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99화 (99/184)

099화 태어나지도 자라나지도 않은 고향, 백두산.

청운은 이 참혹한 상황을 자신이 만들어 놓고도 자신이 저지르지 않는 일처럼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강호에 출사한 이래 청운은 오늘 가장 많은 살인을 했다.

청운은 그들이 천하에 둘도 없는 악한들이라 할지라도 오늘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고 후회했다.

오늘 자신이 지나칠 정도로 분노하고 광분한 이유를 청운은 찬찬히 되짚어 보았다.

단순히 그들이 저항 능력이 전혀 없는 젖먹이 딸린 부녀자를 무참히 살해하는 광경을 자신이 목도한 것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청운은 아무래도 오늘 자신의 지나친 흥분과 광기는 동굴에서 설산의 그녀와 아직 얼굴도 모르는 딸을 내내 그리워하다가 그 잔혹한 장면을 목격한 것과 무슨 연관성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지하 토굴에서 끌려 나오자마자 무참히 살해당한 그 아이의 어미가 순간적으로 설산의 그녀와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딸을 상기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자기가 저지른 오늘의 살육을 합리화했다.

그렇게 죽어 나간 여인이 마치 그녀인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흘러버렸다고 청운은 중얼거렸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오늘 행위를 정당화해 보았으나 마음이 전혀 편치 않았다.

청운은 이 잔혹한 현장을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다.

청운이 막 몸을 돌려 신법을 전개하려고 했을 때, 조금 전 커다란 대감도를 부엌칼처럼 휘두르며 흑의 살수들을 상대하던 사십 대 중년인이 청운을 불러 세웠다.

그의 황의는 핏물로 염색한 것처럼 벌겋게 염색돼 있었다.

“소협, 잠깐만 저를 좀 보시지요. 멀리서 얼핏 들으니 귀현사살이 무위검! 이라고 소리치던데, 무위검 강소협이 맞습니까. 저는 곽이연이라고 합니다.”

곽이연이 누구인가.

그는 녹림칠십이채의 총표파자로 그의 거궐파양도법은 절정을 훨씬 넘어 현경 근처의 경지라고 강호에 소문이 파다했다.

청운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녹림칠십이채의 수장이신 거궐파양 곽대협이시군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예, 제가 바로 사람들이 무위검이라 부르는 강청운입니다.”

청운의 말을 받은 거궐파양이 말했다.

“싸우는 와중에도 저렇게 젊은 나이에 저 정도의 무위를 보이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몹시도 궁금했습니다. 바로 무위검 강소협이셨군요. 소협, 그리 바쁘시지 않으면 저와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겠는지요. 잠시면 됩니다.”

청운이 좋다고 말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청운도 사실은 왜 이곳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몹시 궁금하기는 피차일반이었다.

청운이 그의 뒤를 따르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거의 대부분 산채가 불에 타고 겨우 서너 채의 산막만 멀쩡했다.

곽이연은 그중 가장 큰 산막으로 청운을 안내했다.

그가 산막 앞에 서서 보초를 서고 있던 장한에게 다가가 뭐라고 지시를 하고는 청운에게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그가 청운에게 의자를 빼주며 자리를 권했다.

자신은 청운을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청운에게 말했다.

“소협, 고맙습니다. 오늘 소협이 아니었으면 이곳 산채의 사람들이 몰살당했을 겁니다. 다시 한 번 소협의 큰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소협에게 구명지은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청운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저뿐 아니라 누구라도 그 광경을 목격했다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 겁니다.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그런데 오늘 이 사태는 대체 무슨 연유로 이리된 것입니까.”

거궐파양이 한숨을 몇 번 몰아쉬더니 말했다.

“작년 가을쯤에 검은 복면을 한 자가 감숙의 괄창산에 있는 녹림의 본 채로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天의 사자라고 했습니다.”

‘天의 사자…….’

“그자는 저에게 녹림칠십이산채에 자신들의 거점을 마련해 주면 우리 녹림도 전체가 한 해에 버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

“나는 그 제의를 일언지하 거절했습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의 솔깃한 제안에 다소 유혹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 많은 돈을 그냥 줄 리도 만무하고 머지않아 녹림의 모든 산채가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이 불을 보듯 뻔했으니까요.”

거궐파양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 거절 이후로 그들의 집요한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이 태산의 산채가 습격 받은 것을 포함하면 벌써 열두 번의 급습을 받았습니다. 그 때문에 중원에 흩어져 있는 각 산채가 무사한지를 살피기 위해 순시하는 것이 요즘 저의 가장 중요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군요.”

“오늘 제가 때마침 이곳 산채를 둘러보고 있을 때 그들이 급습했습니다. 저는 늘 혼자 다니기를 좋아해 따로 부하들을 대동하지 않고 다니는 편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사태가 이리 험악하게 된 것이지요. 모두가 제 불찰입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소협의 도움이 없었으면 오늘 저는 제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을 겁니다. 다시 한 번 구명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소협은 무슨 일로 이 태산 근처를 지나시게 되었는지요.”

청운이 막 그의 질문에 대답하려고 했을 때 산채의 문이 열리며 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장한 두 명이 술상을 들고 들어왔다.

그는 술상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곽이연에게 묵례를 하고는 다시 나갔다.

청운이 극구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곽이연이 청운에게 먼저 술을 따랐다.

곧바로 청운도 그에게 술을 한잔 따랐다.

청운이 단번에 한잔 들이키고는 그에게 말했다.

