듯 동작 하나하나에 전혀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는 것 이외의 모든 불필요한 동작을 제거해 버린 전문적인 살수들 같았다.
그들이 천천히 청운의 신형을 중심에 두고 돌기 시작했다.
도는 속도가 점차로 빨라지더니 급기야는 그들의 형체가 완전히 사라지고 한 덩어리 회오리바람만이 청운의 전신을 휘감았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게 있었다.
청운의 무위는 이미 그런 눈속임 같은 공격에 혼란을 겪는 그런 경지를 훨씬 벗어나 있었다.
그들의 신법과 출수가 아무리 빨라도 청운의 눈에는 느린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청운은 그들의 몇 번에 걸친 공격을 가볍게 막아내었다.
“모두 꺼져라!”
그리고 일갈을 토해내면서 쾌―타―절―변―회―접―파척의 초식을 번개처럼 전개했다.
무영검에서 뿜어진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가 회오리바람의 허리를 그대로 잘라갔다.
“악!”
“으으악!”
“캬악!”
순간 장내에는 누구의 것인지 도저히 분간도 할 수 없는 비명이 사방에 흩뿌려졌다.
한바탕의 비명과 소용돌이가 가라앉자 장내에 처참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흑수방주를 비롯한 장내에 있던 사람들은 그 참혹한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청운을 공격했던 수십 명의 흑살조 대원 대부분이 즉사하거나 중상을 입고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청운의 엄청난 무위를 목도한 흑수방 방주와 수뇌부들의 안색이 돌연 사색이 되었다.
청운의 무위는 저들의 상상을 훨씬 초월해 있었다.
방주는 신형을 한 차례 휘청거린 후 바짝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은 어느 문파 출신이냐. 그게 도대체 무슨 검법이냐.”
청운이 입가에 한 줄기 냉소를 베어 문 채 싸늘하게 말했다.
“그것까지 방주께서 아실 필요가 있을까요. 자, 이제 어떡하시겠소. 내가 원하는 빚을 스스로 내놓겠소, 아니면 내가 강제로 받아 갈까요. 빨리 선택하시오.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여유가 없소.”
청운이 방주를 개무시하는 듯한 말을 하자 방주 옆에 서 있던 승복도 도포도 아닌 특이한 복장의 장삼을 입은 두 중년인이 청운 앞에 날아 내리며 소리를 꽥 질렀다.
“보자 보자 하니 정말 안하무인이구나. 네놈이 뭘 믿고 그렇게 방자한지 네놈의 뱃속을 한 번 따 봐야겠다. 내가 네놈에게 어른 무서운 줄 가르쳐주마. 오늘 내가 네놈의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주마.”
그러자 무상이란 자가 그들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세외이마께서 직접 나서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자는 저와 양 호법이 처리하겠습니다. 세외이마께서는 그냥 구경만 하시지요. 금방 끝내겠습니다.”
“무상께서는 비키시오. 저놈은 반드시 우리가 징치하겠소. 나도 이참에 밥값을 좀 해야지요.”
자신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세외이마라 불리는 자들이 청운을 좌우에서 압박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허공으로 자신의 양손을 들어 올린 채 공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대경할 광경이 그들의 장심에 나타났다.
그들이 공력을 끌어올리자 그자들의 손이 무섭게 부풀기 시작했다.
급기야 그들의 손이 사람의 몇 배 크기로 커졌다.
청운은 생전 처음 보는 기괴한 광경에 흠칫했다.
바로 그 순간, 청운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