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72화 (72/184)

072화 잃는 것과 얻은 것

청운이 얻은 것은 [악학천보]를 통해 음공에 눈을 뜬 것이었다.

여러 가지 악기의 사용법과 그 묘용에 대한 이해는 자신의 강호행에 혹시라도 맞닥뜨릴지 모를 음공의 공격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는데 적지 않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전부는 아니지만 삼공적의 비밀을 일부라도 알게 된 것이 무엇보다 소중한 소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청운은 소림에 들렀다가 하산하는 길에 성도에 들러 괜찮은 피리와 악보를 아예 따로 하나 장만할 작정이었다.

이참에 피리 연주를 취미로 삼아볼 생각이었다.

청운은 자신이 피리를 불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묻어나는 걸 느꼈다.

청운이 석가장에 머무는 동안 얻은 가장 큰 소득은 뭐니 뭐니 해도 자신의 무공을 한 차원 더 끌어올린 것이었다.

그 새로운 성취는 청운의 노력도 노력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제갈신의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제갈신의는 치료를 핑계로 석가장의 약방에 있는 온갖 진귀한 영약을 아낌없이 청운에게 내주었다.

게다가 그의 침술이 워낙에 신묘해 그동안 청운의 몸속에 잠재해 있었으나 서로 조화되지 못하고 제각기 따로 놀았던 네 가닥의 각기 다른 힘을 한 단계는 더 발현시켰다.

무공이 한 단계 더 높아지자 그동안 될 듯 말 듯 이해되지 않았던 검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저절로 얻어졌다.

무인에게 무공은 어제의 자신을 극복해 오늘 다른 자신을 태어나게 해주는 매개다.

무인과 무공의 관계가 바로 무인과 강호의 관계 그 자체다.

무인에게 무공은 어떤 특별한 한순간의 기적을 통해 순식간에 얻어지는 성공의 대가라기보다는 오히려 끊임없는 스스로의 자각과 각성의 과정에서 얻어지는 부산물과 같은 것이다.

자신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와 대적하는 순간순간의 실패와 실수의 누적을 통해 얻은 작고 사소한 깨달음.

그것이 무수히 쌓이고 쌓여 비로소 한 단계 더 높은 곳에 간신히 한 발을 올려놓는 것이 무공의 본질 같다고 생각했다.

무공의 근본에 관한 이 새로운 자각을 통해 청운은 자신의 검에 대해서도 새로운 이해를 했다.

진정한 검의 힘은 스스로 발현하는 깊이에서 나온다.

어떤 생각과 관념으로도 내가 검을 가두지 말아야 검 역시 그 상황에서 스스로 자신을 제한하지 않는다.

그럴 때 비로소 나를 떠난 검은 자신이 발생한 조건을 넘어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갈 것이다.

처음에는 분명 나의 의지가 검을 세상에 내어 보내나 최종에는 검이 스스로 변하며 자신의 길을 찾을 것이다.

결국 나는 내가 만들어 낸 검초 속에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

바로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진정한 무위의 검이다.

하지만 그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검을 전개하는 순간, 나와 검은 이미 서로에게 속해 서로를 놓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경지는 나와 검 혹은 검과 나 사이의 관계가 처음부터 다시 재정립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 * *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고개를 들자 눈길이 가닿는 길의 끄트머리에 웅장한 산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소림사를 품은 숭산이었다.

아니, 소림사가 그 속에 있기에 더 크고 높게 보이는 숭산이었다.

숭산이 아무리 중원의 오악 중에 중악에 속할지라도 그것은 절대로 변할 수 없는 불변의 사실이었다.

천축에서 중원에 불법을 전하기 위해 온 보리달마가 갈댓잎 하나로 장강을 건너 숭산의 고요한 소실봉 아래 터를 잡은 후 본격적인 중원의 무학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달마 이전에도 중원에는 여러 유파의 잡다한 무학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체계적이지도 유기적이지도 않았다.

달마선사가 자신을 따르는 선승들의 호신연담(護身練膽)을 위해 짐승들의 몸동작을 본떠 소림권을 창안한 이래로 중원의 무학은 비로소 진정한 체계가 만들어지고 유파가 태동되었다.

그 이후 누대에 걸친 무수한 무공의 천재들이 자신이 창안한 진산절예들을 자신의 본산에 헌정하면서 중원의 무학은 발전의 발전을 거듭해 지금에 이르렀다.

장경각에 비치된 달마역근경을 비롯한 소림의 무공은 워낙 방대하고 난해해서 소림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지금껏 아무도 그것을 모두 익힌 사람이 없다고 강호에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강호에서 혁혁한 무명을 떨친 대부분의 소림승은 소림의 진산절예를 많이 익힌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질에 맞는 몇 가지 절기를 대성한 사람이었다.

오늘 청운이 대적해야 하는 무여대사도 그런 소림승 중 하나였다.

그는 현 소림방장인 무오대사의 사제로 어린 시절부터 무공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고 세간에 알려져 있다.

그는 타고난 재능에 자만하지 않고 부단한 노력을 통해 마침내 모든 선승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소림의 삼대성승 중 일인이 되었다.

그의 무공 수위는 달마대선공을 대성한 자신의 사형인 무오대사보다 오히려 한 수 위로, 강호에 소문이 자자했다.

아무리 강호의 소문이 근거가 미약하고 황당한 측면이 많다고는 하지만 무여대사에 대한 강호의 평가는 상당 부분 진실을 담고 있었다.

그는 대반야금강공을 바탕으로 대력금강권과 천수여래장을 대성했다고 세간에 알려져 있었다.

향화객들이 띄엄띄엄 숭산을 오르고 있었다.

