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화 내 제안을 거절하면 죽음뿐이네.
천비천독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장내에 도열해 있던 십여 명의 장한들이 검은 장갑을 낀 오른손을 자신의 허리춤에 찬 가죽주머니로 가져가고 있었다.
청운은 그들의 손이 가죽 주머니에 닿기 바로 직전 쾌—타의 초식으로 그들의 손목을 후려쳤다.
“으—아—악.”
“으—악.”
“으—으—윽.”
장내에는 돌연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십여 개의 단말마의 비명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청운에게 오독신사를 뿌리기 위해 가죽 주머니로 향했던 장한의 손들이 하나같이 손목을 덜렁거리며 나자빠져 있었다.
청운은 그자들이 오독신사를 뿌리기 직전 그들의 손목을 모조리 분질러 버렸다.
당문이 자랑해 마지않던 제자들이 청운의 일 초식도 채 견디지 못하고 손목이 부러진 채 나뒹구는 모습을 눈앞에서 본 천비천독의 표정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 옆에 시립해 있는 자들을 휙 하고 한 번 둘러보았다.
곧바로 깊은 침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당문구영은 나서라.”
천비천독의 말이 떨어짐과 무섭게 그의 옆에 있던 아홉 명의 장한들이 청운을 포위하듯 장내에 날아 내렸다.
당문 혈족의 직계로 이루어진 당문구영은 당문의 최상승 절기 대부분을 전수 받은 당문의 실력자들로 강호에 소문이 자자했다.
청운을 에워싼 채 청운의 전신을 노려보는 당문구영의 허리춤에는 가죽 주머니가 없었다.
그렇다면 암기였다.
청운이 극황지감술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기는 모두 손으로 향하고 있었다.
청운이 극황지감술을 좀 더 끌어올렸다.
그들의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에서 생체에서 나오는 것과는 다른 기감이 느껴졌다.
종잇장보다 더 얇은 나비 모양의 암기였다.
‘화우비접!’
청운은 속으로 외쳤다.
화우비접은 당문이 자랑하는 암기 중의 암기였다
워낙 얇고 가벼워 공력이 거의 일 갑자에 가까워야 펼칠 수 있다고 강호에 알려져 있었다.
가벼운 암기일수록 전개하기도 더 힘들고 방어하기에도 더 힘들다는 것이 암기에 대한 상식이었다.
암기가 얇을수록 상대의 호신강기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다.
화우비접이 전개되면 상대가 번쩍하는 하얀 빛을 본 순간, 바로 절명한다는 소문이 강호에 나돌았다.
하지만 청운은 상대가 어떤 암기를 사용할지를 안 이상, 이미 승부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청운은 극황지감술로 당문구영의 손에서 연신 뿜어져 나오는 기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세심하게 느끼고 있었다.
청운을 잔뜩 노려보며 석상처럼 서 있던 당문구영의 손에서 일순간 강한 기감이 느껴지는 것을 청운이 감지했다.
그들이 화우비접을 발출하기 바로 직전 청운의 무영검에서 발출된 자황색의 강기가 당문구영의 손을 향해 폭사되었다.
당문구영이 아차, 하며 뒤늦게 화우비접을 발출했지만 이미 상황은 끝나버리고 만 뒤였다.
그들이 출수한 화우비접은 청운의 요혈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을 다하고 나무에서 떨어지는 나비처럼 하릴없이 몇 차례 허공을 맴돌다 모조리 투두둑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으—으—윽. 으—허—억. 악!”
당문 구영은 일제히 신형을 비칠거리며 뒤로 나자빠졌다.
아까 당문 제자들이 당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손목도 젓가락 부러지듯 부러진 채 팔목에서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눈앞에 목도한 천비천독이 분기에 찬 일성을 내지르며 장내로 날아들었다.
“이—노—오—옴, 이번에는 내가 직접 상대해 주마. 네 놈에게 당문의 최고 절기인 만천화우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주마.”
그가 청운의 전신을 갈가리 찢어발기듯이 노려보면서 막 출수를 하려고 하던 바로 그 순간!
“형님, 잠시만 참으세요!”
중후한 저음의 목소리와 함께 사십 대 중후반의 중년인이 대전 바로 뒤에 있던 전각의 한쪽 문을 열면서 나타났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이미 그 중년인은 장내에 있었다.
그의 말은 느긋하고 느렸으나 반대로 그의 몸놀림은 번개처럼 빨랐다.
그는 사십 대 중후반의 짙은 갈의를 입고 있었다.
모든 것에 무심한 것 같은 그의 눈에서 이따금 은은한 청광이 번득번득 내비쳤다.
그 괴이한 눈빛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청운은 오금이 저려 왔다.
청운은 그가 단번에 대단한 고수라는 걸 느꼈다.
그자가 장내에 진입하자 조금 전에 당장에라도 청운을 찢어죽일 듯이 길길이 날뛰던 천비천독이 뒤로 물러났다.
그자가 푸르스름한 청광이 은은하게 감도는 눈빛으로 청운을 샅샅이 훑어보더니 입을 뗐다.
“소협이 현 강호에서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다는 바로 그 무위검이로군. 상견의 자리가 좀 그렇지만 아무튼 만나서 반갑네. 나는 당호라고 하네. 이쯤에서 물러서면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불상사는 없던 걸로 하겠네. 내 호의를 받아들이게.”
“…….”
“여태껏 내 호의를 거절하고도 강호에서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었네. 자네가 조금 마음에 들어 이런 제안을 한 것이네. 내 제안을 거절하면 죽음뿐이네.”
그는 바로 당문의 제일 고수 천수천귀 당호였다.
그의 용독술과 암기술은 천하에 따를 자가 없다고 했다.
