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92화 (92/184)

092화 노부가 헛살아도 한참을 헛살았구나.

수라마군의 입에서 또다시 산중의 야밤을 찢어발기는 폭갈이 터져 나왔다.

“수—라—멸—천.”

청운의 입에서도 동시에 밤의 깊은 적막을 파열시키기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쾌—타—절—변—회—접—척—파—척.”

또다시 두 사람의 도와 검에서 폭사된 도기와 검기가 서로의 중앙에서 폭발했다.

이미 그들의 주변에는 사방으로 날아가거나 허공으로 솟구칠 만한 나무도 바위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청운의 자황색 검기와 수라마군의 묵빛 도기만이 텅 빈 가을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대신 그들이 조금 전까지 디디고 있었던 땅거죽이 통째로 벗겨져 사라졌다가 한참이나 지나서 우박이 떨어지듯 땅으로 투두둑 떨어져 내렸다.

그들의 옷은 이미 누더기로 변한지 오래였고 서로의 검기와 도기가 스친 피부에는 방울진 혈흔이 스멀거리며 삐져나왔다.

수라마군이 경탄의 탄성을 내뱉으며 말했다.

“아이야, 내가 조금 전에 했던 말을 전면 취소해야겠구나. 네 나이 때의 제혼마검과 지금의 너를 비교한 것은 나의 엄청난 오류였다. 이미 너는 그와 겨룰 수 있을 정도다. 삼 년만 지나면 네가 무조건 그를 이길 것이다. 내가 장담한다.”

“…….”

“하지만 아이야, 그래도 나는 오늘 너의 목숨을 거둘 수밖에 없구나. 너무나 안타깝지만 어쩔 수가 없구나. 이번 초식은 아까와 아주 다를 것이다. 이 초식이 마지막이다. 그럼 잘 가거라. 아이야.”

수라마군은 이번에는 아무 소리도 내뱉지 않고, 그냥 청운을 향해 자신의 도를 느릿하게 밤하늘에 찔러 넣었다.

청운은 그의 마지막 초식을 보고는 탄성을 내뱉었다.

아!

수라마군의 마지막 초식은 무당제일검 적송자의 그것과 유사했다.

그의 묵도는 허공에 박아 놓은 듯 가만히 그의 오른팔을 들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의 도에서 던져진 수천 가닥의 도기가 시공간을 지우며 청운의 전실요혈로 쇄도했다.

그의 도기가 그냥 보기에는 아주 느릿한 것 같았으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그의 도기는 도기 자체가 빠른 것이 아니라 찰나에 시공간을 압축해 버리기에 빨라도 너무 빨랐다.

그의 마지막 초식은 도와 도기 사이에 존재했던 시공간 자체를 제거해 버렸다.

그래서 그가 도기를 떨친 순간이 바로 상대의 요혈에 도기가 가닿는 순간이었다.

이번에 소리를 지른 쪽은 청운뿐이었다.

일순간 청운의 외침이 밤의 대기를 뒤흔들었다.

“며—으—을—화—아—안—”

이번에는 폭음도 굉음도 전혀 없었다.

아니, 폭음과 굉음이 너무 찰나적으로 일었다 사라져 버렸기에 마치 아무 소리도 나지 않은 것처럼 들렸을 뿐이었다.

인간의 청각을 넘어서는 빠른 고음은 인간이 아예 들을 수 없기에.

청운과 수라마군이 대치하고 있는 중앙에는 마치 때 아닌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땅이 움푹움푹 패여 있었다.

그 반경이 거의 십여 장에 이르렀고 깊이도 삼 장이 넘는 것 같았다.

이 웅덩이가 두 사람의 대결 때문에 생겼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는 아마 틀림없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청운은 자신의 검으로 간신히 땅을 짚은 채 신형을 벌벌 떨며 간신히 서 있었다.

