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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비검무-101화 (101/184)

101화 내가 원하는 길은 내가 원하지 않은 길로만 이어지고

청운은 극황지감술을 채 사 성 정도만 익힐 수 있었다.

묘묘보허는 전반부에 대한 학습도 충분했고 전적으로 무공을 토대로 하는 것이어서 그나마 빨리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극황지감술의 비술은 무공을 토대로 하면서도 무공과는 다른 신체의 오감을 극한까지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생각보다 진척이 더뎠다.

비록 곤륜선인으로부터 비술의 기초를 배우기는 했으나 청운에게는 여전히 낯선 것이었다.

청운은 그 철편들을 지니고 나갈까 하다가 원래대로 보관하고는 동굴 밖으로 나왔다.

청운은 묘묘보허를 전개해 절벽을 날아 내렸다.

동굴에서 날아 내리는 청운의 신법을 누군가 보았다면 그는 아마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을 했을 것이다.

청운의 신법은 마치 하늘에서 빗줄기가 떨어지듯 거의 직선으로 그대로 떨어지다 정확히 지면의 한 치 정도의 높이에서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한 치의 계단을 디디고 내려오듯 허공을 살짝 밟고는 땅으로 내려섰다.

마치 허공에 유형의 계단이 있기라도 하듯이.

* * *

천지.

이른 새벽녘 하늘의 연못은 자욱한 안개에 휩싸여 인세에 다시 보기 힘든 몽환적인 풍광을 연출하고 있었다.

수많은 대가들이 협력해 그리고 있는 한 폭의 장대한 수묵화 같았다.

안개의 자궁 같은 천지의 수면에서 쉴 새 없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물안개에는 신령스러운 영기와 서기가 잔뜩 묻어나는 것 같았다.

최초에 이 천지는 세상의 모든 것을 말살하는 불을 뿜는 지옥의 아가리였을 뿐이었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억겁의 세월이 흐르고 흐른 후, 천지는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먹여 살리는 최초의 생명수로 뒤바뀌었다.

청운은 죽음과 삶의 윤회란 게 참으로 오묘한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내 핏줄의 기원이 시작된 천지는 물이 꾸는 최초이자 마지막 꿈인 것 같았다.

날이 점차로 밝아오면서 그 꿈이 차츰 현실로 깨어나고 있었다.

산등성이로 솟아오르는 해가 짙은 안개를 서서히 밀어내고 있었다.

세상이 시나브로 환해지고 있었다.

청운은 한참을 그렇게 넋을 놓고 천지를 바라보다가 휙 몸을 돌려 자신이 다시 가야 할 먼 길을 아스라이 굽어보았다.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천하가 하늘의 보자기를 펼친 듯 청운의 눈앞에 활짝 펼쳐져 있었다.

천지에서 시작된 세찬 물길을 따라 길이 흐르고 들녘이 흐르고 논밭이 흐르고 청운 자신도 아직 모르는 삶이 굽이굽이 흐르고 있었다.

청운은 독백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몇 년 전의 나는 오늘의 나를 몰랐고, 오늘의 이런 삶을 몰랐고, 내가 이런 길을 갈 줄도 전혀 몰랐다.

모든 게 너무 바뀌어 이제는 오히려 이전의 나와 내 삶이 더 생경하다.

그렇다.

길은 내 의지에 의해서도 변하는 것이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길 자체의 속성에 의해 완전히 다르게 뒤바뀌기도 한다.

그게 내가 여태껏 몰랐던 길의 진정한 본성이다.

지금 내가 가는 이 길은 어쩌면 누군가의 목숨을 대가로 치르고 얻은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그렇게 자신을 초개처럼 바친 그들이 있어서 이 길이 이 정도라도 겨우 닦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끝까지 이 길을 가야만 한다.

내 진심이 정확히 강호의 심장에 꽂히지 않더라도.

내가 지금 하는 결심이 적보다 나를 먼저 벨지라도 나는 이 길을 가야만 한다.

진정한 내 길은 내가 나를 먼저 벨 때 철철 흘러내리는 그 핏물 속에서만 간신히 보일런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내가 길을 선택하는 순간도 있지만 길이 나를 선택하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때부터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나는 바뀐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 바뀐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나 또한 그 길처럼 바뀔 것이다.

그 길이 또한 내가 뚜벅뚜벅 걸어가야만 하는 내 길이다.

전부 아니면 전무인 그 비타협성이 나를 길바닥에 수천 번 패대기칠지라도 나는 그 길을 갈 것이다.

내 길이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갈지 지금의 나는 전혀 모른다.

앞으로도 계속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 세상 어디에도 길이 없었다.

누군가 먼저 한 사람이 걸어가고 뒤이어 수많은 사람이 따라 걸어간 자리에 조금씩 길이 생겼고 다져졌을 뿐이다.

내가 그 길을 쉼 없이 걸어가면 나 아닌 또 다른 무위검이 틀림없이 내가 걸어간 그 길에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그때 나는 내가 아는 진정한 내가 될 것이다.

극악무도한 그들 무리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어둠과 암흑 그사이 어딘가에 틀림없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나에게 그랬던 것과는 정반대로 천천히 조금씩 끈질기게 그들의 어둠과 암흑에 빛을 쬐어 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무력감을 반복하며 살진 않을 것이다.

그것을 반복하는 길을 절대로 가지 않겠다.

내 기원이 시작된 천지를 바라보며 나는 다짐 또 다짐을 한다.

한때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다시는 그런 무력감에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아픈 것 때문에 아파하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길이 내가 원하지 않는 길로만 이어질지라도.

