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화 최소 석 달 열흘은 잡아야 할 것입니다.
청운은 석가장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놀라움이 큰 만큼 다른 한편으로 입맛이 씁쓸했다.
한 나라의 부는 늘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한 개인에게 이렇게까지 부가 불공평하게 소유되어도 괜찮은가 싶었다.
모두가 똑같은 인간인데 누구는 너무 많이 가져 주체할 수가 없고, 또 누구는 너무 가진 게 없어 늘 굶주림에 시달려야 하는 이런 세상의 불공평이 참으로 난망한 문제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이런 부의 불평등을 직접 마주 대하니 갑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근원을 알 수 없는 회의감과 무력감에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
청운의 그런 회의감과 무력감은 단순히 석가장의 엄청난 부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이렇게 세상을 불평등하게 만든 사회의 구조적 문제.
그리고 그런 문제를 뻔히 알고도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해 버리고 나 몰라라 하는 위정자들의 무관심과 무능에 기인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청운의 석가장에 대한 이런 불편한 심경은 태어날 때부터 불공평한 운을 타고나 평생을 제대로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을 유독 외면하는 무심한 하늘에 대한 원망 섞인 하소연이기도 했다.
이런 불평등의 해소에 앞으로도 자신이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깊은 자괴감에 청운은 잠시 기분이 울적했다.
석가명과 청운이 석가장 수십 장 근처에 다다르자, 이층으로 멋들어지게 지어진 솟을대문 위의 누대에서 망을 보고 있던 무사가 큰 소리를 질렀다.
“셋째 공자님이시다. 대문을 활짝 열어라.”
무사의 고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문 같은 커다란 대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렸다.
가까이서 보니 대문은 전부 비싸디비싼 자단목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청운은 이제 석가장의 부에 더 이상 놀라지 않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청운 일행이 대문을 들어서자 서너 명의 인물들은 종종거리며 다가오더니 허리를 있는 대로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청운 일행을 극진하게 모시기 시작했다.
대문을 들어서고 나서도 수백여 장을 더 걸어가고 나서서 청운은 석가장의 첫 번째 전각에 도달할 수 있었다.
청운보다 두어 발짝 앞서 걷던 석가명은 첫 번째 전각을 왼쪽으로 한참을 돌더니, 청운을 별원으로 이끌었다.
별원은 다른 전각에 비해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다른 전각에는 없는 운치가 있었다.
별원의 전면에는 둘레가 이백여 장에 이르는 크기의 연못이 있었다.
그 연못에는 주변에는 모양이 서로 다른 수십여 개의 화려한 석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석등을 따라 귀하디귀한 기화이초들이 심어진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연못 주변에는 동서남북 네 방위에 멋들어진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정자와 석등은 별원의 풍수를 고려해 배치한 것처럼 보였다.
석가명이 별원의 가운데 있는 월동문으로 청운을 안내했다.
월동문을 지나자 긴 회랑이 나타났다.
이십여 장에 이르는 회랑을 지나자 다시 여닫이 당길문이 나타났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화려한 객당이 나타났다.
객당의 바닥에는 온통 파사국에서 들여온 것 같은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다.
사방 벽에는 수십여 개의 유등이 밝혀져 있었다.
벽면 곳곳에도 대가들의 작품으로 보이는 그림과 글씨가 가득 걸려 있었다.
심지어 천장에도 대가의 솜씨로 보이는 당초무늬의 그림들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청운과 석가명이 안으로 들어서자, 객당 앞에서 시립하고 있던 시비 둘이 석가명과 청운을 황금색 비단으로 감싼 둥근 탁자로 이끌었다.
시비들이 공손하게 의자를 빼주며 청운에게 먼저 앉으라고 했다.
탁자에는 언제 가져다 놓았는지 방금 끓인 차와 생전 처음 보는 이채로운 과자들이 소담스럽게 놓여 있었다.
청운이 시비가 따라 주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있을 때, 흰 장삼을 입고 머리에 관면을 쓴 오십 대 중반 정도의 중년인이 객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갸름한 얼굴에 염소수염을 기른 청수한 인상이었다.
그를 보자 석가명이 벌떡 일어나 반갑게 인사를 했다.
“제갈 어르신,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강 소협의 내상을 좀 자세히 살펴주십시오.”
석가명이 어느새 의당에 기별을 넣은 모양이었다.
청운은 석가장의 빠른 명령체계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청운은 수많은 난세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 동안 이런 거대한 가문을 지탱한 석가장의 진정한 힘의 한 단면을 얼핏 엿본 것 같았다.
제갈 어르신이라고 불린 의원이 청운을 향해 다가오더니 청운에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저는 제갈성이라고 합니다. 강호에 협명이 자자한 무위검 소협을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의술을 몇 가지 아는 덕분에 석가장에 의탁하고 있습니다.”
청운은 제갈성이라는 이름에 깜짝 놀랐다.
청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재차 포권을 취했다.
그는 섬서뿐만 아니라 전 중원에서 신의라고 불리는 몇 안 되는 의원이었다.
특히 외과보다 내과 쪽에서 탁월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섬서 지방의 사람들은 그가 고치지 못하는 병은 약사여래도 고치지 못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갈성을 아예 제갈신의로 불렀다.
그만큼 제갈성이 가진 의술에 대한 사람들의 경외심은 확고했다.
청운은 아닌 밤중에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이렇게 제갈 신의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강호의 무명소졸 강청운이라 합니다.”
