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화 갑자기 궁금증이 또 발동했다.
객점으로 들어서자마자 청운은 잉어찜과 소홍주 한 병을 주문했다.
객점은 저녁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청운은 창밖으로 여여하게 흐르는 적벽의 강물을 내다보며 느긋하게 잉어찜과 반주를 즐겼다.
커다란 잉어찜에 소홍주 한 병을 남김없이 다 해치운 청운은 적당한 포만감과 취기를 느끼며 객점 밖으로 나왔다.
적벽 주변엔 굽이치는 물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달이 있었다.
보름 동안 열심히 자신의 몸집을 키운 달이 강물 위에 휘영청 떠 있었다.
세월 같은 강물이 흐르거나 말거나 아무 관심 없는 달은 오로지 강물에 비친 제 얼굴만을 줄기차게 비춰보고 있었다.
강물도 달이 제 몸속을 들여다보거나 말거나 제 갈 길만 속절없이 가고 있었다.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 한적하고 적막한 밤에도 자연은 오랫동안 자신이 해왔던 일을 오늘도 쉼 없이 하고 있었다.
청운이 달 밝은 강가에서 호젓한 상념의 호사를 누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나직하면서도 청아한 음률이 들릴 듯 말 듯 들려왔다.
그 소리는 너무나 가늘어 들리는 듯 들리지 않다가 다시 들렸다.
청력을 돋우어 들으니 그 소리는 금琴을 뜯는 소리 같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음률이었다.
갑자기 청운의 궁금증이 또 발동했다.
그 소리의 진원지는 적벽의 물길이 굽어 도는 강가에서 이백여 장 정도 뭍으로 들어간 야트막한 산속이었다.
청운은 자신도 모르게 아름다운 음률에 이끌려 그 산길을 걸어 들어갔다.
소리의 진원지는 소나무 숲이 우거진 자그마한 산장이었다.
<수월산장>이라는 자그마한 현판이 걸려 있었다.
청운은 지그시 눈을 감고는 산장의 담벼락에 기대에 금琴을 타는 소리를 감상했다.
그 소리는 잔잔하게 흐르다가 한순간 격정이 일고, 그 격정이 절정으로 치닫다가 다시 격정이 가라앉고 잔잔하게 흐르기를 반복했다.
음률은 듣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한순간에 들었다 놨다 했다.
청운은 참으로 대단한 솜씨라고 생각했다.
음률만 듣고 있어도 금琴 뜯는 사람의 손길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청운은 그 음률의 정서에 취해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청운이 그만 가야겠다고 몸을 돌렸을 때, 산장 안에서 자신을 청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청운은 설마, 하며 다시 발길을 돌리려고 했을 때 아까보다 더 분명하게 자신을 산장 안으로 초대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예까지 힘든 발걸음을 하신 김에 들어오셔서 차라도 한 잔 들고 가시지요.”
나직한 중년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틀림없이 그것은 자신을 청하는 소리였다.
청운이 산장의 문을 살짝 열고 들어서자 예의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손님, 불이 켜진 별채로 곧장 오시면 됩니다.”
청운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괜히 한숨 한 번 잘못 내쉬는 바람에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청운은 될 대로 되겠지 하면서 산장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이 모든 사태의 근본 원인은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의 호기심 때문이라고 청운은 자신을 자책했다.
청운이 불이 켜진 별채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길을 지나던 불청객이 호기심이 너무 과해 결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저는 안휘현의 강청운이라고 합니다.”
그 순간 안에서 방문이 활짝 열리며 사십 대 중반 정도의 중년인이 대청마루로 나왔다.
그 중년인은 청수한 얼굴에 문사 차림을 하고 있었다.
청운이 방으로 들어서자 중년인의 미부인이 청운을 반갑게 맞았다.
중년인이 청운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공자, 이쪽은 제 내자입니다. 자, 이리 앉으시지요. 차나 한 잔 하시지요. 저는 누구라도 제소리를 알아주는 사람을 이 세상에서 가장 반깁니다.”
“이렇게 반갑게 맞아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백아와 종자기의 ‘백아절현’의 고사를 아시는지요.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소리를 알아주던 종자기가 죽자 백아가 자기 거문고의 줄을 끊어 버리고 다시는 거문고를 잡지 않았다지요.”
“네.”
“저는 제 금琴을 알아듣는 사람이 이렇게 젊은 공자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하.”
“모름지기 어느 정도 인생에 대한 연륜과 깊이가 있어야 진정한 소리를 알 수 있다는 생각을 저는 늘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젊은 분이 제소리를 알아주다니 기쁨을 넘어 감격스럽기까지 합니다.”
“지나친 과찬이십니다. 저는 적벽의 강바람을 쇠러 나왔다가 우연히 아름다운 금을 뜯는 소리에 이끌려 이렇게 두 분께 결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청운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그리고 저는 음에 정식으로 입문하지 않아 음을 잘 모릅니다. 두 분께 많은 지도 편달을 바랄 뿐입니다.”
다시 그 중년인이 말을 받았다.
“젊은 공자분이 예의도 무척 밝으시군요.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는 데는 말만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말과 몸짓과 표정이 물론 사람 사이 소통의 기본적인 수단이기는 하지만 진정으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예술藝術뿐이지요.”
“…….”
“그 중에서도 음은 시詩나 그림에 비해 훨씬 더 더 근원적이고 감각적이지요. 음에 대한 입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꾸 들어서 잘 느끼기만 하면 됩니다. 공자께서는 제소리를 듣고 이곳까지 오셨으니 이미 음에 입문한 것이나 마찬가지이지요.”
