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113화 (113/184)

113화 이들을 두들겨서 그들을 불러내야 한다.

청운은 철궤를 끌어올렸다.

좌우 양쪽에 두 개의 튼튼한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청운은 무문적으로 자물쇠를 부숴 버렸다.

뚜껑을 열자 서찰이 가득했다.

청운은 서찰을 하나하나 꺼내어 살펴보았다.

대부분의 내용은 어떤 물자를 어디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특히 황궁으로 들어가는 물자들이 많았다.

특이하게도 서찰의 끝에는 ‘口’와 ‘主’가 표기되어 있었다.

아니, 일종의 인장 같았다.

‘口’는 모용세가의 지하에서도 본 표기였다.

‘口’는 상제를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었다.

청운은 그럼 ‘主’ 또한 누군가를 지칭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청운은 표기가 다른 서찰을 각각 한 통씩 품속에 갈무리했다.

혹시라도 이 서찰이 나중에 어떤 증거가 될 것 같은 직감 때문이었다.

청운은 서찰을 품속에 집어넣으면서 아무래도 천이 황궁과 깊숙이 관련이 되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머지 두 석실에는 화약과 마약이 가득했다.

중원표국은 불법이라는 불법은 다 저지르는 것 같았다.

하긴 황궁의 권력자가 뒤를 봐주는데 무엇이 두려울까 싶었다.

법은 원래 법을 만들 수 있는 자는 지키지 않는 법이다.

법을 만드는 자들은 그 법으로 자신들이 더 큰 이익을 볼 수 있기에 만들 뿐이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법이 불편하면 곧바로 바꾸어 버리기도 한다.

하여, 법을 지키는 사람은 늘 힘없는 약자이고, 그들은 법을 지킬수록 손해를 보게 되어 있다.

물론 지키지 않으면 더 큰 손해를 본다.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

청운이 왔던 길을 되짚어 밖으로 나오자 중원표국 전체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수백의 장한들이 도검을 빼들고 청운을 에워쌌다.

철삭천잠사를 끊을 때부터 청운이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청운은 장내를 한차례 쓱 둘러보고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야산 아래에 있는 전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바로 그때 무리의 앞에 서 있던 장한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소리를 질렀다.

“웬 놈이냐! 정체를 밝혀라! 즉시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어라!”

청운은 아예 처음부터 본때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살상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자신 앞에 있는 자들은 표국의 종일뿐이다.

저들의 잘못이라고는 먹고 살기 위해 중원표국이라는 악의 집단에 몸을 담은 것뿐이다.

진짜로 단죄를 내려야 하는 자는 아직 이곳에 나오지 않고 어디선가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자들이다.

이들을 두들겨서 그들을 불러내야 한다.

그들이야말로 여태껏 자신들이 저지른 죄업의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한다.

최소한의 피로 최대의 죄를 탕감해야 한다는 것이 청운의 생각이었다.

청운이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일갈했다.

“나는 강호의 도의를 무시하고 악행을 밥 먹듯 하는 중원표국을 징치하러 온 저승사자다. 살고 싶은 자들은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라. 그것이 내가 당신들에게 열어 주는 마지막 생문임을 명심해라.”

청운은 말을 마치자마자 무영검을 뽑아 들었다.

공력을 주입하자 무영검이 우—우—웅 하며 요동을 쳤다.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가 밤의 어둠을 줄기줄기 잘라 내며 이 장 이상이나 일렁거렸다.

청운의 무위를 목도한 사내들이 헛숨을 내뱉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청운은 상대가 겁을 집어먹고 있는 이 순간이 저들의 기를 완전히 꺾어 버릴 적기라고 생각했다.

청운은 저들이 아예 자신에게 덤벼들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무력을 한 번 더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자신의 왼쪽에 있는 정자를 향해 쾌—타의 초식을 응용한 이기어검의 방식으로 무영검의 검기를 뿌리듯 내던졌다.

