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화 어느 하나라도 모자라면 완벽한 검이 아니다.
“하룻밤 새에 두 공방이 잿더미가 되고 단 하나의 단서도 없이 사건이 오리무중에 빠진 모양새가 너무나 공교롭게도 하남, 하북, 산동, 산서표국의 멸문과 무척이나 유사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네.”
“그렇군요.”
“이건 순전히 내 섣부른 판단일세. 소협의 생각은 어떠신가. 나는 틀림없이 우리 공방의 멸문이 天과 깊은 관련성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 소협이 天에 관해 아는 것을 모두 나에게 말해 주면 고맙겠네. 소협, 부탁하네.”
청운은 팽추도의 말을 다 들은 후 그의 눈빛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리고 말을 하더라도 어느 선까지 해야 할지 잠시 고민을 했다.
청운은 결국 모든 걸 다 말해 주기로 작심을 했다.
청운은 조금 전 장문인과 육검자 앞에서 했던 말들을 팽추도에게 그대로 반복했다.
하긴 청운 자신도 天에 관해 더 이상 아는 게 없었다.
그리고 지금 청운이 아는 것 또한 짐작이지, 전적으로 사실이라고 하기에도 어폐가 있었다.
청운은 말을 끝마친 후 길게 한숨을 한 번 내뱉었다.
청운의 그 한숨에는 앞으로 자신이 헤쳐 나가야 할 막막한 속내가 섞여 있어서 그런지 진한 신산함과 씁쓸함이 잔뜩 배여 있었다.
청운이 팽도추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팽 대협, 저도 天에 대해 아는 게 그 정도뿐입니다. 하지만 저는 내 전부를 걸고 天의 실체를 하나하나 캐볼 생각입니다. 꼬리라도 계속 쥐고 흔들다 보면 결국에는 몸통도 드러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그리고 그들이 설령 신이라 할지라도 저는 그들과 대적할 것입니다. 내가 죽더라도 끝장을 볼 생각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들이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갔듯이 나도 똑같이 그들의 가장 소중한 것을 짓밟아버릴 작정입니다”
청운의 말을 끝까지 다 듣고 난 팽추도가 오른손으로 청운의 어깨를 슬쩍 한 번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강 소협, 나도 소협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네. 나도 그들의 실체를 밝히는데 최선을 다할 생각이네. 그러다 보면 소협과 내가 곧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것이네.”
“나중에 뵙기를 소망하겠습니다.”
“알겠네, 그럼 나는 장 장문과 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어서 아쉽지만 이만 일어나 봐야겠네. 잘 하산하시고 다음에 또 봄세. 그런데 참, 소협의 검은 어느 유파인가. 아무리 곰곰이 생각을 해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네.”
“…….”
“내가 중원의 검 전부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편인데 소협의 검은 어느 유파인가. 내 좁은 식견으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네.”
“그렇습니까.”
“그리고 소협의 검은 정말 굉장했네. 소협과 태청일검과의 대결은 내 생전 다시 보기 힘든 놀라운 것이었다네.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대단한 무위를 성취했는지 단지 놀라울 뿐이네.”
“아닙니다, 과찬이십니다.”
“오늘 소협 때문에 내 부족한 안계를 부쩍 넓혔다네. 소협이 아주 불편하지 않다면 내 궁금증을 조금이라도 풀어주면 좋겠네.”
무공에 관한 관심이라는 측면에서 무림인들은 참 하나 같이 똑같구나 하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팽추도에게 적당히 둘러댔다.
동이족인 자신의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양생법을 토대로 나름 몇 초식의 검법을 만들어 냈다고.
청운의 말을 들은 팽추도는 눈을 왕방울만 하게 뜨고는 입을 딱 벌린 채 한동안 다물지 못했다.