제갈성은 청운의 칭찬에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지금 중원에서 무위검 강 소협이 무명소졸이면 누가 대협이란 호칭을 들을 수 있단 말입니까. 지나치게 겸손한 것은 오히려 오만한 것보다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저 같은 돌팔이가 신의는 무슨 신의…….”
“…….”
“그냥 몇몇 사람들이 나 듣기 좋아라 부르는 허명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냥 의술을 조금 아는 돌팔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번 만불사 사건 때 소협께서 중한 내상을 입었다지요. 내가 진맥을 좀 해도 되겠습니까.”
청운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자기 왼팔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제갈성의 면전에 내밀었다.
자신의 탁월한 의술을 전혀 내세우지 않는 제갈신의의 소탈한 성격에 청운은 단번에 호감이 갔다.
그리고 배울 것이 참 많은 어른이라고 청운은 감복했다.
무공뿐 아니라 다른 어떤 방면에서도 지고한 경지에 이르면 저런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구나 하고 청운은 생각했다.
그리고 제갈신의와는 무공을 넘어서 서로 많은 것이 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원에는 여러 방면의 기인이사들이 모래알처럼 많구나.’
청운은 감탄했다.
청운의 맥을 짚어 보던 제갈 의원의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연신 의아한 표정을 얼굴에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 청운의 안색과 눈빛도 세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반 식경 이상을 그렇게 청운의 맥을 짚고 안색을 살피던 제갈 의원이 청운의 맥을 놓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소협, 참으로 악독한 음공에 당했군요. 이런 유의 음공은 저도 처음 접하는 것이라 진맥에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그렇군요.”
“이런 음공은 단순히 심법을 수련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자의 음공 속에는 미세하게 다른 수백 가지의 음기가 혼재되어 있습니다.”
제갈신의는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조심스럽게 판단한다면 이건 타인으로부터 흡취한 음한지기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자의 음한지기는 아마 처녀지신을 가진 여연으로부터 강탈한 것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아마 순음지기를 모두 빼앗긴 여인들은 모두 빼빼 말라서 일순간에 타 죽었을 것입니다.”
“…….”
“참으로 악독하고 사악한 자입니다. 그리고 더욱 안 좋은 것은 그자의 음공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는 점입니다. 완성을 목전에 두었으므로 앞으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더 많은 여인을 해할 것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그자를 찾아내어 처단해야만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그말을 들은 청운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분노에 휩싸였다.
“그리고 소협,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치료에 임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소협의 내상은 단일한 종류의 음공에 당한 것이 아니라 수백 종류의 각각 다른 음공에 당한 것과 같습니다. 소협의 내상이 겉보기에는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습니다만 사실은 매우 중한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치료에 엄청난 시일이 소요될 수 있습니다. 만약 완벽히 치료하지 않은 채 함부로 내력을 사용하면 재발할 뿐만 아니라 서서히 소협의 본원진기를 갉아먹어 결국에는 주화입마를 넘어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습니다.”
제갈 신의의 설명을 다 듣고 난 청운은 제갈신의에게 새삼 여러 번 놀랐다.
첫 번째로 놀란 것은 그 짧은 진맥으로 자신의 몸 상태를 정확히 짚어 낸 것이었다.
두 번째로 놀란 것은 자신의 내상을 통해 자신을 공격한 자의 무공의 이력과 수준을 거의 정확히 밝혀 낸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놀란 점은 자신의 치료가 너무 오래 걸린다는 제갈신의의 진단이었다.
청운은 제갈신의가 내린 진단 가운데서도 세 번째가 가장 고민스러웠다.
당장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치료에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고 하니 청운은 가슴이 답답하고 맥이 탁 풀어졌다.
청운이 제갈신의에게 다시 한 번 치료에 걸리는 시간을 최대한 앞당길 수 없는지를 물었다.
제갈신의가 청운의 질문에 아주 난망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보기에 치료는 최소 석 달 열흘은 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 치료 기간도 워낙 소협의 내공이 정순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아마 수삼 년이 더 걸릴 것입니다.”
“아…….”
“소협의 몸속에는 지금 네 가닥의 큰 힘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가장 강한 줄기는 마치 건과 곤이 합쳐진 힘처럼 엄청난 것입니다. 다른 한 줄기는 그 본원의 힘을 상승시키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제갈신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나머지 둘은 아마 어떤 절세의 영약 같은 것을 섭취해 얻은 것 같은데 그 힘들 또한 건곤의 힘을 떠받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조금 있습니다.”
“문제요?”
“지금 소협의 몸속에서 그 힘들은 채 반도 서로 용합되지 못한 채 각각 따로 놀고 있습니다.”
“…….”
“소협이 그 네 줄기의 힘을 완벽히 융합시킨 상태였다면 이런 내상은 채 한 시진도 안 되어 저절로 회복되었을 것입니다. 아니, 이런 내상을 아예 당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제갈신의는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만약 소협이 언젠가 어떤 탁월한 기연을 얻어 네 가닥의 힘을 가장 큰 줄기를 근간으로 완벽히 합칠 수만 있다면 소협의 무위는 만독불침과 금강불괴를 넘어 아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군요.”
“그 경지는 사람의 신체와 정신으로는 거의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일 것입니다. 장담컨대 그것은 장구한 무림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지고한 경지일 것입니다.”
청운은 제갈신의의 말에 다시 한 번 크게 놀랐다.
제갈신의가 말한 네 가닥의 힘은 치우천결과 전륜공 그리고 대붕의 체애과 천빙열화과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중 가장 큰 힘은 치우천결을 말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