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화 혹자는 그를 검계제일인이라고도 칭했다.
청운은 천리신개에게 다시 한 번 가볍게 묵례를 하고는 말했다.
“전 중원에 그 명성이 드높은 방주님을 직접 대면하게 되어 저도 무척 기쁩니다. 그리고 저에 대한 방주님의 말씀은 너무 과찬이십니다.”
청운의 말을 들은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청운은 말을 이어 갔다.
“저는 여전히 부족한 게 너무 많은 강호의 신출내기일 뿐입니다. 부풀려진 명성은 몸에 맞지 않은 거추장스러운 옷일 뿐이니 과한 칭찬은 거두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청운의 말을 받아 이번에는 형주의 진무부사령 가위연이 청운에게 말을 걸었다.
“형주 진무부사령 가위연이라 합니다. 강 소협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오랫동안 골머리 썩히던 숙제를 하나를 시원하게 해결한 느낌입니다.”
“다행입니다.”
“진무사에서는 최근에 중원에서 아편 환자들이 폭증하고 있어 은밀히 내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이 흑선이 저희 정보망에 걸려들었습니다. 이번 사건의 해결에는 여기 계신 개방 방주님의 도움이 지대했습니다.”
“…….”
“그리고 원래 오늘 이 자리에는 형주의 진무사령님이 직접 출동하셔야 하는데 요즘 중원 곳곳에서 발호하고 있는 재천신교의 문제로 진무사 무사들 대부분을 대동해 다른 지역에 출타 중이어서 부득불 제가 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진무사 무사들 거의가 진무사령님을 따라가는 바람에 관병 중에서 그래도 무공이 뛰어난 자들을 차출해서 오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진무사 무사들과는 무공 수위에서 차이가 확연해 다수의 관병이 죽거나 중한 부상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
“그래도 혼원벽력도 대협과 방주님 그리고 무위검 강 소협께서 때맞춰 나타나시는 바람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진무부사령 가위연은 말을 마치면서 다시 한 번 모두에게 머리를 숙였다.
청운이 궁금한 것이 있어 그에게 말을 붙였다.
“진무부사령님, 배의 선실을 수색할 때 뭔가 특별한 걸 발견하신 것이 있습니까.”
청운의 질문에 진무부사령이 곧바로 대답했다.
“인신매매를 위해 감금한 사람들과 다량의 화약과 무기 그리고 희한하게도 어떤 장소를 그린 두루마리 지도가 몇 개 있었습니다. 그 배는 나라가 금하는 불법적인 물품을 밀거래를 하는 흑선이었습니다.”
가위연이 말을 다 끝내자, 천리신개가 호탕하게 웃더니 청운과 팽추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자, 이곳 선박의 정리는 진무부사령에게 맡기고 우리는 쓴 곡주라도 한잔하러 갑시다. 오늘 이 거지가 한턱 확실히 쏘겠습니다. 좀 전에 내가 형주분타주에게 술상을 봐두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자, 그리로 가시지요.”
청운은 현성이의 상태가 궁금해서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타인의 호의를 함부로 거절하는 것은 강호의 예법도 아닐뿐더러, 그 호의를 베푼 사람이 개방의 방주라면 천하의 그 누구도 그의 초청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도 그의 면전에서.
* * *
술판이 벌어진 곳은 이곳 현장에서 삼십여 리 떨어진 개방의 안가였다.
산해진미와 진수성찬은 아니었으나 하룻밥을 즐기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정갈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개방은 무조건 더럽고 지저분할 것이라는 생각은 한낱 강호의 편견에 불과했다.
권커니 잣거니 하던 술잔이 몇 순배 돌자 불콰하게 취한 천리신개가 말했다.
“어이구 말세다 말세여. 아니 난세야, 난세. 요즘 강호에는 단 하루라도 사건 사고가 터지지 않는 날이 없으니, 이 일을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도통 계산이 서질 않네. 지금 강호의 발밑에서 거대한 암류가 흐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네.”
“그렇습니다.”
“天과 재천신교도 뿐 아니라 난데없이 검선과 흑황의 장진도가 나타나 혼란을 부추기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동영의 흑선까지 나타나 분탕질을 해대니. 이 일을 어찌할꼬. 이 혼란이 하루빨리 끝이 나야 할 텐데. 참으로 걱정이네.”
청운은 그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공감하였다.
그때, 천리신개는 청운에게 말을 물어왔다.
“나와 팽 대협은 혹시나 天과 관련성이 있을까 싶어 흑선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다가 때맞춰 그곳에 가게 되었네만 소협은 어떻게 그때 그 순간에 딱 맞춰 그곳에 도착했는가.”
청운은 자신의 잔에 반쯤 남은 술을 마저 마시고는 말했다.
“회천강 나루터 근처에서 점소이로 일하던 저희 문도 한 명이 실종되어 추적하던 와중에 그 배가 의심스러워 잠입하게 되었습니다. 무사히 문도를 구하기는 했으나 상태가 영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걱정입니다.”
청운이 다시 자신의 말을 이었다.
“제가 저희 문도를 구출하기 위해 선실로 내려갔을 때 혈월막 수뇌부들과 누군가가 나누는 대화를 잠시 엿들었습니다.”
“그래, 뭐라던가?”
“그들의 입에서 상제上帝와 회주會主가 이러니저러니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이번 흑선 사태의 주모자인 것 같았습니다. 혹시 그들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으신지요.”
천리신개가 곧바로 청운의 말을 받았다.
“상제上帝와 회주會主라. 금시초문일세. 그런 호칭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네. 지금 이 자리에서 소협에게서 듣는 것이 생전 처음이네. 내가 개방의 전 방도를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알아보겠네.”