청운은 신법을 전개하면 순식간에 소림사의 산문에 닿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향화객들보다 더 천천히 산길을 걸어 올라갔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강력한 상대와 대적을 앞두었을 때마다 청운은 그런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하며 청운은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저만치 일주문이 보이자 두렵다는 그 생각이 자신의 뇌리를 핥는 대호의 혀처럼 느껴졌다.

정의고 불의고 간에 청운은 그만 돌아서고 싶었다.

하지만 산문을 본 이상 이미 그럴 수는 없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두려움 때문에 위축되어 제자리만 맴도는 것은 살아도 살고 있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에게 가장 나쁜 것은 죽음이다.

청운은 해야만 하는 일을 빤히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역시 살아 있는 죽음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전자의 죽음이 몸의 죽음이라면, 후자의 죽음은 혼의 죽음이다.

죽음이라는 측면에서 둘의 차이는 전혀 없을지도 모른다.

청운은 하지만 진짜로 죽어서 죽는 것과 살아서 죽어 있는 상태는 엄연히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다 하는 것이 바로 진정으로 사는 것이다.’

청운은 자신의 생각을 다시 한 번 다잡았다.

청운은 산문을 들어서자마자 산문 왼편에 수백 년 된 노거수에 걸려 있는 사람의 키만 한 은원고를 힘차게 세 번 쳤다.

은원고는 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 강호의 은원을 해결하고자 소림이 강호에 제시한 타협의 산물이었다.

소림에 은원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소림의 산문에 걸려 있는 은원고를 세 번 치면 된다.

그러면 정법당에 속한 승려가 내려와 은원고를 친 사연을 듣고 방장에게 보고를 하면 방장이 사건의 경중을 따져 일을 처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무림의 은원이라는 것이 워낙에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타협이 힘들 때가 훨씬 더 많다.

그래서 대부분 강호의 은원은 서로의 잘잘못을 규명하기도 전에 무력의 고하에 의해 해결 아닌 해결이 되고 만다.

그런 까닭에 은원고로 해서 소림은 강호인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잠시 후, 산문 앞에 머리에 여섯 개의 계인이 선명한 젊은 승려가 날아 내렸다.

기개가 헌앙하고 눈빛이 형형한 그 승려는 청운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승려가 청운에게 공손하게 합장을 취한 후 불호를 나직이 읊조리고는 말했다.

“아미타불! 소협, 빈승은 정밥당에 속한 정각이라 하옵니다. 소협은 누구신데 은원고를 치셨습니까. 어떤 연유가 있는지 저에게 말씀하시지요.”

청운도 마주 합장을 한 후 정각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안휘연 출신의 강청운이라 합니다. 귀사의 성승이신 무오대사님에게 볼 일이 있어 이렇게 실례를 했습니다.”

청운의 이름을 듣고 난 정각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다시 청운에게 물었다.

“혹시, 요즈음 강호에서 혁혁한 무명을 떨치고 계시는 무위검 강소협이신지요.”

청운이 다시 대답했다.

“제 무명은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저를 무위검으로 부르는 것은 확실합니다. 윗전에 기별을 넣어주시지요.”

정각이 다시 청운에게 물었다.

“혹시 무슨 연유로 무오사숙님을 만나려고 하시는지 제가 알 수 있을까요.”

청운이 다시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 사안이 워낙 중대한지라 직접 방장선사와 무오대사님을 만난 자리에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청운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각은 두 손을 모아 휘파람을 크게 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각과 마찬가지로 머리에 여섯 개의 계인이 뚜렷하게 찍힌 승려 하나가 거의 날다시피 일주문 앞에 당도했다.

그 승려가 불호를 외우며 청운에게 합장을 했다.

“저는 정해라고 합니다. 저를 따라 오시지요.”

청운이 정해를 따라 객당으로 가는 사이에 정각은 소실봉 쪽으로 바람처럼 날아갔다.

정각의 신법은 청운 자신에 비해 그다지 처지는 것 같지 않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신법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정각의 무위가 상당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하긴 정각은 소림의 후기지수 중에 가장 강하다는 십대 신승 중 첫 번째로 꼽는 무승이기도 했다.

정각은 아마도 무위검 강청운이 갖고 온 사안이 상당히 엄중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정각의 신법을 한 번 흘끔 바라본 후 청운은 정해를 따라 객당으로 향했다.

정해는 객당까지 가는 길에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청운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해는 청운을 객당으로 안내 한 후, 잠시 밖으로 나갔다가 한 손에 찻주전자와 찻잔을 든 소반을 들고 다시 들어왔다.

그는 청운에게 차를 한 잔 따라주고는 다시 나갔다.

청운은 차를 마시며 아무도 없는 객당을 한 번 쓱 둘러보았다.

객당 정면 눈높이 정도 되는 벽에 누구나 아는 글귀 하나가 걸려 있을 뿐, 일체의 다른 장식은 없었다.

글귀는 다음과 같았다.

[諸行無常 제행무상 — 이 세상에는 변하는 것만 변하지 않는다.

諸法無我 제법무아 — 이 세상에 모든 사물은 인연으로 생겼으며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물끄러미 글귀를 쳐다보고 있던 청운은 모든 것은 궁극에서 서로 통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청운은 무공이든 종교든, 학문이든 처음에는 모두 다른 길로 정상을 추구하지만 궁극에는 그 길들이 동일한 차원에서 서로 만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외형적으로는 종교는 도를 구하는 것이고, 학문은 세상과 삶에 대한 이해와 지혜를 구하는 것이다.

무공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전능한 힘을 구하는 것이지만, 그 모두가 자신이 선택한 길의 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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