청운은 그 중년인이 진정한 음악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음에 대해 그 어떤 편견도 없이 열린 사람이었다.
모든 예술도 결국은 인간의 삶에 관한 것일 뿐이다.
그 누구의 삶도 더 고차원적이고 저차원적일 수는 없다.
따지고 보면 농부건 장사꾼이건 고관대작이건 간에 모두가 단 한 번 태어나고 살다 죽을 뿐이다.
삶의 본질이 그럴 건데 더 가치 있고 가치 없는 삶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는가?
편견을 가진 사람은 그런 삶의 본질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
그런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은 진정한 예술을 할 수가 없다.
오히려 진정한 예술은 그런 편견을 깨부술 때 그 본령이 드러난다.
청운이 이런저런 생각에 몰두하고 있을 때 그의 부인이 어느새 술상을 봐서 들고 왔다.
그가 청운에게 술을 한잔 따라주며 말했다.
“이곳 산장은 성도와 많이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손님이 와도 대접할게 변변찮습니다. 이 술은 제 내자가 이곳 야산에서 나는 송이를 따다가 담근 것입니다. 장안의 명주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송이 향이 제법 그윽합니다. 한잔 드셔보시지요.”
중년인의 말대로 술에서는 짙은 송이 냄새가 났다.
그의 겸손과 달리 성도의 어디에서도 이런 술맛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청운은 밤중에 길을 가다 때 아닌 황금을 주운 기분이었다.
청운이 그와 몇 순배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얼큰하게 취기가 돌 때쯤 그가 한잔을 더 따라 주며 말했다.
“제 내자가 저래 보여도 거문고에 상당한 조예가 있습니다. 심심할 때 저와 이따금 합연을 하기도 합니다. 저는 금을 뜯고 아내는 거문고를 타지요.”
“그렇군요.”
“어떻습니까. 공자. 기분도 적적한데 저희 부부의 합연을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불편하시면 사양하셔도 됩니다.”
청운은 그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한편으로는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미안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한 음이 어떤 경지인지 몹시도 궁금했다.
청운은 두 사람에게 깍듯이 예를 취하며 말했다.
“저 때문에 그런 수고까지 해주시다니 너무나 감격스럽습니다. 두 분의 경지를 제 귀가 따라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감을 기울여 경청하겠습니다.”
중년인 부부는 금과 거문고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리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몇 번 가볍게 줄을 튕기며 소리를 조율하더니 본격적으로 합연을 시작했다.
부부여서 그런지 서로의 음률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화음이었다.
그들의 합연은 어느 순간은 감미롭고 또 어느 순간은 격렬하다가 다시 부드러워지고, 단조롭다 싶으면 복잡해지고,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거리다가 갑자기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듯했다.
음을 잘 모르는 청운이 듣기에도 그들의 연주는 사람이 자기 내면에 잠복한 모든 오감을 깨우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절묘한 화음을 이루었다.
청운은 채 일각도 지나지 않아 그들의 연주에 완전히 심취해 버렸다.
그렇게 일 다경쯤 지났을까.
그들의 연주가 이제까지와는 달리 갑자기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부드러움과 감미로움과 따뜻함은 어느새 음율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청운은 내심 놀라면서도 이건 또 무슨 경지인가 싶어서 하나의 음도 놓치지 않으려고 더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청운은 갑자기 기혈이 진탕되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청운은 아차, 싶었다.
그들의 연주가 조금 전과는 달리 청운의 내면과 모든 오감을 파괴하듯이 휘몰아쳤다.
그제야 청운은 자신이 어떤 음공의 마수에 걸려든 것을 간신히 알아챘다.
청운은 치우전륜공을 일으켜 그들의 음에 대항했다.
청운이 자신들의 음에 대항하는 걸 알아챈 그들 부부의 음공은 점점 더 난폭해지고 독날해졌다.
온몸의 혈과 맥이 벌에 쏘인 듯 따갑고 금방이라도 전신의 기경팔맥이 뒤집힐 듯이 진탕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목젖까지 올라오는 핏덩이를 확 토해 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생목숨을 저들의 손에 내맡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위험한 행위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일단은 무조건 버텨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청운도 계속 내력을 더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대결의 승패는 오로지 누가 더 오래 버티느냐에 달렸다.
문제는 청운은 혼자이고 그들은 둘이라는 점에 있었다.
상대는 서로 번갈아 음공으로 청운을 공격할 수 있는 반면에 청운은 그 둘의 음공을 오로지 자신의 내력만 대항해야만 했다.
이것은 청운의 내력이 그들 둘의 내공을 합친 것 이상이어야 청운에게 승산이 있는 대결이었다.
청운은 저들의 합연을 어떻게든 깨트려야 한다는 마음은 굴뚝같은데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산장 밖에서도 호시탐탐 자신을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았다.
청운은 기경팔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고통에 절대 사용해서는 안 되는 원정지기마저 끌어올리고 있었다.
나중에 몇 년 더 사는 것보다 지금의 목숨을 지키는 것이 더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검이나 도로 하는 대결에서는 상대가 아무리 초고수라 하더라도 초식과 초식 사이에 찰나의 틈이 있다.
계속 수세에 몰리던 사람도 그 찰나의 공백을 파고들어 상황을 일순간에 반전시킬 수고 있다.
하지만 음초와 음초 사이에는 그 어떤 이음새도 없다.
그것을 뻔히 알기에 청운은 다른 동작을 취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