꾸준히 내 길을 포기하지 않고 가다 보면 분명히 지금보다 더 크고 밝은 길이 나를 환하게 환대할 것이다.

진정한 내가 되는 바로 그 순간에도 나는 오늘보다 조금은 더 나은 강호를 볼 수 있다고 장담하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보다 더 많은 꿈을 꿀 수 있는 강호를 기대할 수는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청운은 세상에는 반드시 싸워야 지킬 수 있는 것들도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혼란과 동요를 야기해 자신들만의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을 막는 것이 바로 그런 일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청운은 무구한 생명의 무수한 희생을 요구하는 저주받은 삼계의 악몽이 다시는 이 땅에 부활하지 못하도록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거듭 생각했다.

그 힘들고 지난한 길이 천하를 굽어보는 청운의 눈동자 속에 아스라이 끊어질 듯 이어져 있었다.

청운은 어떤 바람에도 묶이지 않는 한 마리 신조神鳥처럼 다시 그가 생각하고 꿈꾸는 강호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가 떠난 자리에서 한 가닥 서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 * *

여러 겹으로 우뚝 솟은 봉우리 아래 모용세가慕容世家는 한 마리 거대한 짐승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모용세가의 후면에서 오십여 장 떨어진, 모용세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암봉 위에 검은 야행복을 입은 한 인형이 모양세가의 전각들을 구석구석 노려보고 있었다.

그 야행인은 백두산에서 곧장 달려온 청운이다.

청운은 생각했다.

저곳 어딘가에 틀림없이 어떤 음모의 실체가 있을 것이다.

가주 모용성은 어떤 식으로든지 天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그때 설산에서 모용후가 사용한 천녀혈수가 그 명백한 증거다.

청운은 극황지감술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그 상태로 전각의 구조를 세세하게 살펴보았다.

본채의 지하에 여러 개의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공간은 석실 같았다.

석실과 석실은 하나의 회랑으로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입구는 대전에 설치된 단壇이다.

곳곳에 등촉이 밝혀진 본채를 이십여 명의 무사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청운은 대전을 향해 곧장 신형을 날렸다.

마치 암봉의 그림자 하나가 쓱 하고 떼어지는 것 같았다.

어떤 기척도 소리도 없이 청운은 본채의 지붕에 날아 내렸다.

기와 몇 장을 소리 없이 뜯어내고는 기와를 이기 위해 받쳐 둔 산자를 수도로 도려냈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단壇은 구멍 바로 아래에 있었다.

밤의 연기처럼 청운의 신형이 정확히 단 위로 내려섰다.

요모조모 단의 형태를 살펴보던 청운이 내공으로 주변의 소음이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차단한 채 돌연 단을 왼쪽으로 돌렸다.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 계단이 나타났다.

범의 아가리 같았다.

청운은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단을 원위치하고는 곧장 회랑과 이어진 석실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떤 석실에는 온갖 금은보화가 가득했고, 또 다른 석실에는 진귀한 약재들이 가득했다.

척 보기에도 굉장한 명검과 무기들로 가득 찬 석실도 있었고, 바로 옆에는 무서들로 가득 찬 연공실도 있었다.

청운은 연공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책장에는 오호단혼도법을 비롯한 수많은 비급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청운은 극황지감술을 펼친 채 찬찬히 연공실을 둘러보았다.

책장 뒤에 또 다른 공간이 느껴졌다.

살며시 책장을 돌리자 입구가 나타났다.

곧장 들어갔다.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 그리고 탁자 위에는 고색창연한 청동으로 된 궤 하나가 놓여 있었다.

청운은 열쇠를 부수고 궤의 뚜껑을 열었다.

서찰 몇 장이 있었다.

청운은 서찰을 집어 올려 읽어 내려갔다.

특이한 서찰 하나가 청운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天主께서 상제上帝님과 회주會主님에게 선물을 보냈습니다.

天의 대계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 상제上帝 口와 회주會主 艹에게—]

口와 艹라.

누구를 지칭하는 은밀한 암호 같았다.

청운이 연공실을 나오려다가 연공실 내에 또 다른 공간이 있음을 느꼈다.

연공실 오른쪽 지하였다.

쇠고리가 달려 있는 바닥돌 하나가 보였다.

바닥돌을 들어올렸다.

청운은 구역질이 올라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참혹했다.

수십 구의 인골이 함부로 나뒹굴고 있었다.

골격으로 보아 모두 여자들 것 같았다.

“어떻게 인간이 이런 짓을. 이런 짐승만도 못한 것들 같으니…….”

청운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도대체 무슨 마공을 연성하기에 이리도 잔인한 짓까지 서슴없이 저지른단 말인가.

청운은 불현듯 파황군과 모용후가 펼치던 천녀혈수의 그 무시무시한 귀기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천녀혈수를 익히기 위해 이런 잔학한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청운은 사람의 정혈을 빨아서 마공을 익히는 저들을 도저히 살려 둘 수 없는 인간들이라며 치를 떨었다.

그리고 저들의 천녀혈수가 혈화제천의 혈화현음장과도 어딘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익히는 방법은 물론 장력 속에 깃든 차가운 귀기까지.

뎅—뎅—뎅—뎅.

삐—이—익—삑.

청운이 지하 계단에서 막 대전으로 다시 올라왔을 때, 요란한 종소리와 호각 소리가 모용세가를 뒤흔들고 있었다.

청운이 지붕 위로 올라와 내려다보니 횃불을 든 수십여 명의 장한들이 대전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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