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이 정도에서 모든 걸 종결했으면 합니다.
장주의 미심쩍은 태도를 보면서 청운은 반드시 서류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이참에 아예 근절시키고자 결심했다.
청운은 목소리에 내력을 실어 다시 한 번 냉랭한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반드시 장부를 봐야만 하겠소. 전장의 영업 비밀은 절대로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소. 내가 파악하기로는 장주는 절대로 여자를 탐하는 호색한이 아니오.”
“…….”
“그런데 어린 소녀를 굳이 그런 무리를 하면서까지 빼돌린 데에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오. 나는 그 연유를 꼭 알아야겠소.”
청운의 말에 장주의 얼굴이 아예 파랗게 질렸다.
그는 거의 애원조로 매달렸다.
“강 대협, 제발 이쯤에서 그쳤으면 합니다. 아무리 대협이라도 그 연유를 알게 되면 저의 목숨은 물론 대협도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정도에서 모든 걸 종결했으면 합니다.”
틀림없이 뭔가 거대한 비밀이 있다고 느낀 청운은 강압적인 태도를 버리고 유화책를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장주가 스스로 비밀을 실토하도록 본인과 전장의 안위에 대한 확신을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오늘 있었던 일은 평생 장주와 나만의 비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장주와 전장을 반드시 지켜드리겠습니다. 이제 말씀하시지요.”
한숨을 몇 번 몰아쉰 장주가 깊은 체념의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 등 뒤에 있는 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끼—이—익.
철판을 돌리는 소리가 나더니 지하로 내려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청운은 서둘러 극황지감술을 운용했다.
장주가 지하의 철문을 열쇠로 열고 석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석실에는 사람 키보다 조금 작은 금고가 세 개 있었다.
장주는 가운데 있는 철제 금고를 열어 장부를 뒤적거리더니 그 중 하나를 들고는 다시 지하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청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극황지감술의 운기를 풀고는 쪽문을 열고 들어오는 장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장주는 탁자에 앉자마자 장부를 펼치고는 청운에게 내밀었다.
그 소녀의 이름은 주은은이었다.
은은의 엄마인 양촌댁이 약 일 년 전에 은자 열 냥을 빌린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회수한 돈은 은자 사십 두 냥이었다.
이미 원금뿐 아니라 이자 또한 몇 배로 상환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어린 딸까지 빼앗다니 청운이 생각하기에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서류의 맨 위에 까마귀발 같은 이상한 표식이 그려져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 표식은 天을 거꾸로 표기해 놓은 글자였다.
청운이 그 글자를 손가락으로 짚자, 장주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급기야 눈빛 가득 불안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장주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청운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승부에서 어느 순간 승기를 잡은 기분이었다.
이 상황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그의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청운이 무슨 표식인지를 따져 묻자 장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굴복하는 자의 한숨을 내쉬며 입을 뗐다.
말 사이사이에 간간이 침묵을 섞으며 사실을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대협의 말대로 여자에게는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양기가 부족해 오히려 멀리하는 편이지요. 이 모든 건 사실 중원표국의 지시 때문입니다. 원래 이 전장의 이름은 <낙성전장>이었습니다.”
“낙성전장 말이오?”
“네, 그런데 약 삼 년 전 제가 중원표국에서 융통한 돈을 제때에 갚지 못해 중원표국에 전장을 강제로 강탈당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돈을 모아서 임차한 돈을 갚으려고 할 때마다 난데없는 사고가 터져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장주는 말을 이어 갔다.
“무슨 귀신의 장난도 아니고 돈을 갚으려고 할 때마다 이런저런 사고가 터졌습니다. 저는 그 사고의 배후에 틀림없이 중원표국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중원표국은 저에게 선심을 쓰듯 빛의 탕감을 몇 번이나 유예를 해주었습니다.”
“…….”
“그런데 이상한 것은 유예를 해줄 때마다 사고가 터져 빚은 눈덩이처럼 점점 더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어느 날 중원표국의 제 이 총관이란 자가 고수들을 대동하고 들이닥쳐 전장을 빼앗고 말았습니다.”
“그렇군요.”
“그런 방식으로 이곳 낙양의 거의 대부분 전장들이 중원표국의 속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수 초기 몇 달 동안에는 오히려 전보다 영업 이익이 더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채 반년도 안 되어 그들은 자신의 야욕을 드러냈습니다.”
“…….”
“마른 가죽을 쥐어짜듯이 저희 전장을 쥐어짜 최소한의 경비만 남기고 모든 이익금을 모조리 회수해 갔습니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서너 달에 한 번씩 내려오는 십팔 세 이하의 어린 소녀를 상납하라는 지시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청운이 치밀어오르는 분기를 참지 못하고 찻잔을 꽉 쥐었다.
그러자 옥으로 된 단단한 찻잔이 찻물과 함께 그대로 분말로 변해 버렸다.
청운이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지시를 따릅니까. 목숨을 걸고 거절했어야지요. 중원표국으로 보내진 소녀들은 그 이후 어찌 되었습니까.”
양 장주는 모든 걸 청운의 처분에 맡기겠다는 체념의 태도로 말했다.