청운이 현 강호의 혼란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자 천리신개와 혼원벽력도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천리신개가 한동안 청운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정말로 너무 궁금해서 그렇다고 하면서 청운의 검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물어왔다.
청운은 또 그건가 하며 이젠 그런 질문이 너무 지겹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청운은 속마음을 전혀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저희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양생법을 토대로 제가 무술로 응용해 본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조상은 한족이 아니라 동이족입니다.”
청운은 한 시진 정도 더 있다가 문도가 걱정되어 이만 가 봐야 하겠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천리신개가 밤이 깊으니 자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청운은 마음만 받겠다고 말한 후 밖으로 나왔다.
그들이 문 앞까지 배웅하려는 걸 청운이 극구 말렸다.
청운은 개방의 안가에서 나오자마자 곧바로 경신술을 펼처 하오문의 형주 분타로 향했다.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 채 일각도 안 되어 형주분타에 도착했다.
청운이 문을 밀고 들어서자 문도 하나가 안에다 대고 소리를 쳤다.
“분타주님, 호법사자님이 오셨습니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분타주 양춘호와 부분타주 진소구가 곧바로 뛰쳐나오며 청운에게 포권을 취했다.
청운이 가볍게 묵례를 하고는 현성이의 상태에 대해 다급하게 물었다.
양춘호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삼호사자님이 현성이를 이곳에 데려오자마자 제가 곧바로 근처에서 가장 유명한 의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
“그런데 의원이 침을 놓고 탕재를 달여 먹여도 여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기적으로 학질에 걸린 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도 합니다. 그곳 의원도 현성이가 무슨 중독 같기는 한데 자신도 잘 모르겠다며 날이 밝으면 성도에 있는 더 큰 의원으로 가 보라고 했습니다.”
청운이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다 양춘호에게 말했다.
“제가 서찰을 한 장 써 드릴 테니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석가장의 제갈신의께 현성이를 데리고 가십시오. 제갈신의라면 현성이를 틀림없이 잘 치료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석가장에 문도 하나를 남겨 두고 현성이의 수발을 들게 하십시오.”
청운은 양춘호에게 서찰을 써 주고 곧바로 안가로 돌아왔다.
근래 연이은 격전으로 인해 청운은 몹시 피곤함을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 닌자들을 상대할 때 갑작스레 내력을 끌어올린 탓에 간신히 다스려 놓았던 내상이 또 살짝 도진 것 같았다.
그만큼 적음쌍마와 천강혈시와의 격전에서 입은 내상이 중했다.
또 한 열흘은 족히 정양해야 안정이 될 것 같았다.
내상 때문에 무당행이 자꾸만 미루어지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청운은 살다 보면 뜻대로 되는 일보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더 많다고 자문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청운은 제갈신의가 처방한 환약을 한 알 삼킨 후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연달아 대주천을 세 번이 하고는 눈을 번쩍 떴다.
제갈신의가 처방한 약은 정말 효과가 탁월했다.
열흘 후에는 천지가 개벽해도 무당산에 오르겠다고 작심을 한 후 청운은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 * *
늦봄인데도 안개가 자욱했다.
무당산은 마치 안개의 고향 같았다.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를 헤치며 흑의의 무복을 단정하게 입은 한 젊은 사내가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그 젊은 사내의 키는 보통의 청년들보다 삼사 치 더 크고 몸은 단단한 근육질이다.
그의 외모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심연보다 더 깊은 눈빛이다.
그 눈빛과 더불어 그 나이 정도의 젊은이로서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중후하고도 무거운 기도가 은연중에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심연보다 더 깊은 눈빛과 나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웅후한 기도를 가진 그 청년은 바로 청운이다.
청운은 오늘 무당의 적송자를 만나 담판을 지으려고 작심하고서 무당산을 오르는 중이다.
적송자는 얼마 전에 상대했던 화산의 육검자나 소림의 무여대사보다도 한 배분이 더 높은 무림의 노선배다.
적송자는 현 무당장령인 현진자의 사숙으로 그의 나이는 육십이 훨씬 넘어 거의 칠십에 가깝다고 했다.
그만큼 그의 무위도 더 고강하다고 강호에 소문이 나 있었다.
그는 무당의 진산절기인 양의무극신공을 바탕으로 양의검법과 태극혜검을 대성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기존의 양의검법과 태극혜검을 새롭게 해석해 무당검의 차원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려 놓았다는 세간의 평가를 받고 있기도 했다.
무당의 속사정에 대해 좀 아는 사람들은 서슴없이 그를 무당제일검을 불렀다.
혹자는 그를 검계제일인이라고도 칭했다.
저만치 산문이 보였다.
산문 옆에는 그리 크지 않은 연못이 있고 연못 주변의 노거수에는 희한하게도 검과 도와 창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무기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그 연못이 바로 무당의 해검지였다.
무당을 오르는 자는 누구든지 그 연못 앞에서 무기를 풀어야만 한다.
하지만 청운은 해검지에서 자신의 무영검을 풀지 않을 생각이었다.
청운은 산문의 옆으로 난 샛길로 해서 해원대로 바로 오를 생각이었다.
해원대는 무당과 은원이 있는 사람이 오르는 곳이다.
해원대에 올라 북을 세 번 치면 무당의 제자 중 한 명이 달려 나와 북을 친 사람의 사연을 듣고 무당장령과 은원의 대상인 당사자에게 통보를 한다.
그러면 지목된 당사자가 해원대로 나와서 북을 친 사람과 은원을 해결해야만 한다.
그 해결책은 말일 수도 있고 검일 수도 있다.
그것은 사안의 내용과 경중에 따라 매번 다르다.
무림과 관련된 일은 대부분 말보다 검으로 가려지는 경우가 허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