특히 그의 암기술은 당대 제일이라고 혹자들은 말했다.
당문 최고 절기인 만천화우를 새롭게 해석해 혈천만우라는 새로운 암기술을 창안해 당문의 암기술을 한 차원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렸다고 세간에 그 위명이 자자했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그가 암기를 발출할 때 어떤 소리도 어떤 기척도 없다고 했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암기술의 최고 경지인 무음경을 넘어 무적경의 경지에 거의 도달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암기를 발출하지도 않았는데 그의 앞에 멀쩡히 서 있던 사람이 갑자기 죽어 나자빠졌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자신이 새로 창안한 절기에 맞는 암기 또한 직접 제조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가 직접 제작한 암기가 어떤 것인지는 강호의 그 누구도 몰랐다.
그것은 당연했다.
왜냐하면 그의 암기술에 살아남은 자는 여태껏 강호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청운이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당문이 天과의 관계를 청산하겠다고 지금 당장 확답을 주면 그 호의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당호가 깊은 침음을 한차례 내뱉으며 말했다.
“나는 소협에게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내가 베풀지 않았던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었다네. 절대로 나를 원망하지 말게.”
청운과 당호는 오 장 정도의 간격을 두고 마주섰다.
둘이 대치한 장내에는 두 당사자와 그들이 늘어뜨린 두 그림자를 빼고는 오직 서로의 빈틈을 주시하는 칼날 같은 눈빛과 대기를 팽팽하게 긴장시키는 침묵밖에 없었다.
그의 최고 절기는 혈천만우라고 했다.
만천화우가 출수를 하는 바로 그 즉시 상대에게 암기가 비 오듯 쏟아지는 절기인 반면에 혈우만천은 소리도 기척도 없이 상대의 몸 바로 앞까지 날아와 폭발한다고 했다.
그만큼 더 상대의 신형 가까이에서 폭발하기에 방비도 더 힘들고 더 치명적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것 또한 소문일 뿐이었다.
지금껏 그의 암기술과 마주하고도 살아남아 그것을 증언한 자가 아무도 없기에…….
청운은 치우전륜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몸을 보호하는 호신막을 만들었다.
동시에 신과 혼이 하나 되는 극황지감술을 극성까지 운기했다.
그 상태로 천수천귀의 전신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심장 박동은 물론 혈관의 피가 어디로 얼마만큼 어떻게 흐르는 지 오롯이 느껴졌다.
일 각 정도를 대치했으나 청운은 여전히 그에게서 어느 한곳으로 쏠리는 기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의 암기가 어떤 것인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도 찾아내지 못했다.
어느 순간, 어느 곳에서 어떤 방식으로 암기가 발출될지 모르는 경지가 바로 무음경과 무적경의 경지라는 걸 청운은 새삼 실감했다.
다시 일 각 정도를 더 대치했을까.
청운은 그의 양손 끝에서 미세하게 점멸하는 어떤 기감을 느꼈다.
모두 네 곳이었다.
극황지감술이 아니면 도저히 찾아내지 못할 미약한 기감이었다.
그렇다고 청운이 먼저 출수할 수는 없었다.
그의 양손 끝에 있는 암기가 청운이 검기를 발출하려는 바로 그 찰나의 틈을 파고들게 뻔했다.
그가 출수하는 바로 그 순간 자신도 출수를 해야 한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단 출수를 동시에 하더라도 바늘 틈만큼이라도 자신이 빨라야 승산이 있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그의 출수는 아무 동작도, 아무 소리도, 아무 기척도 없었다.
하지만 청운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느끼고 있었다.
그의 양손 끝에서 미세하게 달라지는 기감을 미리 감지하고 있었다.
그의 출수와 동시에 청운도 쾌—타—절의 초식을 극한의 빠르기로 펼쳤다.
따—따—따—땅.
네 번의 금속성 파쇄음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비록 크지 않았으나 워낙 날카로운 소리여서 그 음은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의 심장을 비수처럼 파고들었다.
당호가 발출한 암기는 청운의 몸과는 삼 장 이상이나 떨어진 곳에서 무용하게 폭발했다.
반면에 청운의 무영검은 당호의 왼팔을 어깨 바로 밑에서 잘라 버리고는 이미 칼집에 납검해 있었다.
당호는 자신의 왼팔이 땅에 떨어진 것도 잊은 채 청운을 불신의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당문의 제자들이 급하게 달려 나와 그의 왼팔을 지혈할 때쯤, 당호는 청운을 향했던 불신의 눈길을 거두고는 청운의 깊은 눈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는 내가 발출하는 순간을 어떻게 알았는가.”
청운이 살짝 묵례를 하면서 대답했다.
“몰랐습니다. 아무 소리도 아무 기척도 저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다만 그 순간을 느꼈을 뿐입니다.”
당호는 청운의 말에 고개를 두어 차례 끄덕이고는 아까 자신이 나왔던 대전 뒤의 전각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청운이 당천을 바라보자 그는 표정이 이지러질 대로 이지러진 채 신형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청운은 당천을 지극히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은 이 정도로 끝내겠습니다. 백일의 말미를 드리겠습니다. 그 사이에 天과의 관계를 청산하십시오. 다음에 제가 당문을 방문할 때는 아마 봉문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청운이 몸을 돌려 당문을 나서자 당천이 대낮에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제자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그를 부축했으나 그는 한동안 허물어진 석탑처럼 일어서지 못했다.
* * *
눈발이 점차로 굵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세상의 모든 사물이 단 하나의 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 단 하나의 색으로 점차로 지워지고 있었다.
아니, 지워지면서 드러나고 있었다.
하얀색에 의해 지워진 모든 산과 길 그리고 집들이 바로 그 하얀색의 윤곽으로 자신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