팽추도는 청운을 쳐다보면서 거의 경악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무공이란 게 선대의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유진을 이어 습득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걸 스스로 창안한다는 건 천재 중의 천재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제 아이가 훌륭한 무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부모들은 제 자식을 강호의 유수한 문파의 제자로 들려 보내는 것을 꿈처럼 갈망한다.
강호에는 헤아릴 수 없는 별의별 문파가 무수히 존재하지만, 무당이나 화산 같은 명문 정파들이 누대에 걸쳐 성세를 누리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무공의 고수일수록 그런 강호의 사정을 더 잘 안다.
그나마 팽추도 정도 되는 절정 고수이기에 무공을 스스로 창안했다는 청운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한 것이다.
무공에 있어서는 놀라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다.
팽추도는 자신의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왼손으로 대충 털고는 자리를 떴다.
팽추도의 뒷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면서 청운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강호가 그렇게 외로운 곳만은 아닐 것 같다는…….
* * *
<만다루>는 섬서성에서는 요리로 꽤 알아주는 객점이다.
<만다루> 이 층 창가에 말끔한 연하늘색의 장삼을 차려입은 이십 대 중반 정도의 청년이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앉은 탁자에는 마시다 만 술 한 병과 삶은 돼지고기가 놓여 있었다.
객점은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그런지 매우 복잡하고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청년은 주변의 상황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어느 탁자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자신이 입은 옷과 동일한 색의 영웅건을 한 청년의 얼굴은 인세에 보기 드문 탁월한 미남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심해처럼 깊은 눈빛으로 인해 그 나이의 청년이 가지기에는 힘든 묘한 분위기와 기도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태청일검과의 격전을 치르고 곧장 화산에서 내려온 청운이다.
그 대결에서 청운은 경미한 몇 가닥의 상흔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상처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입고 있던 옷이 거의 누더기가 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포목점에 들러 웃돈을 주고 누군가 맞춰 놓은 옷을 한 벌 사 입었다.
청운은 지금 화산과 태청일검 육검자와의 비무를 머릿속으로 되짚고 있었다.
화산의 풍광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깎아지른 절벽과 갖가지 수목이 어울려 빚어낸 화산의 아름다움이 청운의 눈앞에 여전히 아른거렸다.
그랬다.
바위 하나만으로는 산이 그토록 멋들어질 수 없고, 수목 하나만으로도 산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는 없었다.
화산의 아름다움은 바위와 나무, 하늘과 구름.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만들어 낸 절경이다.
세상에 단독으로 아름다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검도 마찬가지다.
단지 빠르고 강한 것만으로는 최고가 될 수 없다.
제아무리 강하고 빠른 초식과 화려한 초식도 더 빠르고 더 변화무상한 상대의 검로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우리네 삶이 그러하듯 모든 검초는 순간순간 바뀌는 다채로운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아니, 변하는 상황보다 자신이 더 빨리 변해야 한다.
그것뿐만 아니라 강함과 빠름 그리고 유연함이 겨전의 상황과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중 어느 하나라도 모자라면 완벽한 검이 아니다.
태청일검과의 비무에서 ‘멸환’을 거의 전력으로 펼치고 나서야 자신이 겨우 승기를 잡기는 했다.
하지만 청운은 하마터면 자신이 패할 뻔했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청운은 자신이 너무 빠르고 강한 검만을 추구해 왔다는 자각을 했다.
청운은 태청일검과의 승부를 통해 자신의 검에 대해 새로운 눈을 떴다.
태청일검의 검에 맞서 자신은 강하고 빠른 것만으로 밀어붙였다.
반면 육검자는 강한과 부드러움의 조화로서 번번이 청운의 검로를 미리 와해시켜 버렸다.
‘멸환’을 전개하기 직전 그것을 깨닫고 나서야 간신히 자신이 조금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그 짧은 찰나에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틀림없이 자신이 패했을 것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검의 길은 참으로 끝이 없구나.’
청운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청운이 태청일검과의 승부에 관한 되새김으로 깊은 상념에 빠진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고 바라보고 있던 바로 그때.