무영검에서 발출된 검기는 한순간 빛살 같은 직선으로 또 한순간은 완만한 곡선으로 또 다른 순간은 직선과 곡선이 교차하듯이 정자를 직격했다.

청운이 방금 전개한 초식은 무당의 적송자와 수라마군과의 대결에서 깨달음을 얻은 ‘수어검’의 수법을 응용한 것이었다.

번쩍하며 무영검에서 발출된 자황색의 검기가 찰나의 순간 커다란 원을 그리며 정자를 한 바퀴 돌고는 청운에게 되돌아왔다.

장내에 있던 수백여 명의 사내들이 도대체 무슨 일인가 의아한 표정으로 일제히 정자를 바라봤다.

바로 그 순간, 무슨 마법을 부린 듯 커다란 정자가 가로로 정확히 두 동강 나 버렸다.

장내에 있던 사내들은 너무 놀라 입을 딱 벌리고는 다물지 못했다.

심지어 어떤 자들은 너무 놀라 자신도 모르게 오줌을 지리기도 했다.

청운이 무심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그들을 향해 다가가자 모두가 움찔움찔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바로 그때 검은 무복을 입은 십여 명의 사내들이 물살을 가르듯이 장한들의 대열을 가르며 장내에 진입했다.

맨 앞에선 사십 대 초반의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입을 뗐다.

그는 사각형의 각진 얼굴에 형형한 눈빛을 가진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사내였다.

갈무리된 눈빛의 깊이로 봐서 무위가 최소 절정을 넘어선 것처럼 보였다.

등에는 커다란 대감도를 메고 있었다.

“대협은 도대체 누구길래 이 야밤에 중원표국을 침입해 이런 난동을 부리는 것이오. 즉시 정체를 밝히고, 무슨 연유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말하시오.”

청운이 입가에 한 가닥 조소를 머금고는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당신은 자격이 없소. 당장 국주를 불러오시오.”

청운의 무시와 조소에 기분이 몹시 상한 사내는 자신의 등 뒤에 있던 도를 뽑아 들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중원표국의 수석표두 서일충이오. 내가 자격이 없다니, 도대체 귀하는 어떤 자격을 말하는 것이오, 내가 이 상황을 책임질 테니 나에게 말하시오.”

청운도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뇌풍도법은 강호 일절로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오늘 중원표국에서 자신이 받아내야 할 혈채는 그가 감당할 수준의 것이 결코 아니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이 다시 한 번 입가에 비릿한 조소를 머금고는 높낮이가 없는 건조한 어투로 말했다.

“당신이 아무리 중원표국의 수석표두라 하더라도 내가 오늘 이곳에서 받아내고자 하는 빚을 감당할 수는 없소. 오직 국주만이 자격이 있소. 당장 국주를 이 자리에 불러오시오.”

또다시 청운의 무시하는 태도에 서일충이 불같이 화를 내고는 도를 휘두르며 청운을 공격했다.

그의 뇌풍도법은 이름에 걸맞게 상당히 사납고 강맹했다.

하지만 그는 청운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청운을 짓쳐 오는 그의 도로刀路가 눈에 뻔히 읽혔다.

그의 도기가 목젖 앞 두 치쯤 이르렀을 때, 청운은 슬쩍 목을 젖혀 가볍게 그의 도기를 피했다.

그리고 곧바로 왼발을 들어 올리며 풍신퇴의 수법으로 그의 명치를 그대로 내질러 버렸다.

퍼—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서일충은 이 장 이상을 던진 돌처럼 날아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서일충이 두어 사발의 피를 토한 후 비틀거리며 다시 신형을 일으키는 것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그가 자신의 도를 고쳐 잡고 막 청운에게 다시 달려들려고 했을 때였다.

그 순간, 묵직한 중저음의 외침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서 표두는 그만 멈추시오.”

