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화 시공간 자체가 굳어서 멈춘 것 같았다.
잠시 봄밤의 나른한 상념에 빠져 있던 청운이 노송의 밑동에 매어 둔 말에게로 걸어갔다.
청운은 실험 대상이 된 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말의 목을 지그시 몇 번 쓰다듬었다.
히—히—히—잉.
제 발밑의 풀을 뜯고 있던 말이 청운의 부드러운 손길에 기분이 좋은지 앞발을 쳐들고는 울었다.
바로 그 순간, 청운은 일성의 공력을 주입해 삼공적을 힘껏 불었다.
청운의 귀에는 피리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눈앞에서 보고도 믿지 못할 놀라운 광경이 청운의 눈앞에 펼쳐졌다.
말은 앞발을 치켜든 채 그대로 바위처럼 굳어 버렸다.
주변을 둘러보던 청운은 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곳저곳에 작은 짐승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다람쥐를 사냥하던 부엉이는 돌처럼 바닥에 떨어져 굳어 있었고, 부엉이를 피해 도망치던 다람쥐도 달아나던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산새의 둥지를 노리고 나무를 오르던 구렁이도 나뭇가지에 걸친 채 굳어 있었고.
그 뱀을 잡아먹기 위해 가지와 가지를 건너뛰던 담비도 가지에 착지한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마치 주변의 시공간 자체가 굳어서 멈춘 것 같았다.
강호에 발을 내디딘 후 수많은 기이한 경험을 많이 접해서 청운은 어지간한 일에는 거의 놀라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삼공적의 듣도 보도 못한 기괴한 묘용에 너무 놀란 나머지 청운은 자신의 심장이 자신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마구 두방망이질 치는 것을 느꼈다.
한동안 놀라움에 사로잡혀 있던 청운은 다시 일성의 공력을 삼공적에 주입해 힘껏 불었다.
그러자 돌처럼 굳어 있던 짐승들이 다시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와 조금 전 자신이 하다가 멈추었던 일을 그대로 재개했다.
말은 다시 말이 되었고, 다람쥐도 다시 다람쥐로 돌아왔고, 부엉이도 다시 부엉이가 되었다.
말은 자신이 울던 울음을 마저 울고는 허공에 치켜들었던 발을 땅에 내렸고, 부엉이를 피해 죽어라 도망가던 다람쥐는 다시 필사적으로 도망갔다.
다람쥐를 사냥하던 부엉이는 다시 밤의 그림자처럼 다람쥐를 노리며 날개를 활짝 폈다.
산새의 둥지로 오르던 구렁이도 다시 제 몸을 비틀며 나무를 스르르륵 오르고 있었다.
구렁이가 기어 올라가는 나무를 향해 담비도 가지를 박차고 있었다.
삼공적에 의해 멈추었던 시공간이 찰나의 순간에 다시 원래의 시공간으로 되돌아왔다.
기사도 이런 기사가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이 사실을 이야기하면 아마 열이면 열 모두가 자신을 보고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할 것 같았다.
삼공적의 음은 사람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고, 오직 짐승의 귀에만 들리도록 특이하게 발산되는 음파 같은 것이라고 청운은 확신했다.
청운은 입가에 한 가닥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의 목을 쓰다듬으며 뒷산을 천천히 내려왔다.
청운이 산을 내려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자 석가명이 청운에게 긴히 할 말이 있는지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석가명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며 살짝 머리를 숙였다.
청운도 석가명을 마주 쳐다보며 가볍게 묵례를 했다.
석가명이 청운의 얼굴을 지그시 건너다보며 말을 건넸다.
“소협, 기마술은 많이 늘었는지요. 밤에도 말을 타시는 걸 보니 꽤 재미가 붙으신 모양입니다.”
“덕분에 많이 늘었습니다.”
“그리고 가영이 때문에 많이 성가시지요, 아무리 혼을 내도 막무가내로 나대니 도저히 답이 안 나옵니다. 어릴 적부터 워낙 귀여움만 받고 자라서 그러니 강 소협께서 너그러이 이해해 주십시오.”
청운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가영이 문제는 전혀 괘념치 마십시오. 오히려 가영이 때문에 제가 위로를 받습니다. 애가 워낙 영특해서 같이 노는 제가 더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석 공자, 저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신 것 같은데 어려워 말고 말씀하십시오.”
석가명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짓더니 청운의 말을 곧바로 받았다.
“아이구, 소협에게 제 속마음을 다 들켜버렸군요. 이제 강 소협이 저를 저보다 더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 저… 사실은 오늘 아침나절에 섬서의 진무사령 주호영으로부터 서신을 받았습니다.”
“아, 그렇군요.”
“아무래도 재천신교 문제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건 바로 직후에 한 번 방문해 달라는 걸 여태껏 미루었더니 다시 연락을 한 것 같습니다. 강 소협, 내일 아침을 먹고 사시 경에 출발하면 어떻겠습니까.”
“좋습니다.”
“네, 여기서 한 오십여 리 밖에 안 되니 말을 타고 갔다 오면 채 저녁 무렵이 안 되어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랜만에 저와 성도에서 점심도 하시고요.”
“네.”
“그런데 문제는 가영입니다. 고것이 알면 틀림없이 자신도 소협을 따라가겠다고 떼를 쓸 것입니다. 여간 골치가 아닙니다.”
청운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석 공자, 그러시지요. 그게 뭐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오랜만에 성도의 바람도 좀 쐬고 좋지요. 치료도 중요하지만 저도 이렇게 석가장에만 있으니 사실 좀 따분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
“제 말은 저에 대한 석가장의 관심이 소홀해서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럼 내일 사시 경에 여기 별원 앞에서 저와 만납시다.”
* * *
귀신이 따로 없었다.