점소이가 뒤에 누군가를 대동하고 청운이 앉아 있는 식탁으로 다가왔다.
점소이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청운에게 간청을 하듯 말했다.
“공자님, 지금 한창 바쁜 시간이라 자리가 많이 부족합니다. 많이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합석을 부탁드립니다.”
청운은 한동안 무심했던 표정에 가벼운 웃음을 베어 물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합시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겠소.”
점소이가 청운에게 포권을 취한 후 자기 뒤에 서 있는 청년을 뒤돌아보며 말했다.
“공자님, 이분께서 흔쾌히 허락을 하셨습니다. 이리로 앉으시지요.”
점소이가 청운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당기며 청년에게 앉기를 권했다.
그리고는 재빨리 주문을 받고는 일 층으로 돌아갔다.
청년은 이 객점의 자랑인 잉어찜과 소홍주 한 병을 시켰다.
청년은 청운에게 포권을 취한 후 자리에 앉았다.
청년은 한눈에 보기에도 대단한 부잣집 자제 같았다.
눈빛도 형형했고 미남형의 얼굴로 인물도 반듯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태도에서 귀티와 기품이 철철 흘러넘쳤다.
그가 입고 있는 연한 청삼은 중원에서 보기 힘든 고급의 비단으로 만든 것이었다.
일반서민이라면 평생 한 번도 입어 볼 수 없는 값비싼 것이었다.
그가 들고 있는 섭선 또한 보통의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먼 서역에서 건너왔을 것 같은 특이한 보석이 섭선의 손잡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어지간한 서민의 집 한 채 값은 족히 될 듯해 보였다.
섭선을 가만히 탁자에 내려놓은 청년이 청운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협, 이것도 인연인데 서로 통성명이라도 나누었으면 합니다. 저는 석가장의 셋째 석가명이라고 합니다.”
청운은 청년의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석가장이 어떤 곳인가?
전국시대부터 대대로 중원 최고의 갑부 중 하나로 불리던 집안이 아닌가.
석가장의 부가 황궁을 능가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중원에 널리 회자되고 있을 지경이었다.
석가장의 셋째인 그는 문과 무뿐 아니라 예에도 모두 능해 강호인들로부터 삼절공자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었다.
특히 형제 중에서 가장 상재에 탁월해서 차기 석가장을 이끌어갈 후계자로 이미 내정되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청운도 그에게 공손하게 포권을 취하며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삼절공자 석 대협이셨군요. 어쩐지 기개가 헌앙해 보인다고 했더니.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강청운이라 합니다. 지금 하오문에 의탁하고 있습니다.”
석가명은 청운이 자신에게 놀란 것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무위검! 강 소협! 그렇지요. 처음 볼 때부터 풍기는 기도가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무위검 강청운 소협일 줄이야.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석가명이 큰 소리로 무위검 강소협! 이라고 놀라 소리치는 바람에 객점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청운이 앉아 있는 탁자를 바라봤다.
개 중에 성질 급한 몇몇은 자신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청운에게 왔다.
그들은 자신의 명호를 말하며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청운은 자신과 육검자의 대결이 이미 강호에 소문이 쫙 퍼진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강호의 소문은 정말 바람보다 더 빠르구나 하고 청운은 감탄했다.
그들은 청운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후 포권을 취하고는 자신의 자리도 돌아갔다.
몇몇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도 수시로 흘금거리며 청운을 쳐다봤다.
청운에게 눈도장을 찍으려는 그들 대부분은 이곳 섬서에 기반을 둔 군소 방파의 식솔과 제자들이었다.
청운은 난감했다.
이래서는 음식이 입이 아니라 코로 넘어갈 것 같았다.
청운은 내심 조용한 곳에서 한 잔 술이나 하며 자신이 다음에 방문할 소림과 소림의 무공에 대해 집중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