또한 수라마군 역시 자신의 도를 힘없이 늘어뜨린 채 마치 중풍에 걸린 사람처럼 신형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이미 두 사람의 옷은 옷이 아니었고 몸은 몸이 아니었다.

서로의 도기와 검기에 의해 베어진 두 사람의 몸에서는 헤아릴 수조차 없는 무수한 좌상이 빼곡했다.

그로 인해 상처에서 마치 바위틈에서 석수가 새어 나오듯 핏물이 쉴 새 없이 스멀스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청운과 수라마군 둘 다 웩웩거리며 몇 사발의 피를 제 발밑에 토해 냈다.

수라마군이 한참 동안 청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얼굴 가득 불신의 표정을 띠며 말했다.

“강해도 이렇게 강할 줄이야. 노부를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는 자가 강호에 존재하다니. 그것도 이렇게 젊은 나이에…….”

“…….”

“노부가 헛살아도 한참을 헛살았구나. 아이야, 이 상황에서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느냐.”

“마지막 초식이 ‘멸환’이라고 했느냐. 내 평생에 처음 접하는 멋진 초식이었다. 내 마지막 초식은 ‘수라겁천’이니라. 수라겁천 하나로 나는 천하를 오시할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하니 얼굴이 다 화끈거리는구나.”

“내가 마련에 돌아가는 즉시 련주를 한 번 설득해 보겠다. 될지 안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만, 이참에 天과 손을 끊고 너와 손을 잡으라고 내가 한 번 말해 보마. 다음에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자. 나는 이만 가겠다. 너도 잘 가거라.”

돌아서는 그에게 청운은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오늘 하늘 밖의 다른 하늘을 봤습니다. 많은 걸 배웠습니다. 잘 가십시오.”

* * *

청운은 서둘러 좌상과 내상을 치료할 만한 곳을 찾아 주변을 탐색했다.

십여 리 정도 산속을 달려가자 물소리가 들렸다.

계곡이었다.

수라마군과의 대결에서 긴장한 탓인지 안 그래도 몹시 목이 마르던 참이었다.

청운은 아예 계곡물에 얼굴을 박은 채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찬물에 긴장이 확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전신이 축 처지면서 아까는 잘 느끼지 못했던 통증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서둘러 내상과 외상을 다스려야 할 것 같았다.

청운은 안력을 최대한 돋우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계곡 맞은편 절벽의 중간쯤에 잡풀과 칡넝쿨이 늘어뜨려진 곳에 동굴 비슷한 게 하나 눈에 들어왔다.

땅에서 삼 장이 채 안 되는 높이였다.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들도 쉽게 바위를 타고 오를 수 있는 곳이었다.

청운은 계곡을 건너자마자 땅을 박차고 올라 단번에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는 겨우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다.

하지만 서너 장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 서너 명은 거뜬히 누울 수 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동굴 바닥에는 오래전에 화톳불을 피운 흔적이 있었고 두텁게 건초도 깔려 있었다.

청운은 살짝 긴장했다.

안력과 청력을 최대한 돋우어 동굴 내부를 자세히 살피고 미세한 소리까지 들어보았지만 아무런 특이점은 없었다.

삭아서 영 못 쓰게 된 대나무 껍질로 짠 망태기 두어 개만이 구석에 버려지듯 처박혀 있었다.

약초꾼 아니면 사냥꾼이 가끔 잠자리로 쓰던 곳 같았다.

청운은 건초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품속에서 재갈신의가 준 약병부터 찾았다.

엄지손톱만 한 환약을 한 알 꺼내 입안에 틀어넣었다.

대충 몇 번 씹은 후 꿀꺽 삼켰다.

곧바로 금창약을 꺼내 수라마군의 도기에 의해 베어지고 갈라진 옆구리와 허벅지 그리고 어깨 부근에 듬뿍 발랐다,

청운은 곧바로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한차례 대주천을 한 후 청운은 다시 한 번 제갈신의의 의술에 감탄했다.