별원의 연못 앞에는 언제 나왔는지 가영이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한껏 차려입는 모습이었다.
머리는 삼단으로 땋아 내렸고 도화빛 경장을 말쑥하게 입고 있었다.
등에는 경장에 어울리는 봇짐까지 단단히 짊어지고 있었다.
도저히 말릴 수 없는 아이였다.
청운의 입에서 어이없는 헛웃음이 피식피식 새어 나왔다.
별원 앞에서 서성거리는 가영의 깜찍한 모습을 청운이 반 다경 정도 몰래 바라보고 있을 때, 석가명이 잡털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백마을 끌고 나타났다.
석가명은 가영을 보고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가영은 앙증맞게 혀를 쏙 내밀며 석가명이 내쉬는 한숨을 단박에 잘라먹었다.
청운도 채비를 하고 방을 나섰다.
청운을 본 가영이 청운에게 쪼르륵 달려오며 말했다.
“오라버니, 저도 따라가면 되지요. 나는 오라버니 옆에서 얌전히 있을 겁니다. 아무 말썽 부리지 않을 거예요. 그럼 됐죠. 자—아 이제 출발합시다. 추~울~발.”
청운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저리도 자신을 따라가고 싶은 아이를 어찌 떼어 놓고 간단 말인가.
청운은 가영을 번쩍 안아 들고는 자신의 말안장에 먼저 앉혔다.
가영 때문에 마음대로 말에 박차를 가하지 못해 빨리 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오늘따라 가영이가 유독 다소곳해서 다행히 관아까지 가는 길에는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길섶에 핀 이름 모를 꽃들이 발산하는 향기가 콧속을 가득 채웠다.
얼굴과 가슴팍에 살랑거리는 부드러운 봄바람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청운은 말안장까지 걷는 느낌이 오롯이 전달되는 말의 타닥타닥하는 리듬감은 특히 좋았다.
이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두 발로 걷는 것보다 말 타는 걸 더 좋아하는 것인가 하고 청운은 생각했다.
가영도 기분이 좋은지 관아로 가는 내내 콧소리까지 흥얼거렸다.
청운 일행이 관아에 들어서며 문지기에게 신분을 밝히자, 성문을 지키던 병사 하나가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그때 만불사에서 보았던 병사와 똑같은 은색의 무복을 입은 무사 하나가 성문 쪽으로 총총걸음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왼쪽 가슴에는 관館이란 글자가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었다.
무사가 청운 일행에게 공손하게 포권을 취했다.
청운과 석가명도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무복을 입은 무사가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소협, 주 사령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를 따라 오시지요.”
무사는 청운 일행을 동헌 뒤에 있는 별채로 안내했다.
무사가 별채에 다다르자마자 즉시 안에 대고 보고를 했다.
“진무사령님, 강 소협과 석 공자님께서 방금 도착하셨습니다.”
안에서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분을 안으로 모셔라”
무사가 월동문을 열어 주자 석가명이 가영에게 다른 곳에 함부로 나다니지 말고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야 한다고 다짐을 받은 후 먼저 들어갔다.
청운도 뒤따라 들어갔다.
다시 무사가 여닫이 당길문을 열자 진무사령 주호영이 자리에 벌떡 일어나며 청운 일행을 환하게 웃으며 맞이했다.
청운과 석가명이 가볍게 포권을 취하자 주호영도 포권을 취했다.
주 진무사령이 청운과 석가명에게 의자를 빼주며 앉으라고 권했다.
주호영이 청운과 석가명에게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강 소협, 석 소협. 그동안 별래무양하셨는지요. 저는 재천신교 사건 때문에 골치가 보통 아픈 게 아닙니다. 윗전에서 닦달이 보통이 아닙니다.”
“주 사령님께서 참으로 고민이 많으시겠습니다.”
“현재 삼 황자께서 재천신교 문제를 전담하고 계십니다. 삼 황자가 어디 보통 분입니까. 철두철미하고 보통 깐깐하지 않습니다.”
청운과 석가명은 삼황자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나라의 국기가 흔들리는 엄청난 사건이 아니면 황자는 거의 국사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런데 삼황자라니…….
그것은 나라에서 재천신교 문제를 그만큼 엄중하게 보고 있다는 증거와도 같았다.
청운과 석가명의 놀라는 모습을 슬쩍 훔쳐보던 주호영이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재천신교 무리들이 발호할 때마다 매번 우리 진무사 무사들이 총출동을 하지만, 그때마다 조무래기들과 광신도들만 걸려들고 수뇌부들은 모두 미꾸라지처럼 달아나서 우리도 맥이 탁 풀릴 지경입니다.”
“…….”
“재천신교의 교주와 수뇌부 인물들을 한시라도 빨리 체포해야 일을 마무리 할 텐데, 아직도 누가 교주인지조차 도대체 알 수가 없으니, 이 일이 보통 난망하지 않습니다.”
석가명이 주호영의 하소연과 너스레에 화답하듯 말을 받았다.
“하루빨리 그런 사악한 무리를 이 땅에서 일망타진해야 할 텐데… 보통 큰일이 아닙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무엇이든 어려워 말고 말씀하십시오.”
석가명의 말은 금전적 지원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석가명의 말에 주호영이 만면에 웃음기를 띠며 반색을 했다.
하긴 세상에 돈 없이 되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고 청운은 생각했다.
법과 도덕, 책임감 같은 것들이 겉보기에는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상은 돈이 그 모든 걸 한꺼번에 움직인다.
그래서 누구든 돈이 있어야 세상으로부터 더 좋은 대접도 받고 인정도 받는다.
그게 당연한 세상의 인심이라고 청운은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입맛이 썼다.
석가명을 바라보며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주호영이 다시 하던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