그 외침과 동시에 왼쪽 전각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수십여 명의 흑의의 무복을 입은 사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나오자마자 그들은 기세등등하게 청운을 포위했다.

그들의 가슴 왼편에는 큼지막한 수守 자가 은색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가슴에 금색의 수守자 글씨가 새겨진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그 사내는 사십 대 초반 정도의 인물로 하관이 뾰족하고 눈빛이 매처럼 사나웠다.

외부로 전혀 기를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무위가 이미 절정을 훨씬 넘어선 것처럼 보였다.

“난 중원표국의 안위를 지키는 수호대주 감연성이다. 네놈은 대체 뭐하는 놈인데 이 야밤에 남의 신성한 영업장에 난입해 이런 돼먹지 않은 난동을 부리느냐.”

“…….”

“즉시 무릎을 꿇고 그 연유를 밝혀라. 그 이유가 합당하면 정상을 참작해 가벼운 징계로 일이 잘 해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청운은 냉랭한 코웃음을 치며 아까 서일충에게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당신은 자격이 없소. 즉시 국주를 불러오시오.”

자신을 무시하는 어투에 대노한 감연성이 자신 뒤에 도열한 사내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수호대는 저놈을 제압하라. 저항이 심하면 즉참해도 상관없다.”

사내의 명령이 떨어지자 수십여 명의 사내들이 다짜고짜 살검을 휘두르며 청운에게 달려들었다.

청운은 이참에 단단히 본때를 보여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묘묘보허의 보법으로 사내들 사이를 밤안개처럼 누비며 닥치는 대로 사내들을 짓이겼다.

채 일다경도 지나지 않아 수호대주를 뺀 수호대 전원이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대부분이 팔다리가 분질러져 반병신이 되고 말았다.

청운의 무위를 본 수호대주의 낯빛이 하얗게 질리더니 말투부터 공손하게 달라졌다.

“대, 대협은 대체 누구요. 존성대명을 밝히시오. 그래야 그에 합당한 대접을 하든지 말든지 할 게 아니요.”

청운이 수호대주를 차갑게 쏘아보며 말했다.

“내가 내 이름을 말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소. 다만, 당신은 위치와 직분이 이 상황을 타개하기에는 미흡할 뿐이오.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자격이 없다고 한 것이오. 잘 들으시오. 나는 강청운이오. 이제 국주를 불러주시오.”

수호대주 감연성과 수석표두 서일충이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딱 벌린 채 다물지 못하고 청운의 얼굴만 뚫어질 듯이 쳐다봤다.

감연성과 서일충이 동시에 깍듯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강호에 위명이 자자하신 무위검 강 대협을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진작 신분을 밝혔으면 이런 불상사가 발발하지 않았을 텐데, 유감입니다. 그래 무슨 연유로 본 표국을 방문하셨는지요.”

예의상 청운도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포권을 풀자마자 청운은 금세 예의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이 야밤에 이곳에 온 이유는 당신들이 감당할 사안이 절대 아니니, 즉시 국주에게 달려가 내가 왔다고 고하시오.”

감연성이 뒤를 돌아보며 수호대원 중 하나에게 턱짓을 했다.

그러자 그가 잰걸음으로 대전 뒤의 전각으로 향했다.

바로 그 순간, 장내를 울리는 늙수그레하지만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너는 나에게 갈 필요가 없다. 나는 이미 내 처소에서 나왔다.”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십여 명의 인물들이 대전을 돌아 장내에 들어서고 있었다.

앞줄에 세 명, 뒤에 여덟 명, 모두 열한 명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앞줄 가운데 금포를 입은 자였다.

그는 오십 대 초반 정도로 얼굴이 붉고 전체적으로 몸에 살집이 통통했다.

넉넉한 몸집과 다르게 그자의 눈빛은 날카롭고 교활했다.

청운은 어디선가 그를 한번 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 그는 바로 천산의 천도봉에서 봤던 육인 중 일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