“개인적인 볼일로 백두산으로 가는 중에 폭설을 만나 이 근처 동굴에서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괘념치 마시지요.”

청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곽이연이 곧바로 청운의 말을 받았다.

“잘 됐습니다. 백두산에 무슨 일로 가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백두산은 산세가 워낙 장대해서 그 근처에 사는 사냥꾼과 약초꾼도 산속에서 길을 자주 잃고 헤맨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특히 겨울에는 아무리 무공의 고수라도 다니기 쉽지 않은 곳입니다.”

“네.”

“다행히도 그곳에도 저희 산채가 하나 있습니다. 소협이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제가 그곳 산채에 전서구를 띄워 놓겠습니다. 많이는 몰라도 조금은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청운은 그의 배려에 고맙다고 말했다.

청운은 폭설 때문에 산채에서 닷새를 더 묵고 길을 나섰다.

청운이 떠날 때 곽이연은 청운이 天과의 문제로 어떤 어려운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즉시 달려가 돕겠다고 말했다.

* * *

거대한 노송들이 무덤덤하게 기암괴석을 에두르고 있는 백두산에 들어섰다.

청운은 마치 고향에 온 느낌을 받았다.

산첩첩 물중중한 이곳에 태어나지도 않았고 단 한 번도 살아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청운은 몸도 마음도 한없이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백두산의 무엇이 자신을 이리 편하게 만드는지 청운은 여러 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백두산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머리에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그냥 백두산의 모든 것이 편안하고 좋았다.

중원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산세와 풍광들은 달라서 좋았고, 중원과 똑같은 기암괴석과 계곡물 소리는 똑같아서 좋았다.

날씨는 더 이상 쾌청할 수 없을 정도로 쾌청했고 바람은 더 이상 신선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선했다.

청운은 사람에게는 그 무엇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그저 좋은 것도 있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녹림 총표파자 거궐파양은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청운이 백두산의 산채에 도착하자 채주인 양무척은 이미 청운이 필요한 모든 걸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는 몸집이 장대하고 시커먼 구레나룻을 기른 삼십 대 중반의 성격이 호탕한 사람이었다.

그는 청운을 극진하게 대접했다.

산행에 필요한 건량과 장비들이 가죽 자루 속에 잔뜩 준비되어 있었다.

그 자루만 짊어지고 다니면 최소 한 달은 너끈히 산속에서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청운이 부탁했던 백두산 전도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어디에 절벽이 있고, 어디에 계곡과 폭포가 있는지가 지도 위에 붉은 주사로 상세하게 표기되어 있었다.

채주 양무척은 백두산 근처에 사는 약초꾼과 사냥꾼 수십 명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지도를 상세히 그렸다고 했다.

청운이 너무나 고마워서 은자 백 냥을 그에게 내어놓았다.

그는 이러시면 절대 안 된다고 한사코 받기를 거부했다.

청운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말로만 여러 차례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는 청운이 태산의 산채를 구해준 것에 비하면 청운의 그 인사조차 민망하다고 했다.

지도에 표기된 폭포의 숫자는 얼핏 보아도 오십여 개가 훨씬 넘었다.

대충 하루에 다섯 곳씩 잡아도 최소 열흘 이상이 걸릴 것 같았다.

지형이 아주 험한 곳을 다닐 때는 하루에 세 곳 정도도 벅찰 것 같았다.

양무척은 청운에게 매일 저녁 산채에서 자고 산을 둘러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청운은 산이 워낙 넓어 그렇게 하면 시일이 너무 많이 소요되니 그냥 산에서 자면서 다니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가 산채에서 날쌘 장한 몇을 추려 청운의 산행에 딸려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청운은 혼자 다니는 게 더 편하다고 그 호의마저 정중히 거절했다.

청운은 산채에서 하룻밤만을 자고 그가 준비해 준 가죽 주머니를 들쳐 메고는 이른 새벽부터 백두산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청운은 백두산의 동쪽 사면부터 헤집기 시작했다.

청운은 아침부터 밤까지 산과 계곡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어떤 날은 봉우리에서 내려오는 방식으로 탐색을 하고 또 어떤 날은 계곡의 물줄기를 거꾸로 되짚으며 산을 훑었다.

칠팔일이나 그런 식으로 산을 뒤졌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그동안 산막의 동굴에서 주운 팔각패에 음각된 모양과 비슷한 폭포를 몇 개 발견하기는 했으나 막상 가 보면 아니었다.

두어 곳은 물길 뒤에 아예 동굴이 없었고, 또 다른 두어 곳에는 동굴은 있었으나 사람이 들어갈 수가 없을 정도로 좁았다.

날짜가 지나갈수록 청운은 조금씩 초조해졌다.

이러다 결국 무영문이 있는 폭포를 못 찾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이 엄습했다.

청운은 산줄기를 며칠을 더 뒤지며 양무척이 그려 준 지도에 표시된 폭포를 모두 살펴보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말았다.

허탈했다.

무영문의 흔적이 백두산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믿었던 자신의 막연한 짐작이 처음부터 잘못된 가정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었다.

청운은 그것 또한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하고 터덜터덜 산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너무 맥이 풀려 신법을 펼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북 사면을 타고 중턱쯤 내려왔을 때였다.

약초꾼으로 보이는 늙수그레한 노인장 둘이 망태기를 땅바닥에 내려놓고는 널찍한 너럭바위에 앉아 주먹밥을 먹고 있었다.

왼쪽에 있는 노인장이 지나가는 청운을 발견하고는 청운을 불러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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