단 한 번의 운기조식으로 진탕되었던 혈기가 거의 가라앉고 내공의 반 이상이 회복된 것 같았다.

청운은 한차례의 소주천과 대주천을 더 운행한 후 수라만군과 대결을 차근차근 복기해 보았다.

수라마군의 도법은 적송자의 검법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특히 그의 마지막 초식인 수라겁천은 그 전개 방식에서 적송자의 검과 흡사했다.

도기를 허공에 던져 자유자재로 조절하며 시공간을 지워 버리는 수법은 이기어검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달랐다.

이기어검이 검을 발검한 자의 의지로 시공간을 장악하는 것이라면, 적송자의 검과 수라마군의 도는 발출한 검기와 도기로 시공간을 재구축해 새로운 시공간을 만드는 차원이었다.

검기와 도기가 출수되자마자 원래의 시공간이 지워진 곳에서 새롭게 압축된 시공간이 탄생했다.

단 삼 초여서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그들과의 승부가 더 길어져 더 많은 초식을 교환했다면 틀림없이 자신이 패했을 것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이 새롭게 창안한 시공간 속으로 청운을 몰아넣었을 것이다.

반면에 청운은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시공간의 거리와 부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승부의 결과는 불을 보듯 명약관화했다.

서로의 검이 만들어 내는 시공간의 문제는 그 시공간을 접하는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시공간은 옆에서 관전하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결하는 두 당사자만이 오감으로만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모두가 그 대결을 보았지만 아무도 말할 수가 없는 것이기도 했다.

대결의 두 당사자만 빼고는.

적송자와 수라마군은 청운에게 무공의 연원을 묻지 않은 유이한 사람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자신의 검과 도에 자부심이 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타인의 검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자신의 검도에만 평생을 매진한 거인이었다.

특히 수라마군은 지금까지 자신이 맞닥뜨렸던 그 어떤 정파인보다 더 정파인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왜 마도의 길을 선택했을까 하고 청운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마도와 사도는 가문의 배경과 지지가 없더라도 능력과 실력만 있으면 누구라도 한자리할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이다.

그래서 평소 실력을 갖추고도 강호의 냉대를 받던 자들이 미련 없이 마도와 사도 길을 선택하기도 한다.

청운은 수라마군도 남이 모르는 자신만의 어떤 아픔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도와 사도도 사람 사는 곳인데 어찌 사연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쪽 세상에는 이쪽 세상의 진실이 있듯이 그쪽 세상에는 그쪽 세상의 다른 진정성이 있을 거라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청운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수해樹海.

나무의 바다.

아니 바다의 숲.

이곳에서는 수해라는 단 두 글자 말고는 다른 말은 전혀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아니,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청운은 만수림 앞에서 또 다른 말은 전부 군더더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청운은 자신의 눈앞에 광대하게 펼쳐진 끝없는 숲의 바다를 바라보면서 할 말을 잃은 채 넋을 놓고 있었다.

눈앞의 수해가 막막했다.

만수림滿樹林에는 따로 길이고 뭐고 없었다.

심지어 하늘에도 나무의 우듬지뿐이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람을 찾는단 말인가.

청운은 앞이 캄캄했다.

그냥 되돌아갈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이곳까지 와서 그럴 수는 없었다.

청운은 땅을 박차고 올라 주변에서 가장 높은 거목의 우듬지로 올라섰다.

땅바닥에서 보는 수해와 우듬지 위에서 보는 수해는 또 달랐다.

아래에서 볼 때는 눈앞이 캄캄한 바다였다면 위에서 볼 때는 발밑이 컴컴한 바다였다.

청운은 발밑의 바다에 대고 내공을 가득 실어 소리쳤다.

“만—수—귀—왕 형님, 여—위—불 형—니—임.”

청운의 외침은 만수림의 나뭇잎 하나 흔들지 못하고 공허하게 사라졌다.

모래에 물이 빠지듯 청운의 외침은 수림의 바다에 침윤했다.

몇 번을 더 외쳐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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