“대협,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저희는 소녀를 중원표국으로 보내기만 했지, 그 후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습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애들도 전무합니다. 저도 무슨 목적으로 그들이 그런 지시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저는 다만 이 전장과 이곳에 목을 매고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대협, 제가 죽을죄를 지은 건 틀림없지만 제 입장도 좀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분기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장주를 노려보던 청운이 높낮이조차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이곳에 붙잡혀 있는 소녀들을 아무 조건 없이 무조건 풀어주시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인신매매 같은 짓거리를 그만두시오. 또다시 내 귀에 그런 소문이 들리면 이 전장을 아예 강호에서 제거해 버리겠소.”
장주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저희 전장엔 은은이 말고는 없습니다. 이미 다 중원표국으로 보냈습니다.”
청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면서 말했다.
“은은이를 당장 풀어 주시오. 그리고 당신이 두려워하는 중원표국과 그 윗선은 내가 책임지고 처리하겠소. 그러니 앞으로는 절대 국법을 어기지 말고 전장을 운영하시오. 내가 주시하고 있음을 명심하시오.”
청운이 몇 번이나 양 장주의 다짐을 받고는 전장 밖으로 나왔다.
청운은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되려고 이러나 싶어 배고픔마저 잊은 채 하늘 같지 않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로 그때, 양촌댁이라는 여인과 초췌한 몰골의 소녀 하나가 총총걸음으로 달려오더니 땅바닥에 엎드려 청운에게 큰절을 했다.
청운이 급하게 제지하며 여인과 소녀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저에게 고마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누구라도 그 상황을 보았다면 그렇게 했을 겁니다. 괘념치 마세요.”
청운의 완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킨 양촌댁이 목례를 하며 말했다.
“공자님에게 크나큰 구명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은덕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평생을 두고 잊지 않겠습니다.”
청운이 손사래를 치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은혜랄 게 뭐 있습니까. 그런 일이 하필이면 제 눈에 띄어서 보다 못해 끼어들었을 뿐입니다. 전혀 신경을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청운이 인사를 건네고 막 돌아서려고 때 양촌댁이 뒤에서 청운의 옷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공자님께 따뜻한 밥 한끼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공자님을 그냥 이리 보내면 제가 너무 몰염치한 인간이 되는 것 같아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청운은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대하니, 그녀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청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녀를 따라나섰다.
아침때가 한참이나 지나서 안 그래도 몹시 허기가 지던 참이었다.
오 리쯤 걸어가자 야트막한 야산 아래 삼십여 호 정도 되는 초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자그마한 마을이 나타났다.
양촌마을이라고 했다.
양촌댁은 마을 중간쯤 작은 개울 근처에 있었다.
마을의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방 두 칸의 아담한 초가였다.
양촌댁은 청운에게 오른쪽 방문을 열어 주었다.
청운이 신발을 벗고 방안으로 들어서자, 양촌댁이 재빨리 청운이 앉을 방석을 내주고는 은은이와 함께 잽싸게 부엌으로 갔다.
청운은 어두컴컴한 방을 한차례 쓱 둘러보았다.
사람의 얼굴 높이 정도의 맞은편에 있는 시렁이 청운의 눈길을 붙들었다.
좀 더 엄밀히 말해 청운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송판으로 얼기설기 짠 시렁이 아니라 시렁 위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 서책이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청운은 벌떡 일어서서 시렁이 있는 맞은편 벽으로 갔다.
시렁 위에 놓인 책들을 일별한 청운은 깜짝 놀랐다.
서책의 수준이 보통이 아니었다.
어지간한 문해력을 갖추지 않고는 읽어 내지 못하는 사서삼경에 여러 권의 불교 경전까지 있었다.
청운이 경전 하나를 집어 중간쯤 읽고 있을 때였다.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양촌댁과 은은이가 소박하지만 정갈한 밥상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삶은 닭과 여러 가지 소채와 방금 지은 따뜻한 밥 세 그릇이 소담스럽게 놓여 있었다.
이 집에 들어올 때 어디서도 닭을 보지 못한 것 같아 청운은 의아해하며 양촌댁에게 어디서 난 닭이냐고 물었다.
양촌댁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은 채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공자님, 워낙에 궁핍한 살림이라 찬이 변변치 못합니다. 제 성의라 생각하시고 드셔 주셨으면 합니다. 닭은 나중에 갚기로 하고 뒷집에서 꾸어 온 것입니다.”
청운은 양촌대과 은은의 얼굴을 흘깃 건너다보았다.
모녀의 표정에는 진심 말고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뜨거운 김이 솟아오르는 삶은 닭을 보자, 한동안 보지 못한 어머니와 여동생 영아가 생각나서 청운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모녀의 정성을 생각해서 청운은 밥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다 먹을 작정이었다.
청운이 젓가락을 들자 양촌댁이 닭다리를 하나를 쭉 찢어 청운에게 내밀었다.
청운은 사양하지 않고 닭다리를 넙죽 받았다.
자신이 그렇게 해야 그들 모녀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할 것 같아서였다.
청운이 밥을 반쯤 먹었을 때 모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저 시렁 위에 있는 서책들은 누가 읽는 것입니까. 어지간한 공부가 없이는 쉽게 읽을 수 없는 것들인데…….”
양촌댁이 몇 차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은은이 아버지가 황궁의 창고에서 가지고 나온 것들입니다. 저 서책들만 보면 울화통이 터져 죽을 지경입니다. 다 불살라 버리고 싶은데 은은이가 아버지의 흔적이 저것뿐이라고 하도 말려서 그대로 두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저는 완전 까막눈이지만 은은이가 제 아버지로부터 틈틈이 글을 배워서 서책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