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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비검무-114화 (114/184)

114화 진정한 나를 보고 싶으면 얼마든지 시험해 보시오.

우측에는 있는 자는 흑의에 복면을 쓰고 있었다.

그의 왼쪽 가슴에는 초승달과 기형검이 금빛 수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회천강 나루터의 흑선에서 한 번 맞닥뜨린 자였다.

관원들이 승선하자 안개처럼 사라졌던 바로 그 닌자의 수장이었다.

왼쪽에 있는 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하고 혐오스러웠다.

핏빛의 적포를 입은 그자는 사십 대 중후반 정도로 보였다.

그러나 너무 깡말라 도저히 얼굴만으로는 정확한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특이하게도 그자의 눈동자에는 거의 흰자위뿐이었다.

그자가 눈을 희번덕거릴 때마다 요사한 사기가 눈빛에서 줄줄 흘러내렸다.

사람을 바라보는 그의 흰자위는 마치 뱀이 개구리를 노리는 눈처럼 징그럽고 요사했다.

쳐다볼수록 기분 나쁜 눈이었다.

아주 특이한 사공을 익힌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금포를 입은 자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청운을 향해 다가왔다.

이 상황에서도 저렇게 능글맞다니 보통 이상의 심계를 가진 자가 틀림없는 것 같았다.

하긴, 이 정도 규모의 표국을 운영하려면 그에 걸맞을 정도로 자신의 진심을 감출 줄 알아야 한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그자가 능글맞은 웃음을 만면에 지으며 말했다.

“나는 이 표국을 이끌어 가고 있는 하서윤이라 하오. 강호의 살아 있는 전설이신 무위검 대협께서 무슨 긴한 볼 일이 있기에 이런 야밤에 우리 표국을 다 방문하셨습니까. 귀한 분이 오셨으니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하면서 말씀을 나누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자는 가능하면 일을 크게 만들지 않기 위해 유들유들한 유화책으로 청운을 어떻게 해볼 심산인 것 같았다.

그자는 청운이 이곳에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온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의뭉스러운 태도로 일관했다.

청운은 그의 그런 느글거리는 태도가 오히려 더 역겹고 비위가 상했다.

그래서 아까보다 더 냉랭하고 차가운 건조한 어투로 말했다.

“당신과 차를 마시며 나눌 다정한 이야기는 손톱만큼도 없소. 거두절미하고 내가 이곳에 온 목적만 간단하게 말하겠소.”

“…….”

“이곳에 억류하고 있는 소녀들을 당장 내 앞에 데리고 오시오. 내 요구를 거절하면 오늘 밤 중원표국은 핏물로 바닥을 칠해야 것이오.”

청운의 단호한 겁박에도 하서윤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예의 그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도대체 청운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투로 말했다.

“대체 대협이 말하는 그 소녀들이 누군지 나는 모르겠구려. 이곳의 소녀라고는 시비들과 표국의 잡일을 하는 아이들뿐인데. 좀 더 자세하게 말해 보시오.”

청운은 그의 뻔한 거짓말에 인상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대노했다.

“전 중원의 표국 지부와 전장에서 강제로 데려온 그 소녀들 말이오. 그래도 시치미를 떼겠소. 당신이 정년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결국 힘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겠군. 나를 절대 원망하지 마시오.”

국주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곧바로 청운의 말을 받았다.

“아, 그 아이들 말이군. 그 아이들은 우리의 재산이오. 우리가 빌려준 돈 대신 받은 것이오. 아무리 대협이라도 남의 재산을 그냥 강탈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요. 나는 내 재산을 한 푼도 대협에게 그냥 내어 줄 생각이 없소.”

청운이 높낮이조차 없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신은 당신의 좌우에 있는 자들을 굳게 믿고 있는 모양인데,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 곧바로 알게 될 것이오. 지금의 내가 천산의 천도봉에서 당신이 본 그 강청운이라고 생각하면 국주는 단단히 착각하는 것이오.”

“…….”

“나는 바로 당신들 때문에 그때보다 훨씬 더 독해졌고, 훨씬 더 잔인해졌고, 훨씬 더 악에 받쳐 있소. 진정한 나를 보고 싶으면 얼마든지 시험해 보시오.”

몇 번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하 국주가 잠시 결단의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자신의 오른팔을 허공에 번쩍 들어올렸다.

순간 대전과 그 좌우의 전각의 지붕에서 언뜻 보아도 이백여 명이 훨씬 넘는 흑의의 복면인들이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하지만 청운은 이미 그들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었다.

전문적인 살수들 같았다.

그들이 호흡까지 조절하며 기척을 숨긴 채 사물처럼 잠복하고 있었으나 청운이 이곳에 잠입하기 전 극황지감술을 운기할 때 이미 그들의 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청운의 극황지감술은 이미 사물의 기감까지 온전히 느끼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청운은 눈을 들어 지붕을 한 차례 훑어보았다.

그들의 몸에서 혈향이 물씬 풍겼다.

평생 전문적으로 사람을 죽여 온 기계들 같았다.

바로 그 순간 하국주가 들고 있던 오른팔을 내렸다.

그 신호를 시작으로 지붕 위에 대기하고 있던 살수들이 마치 고무줄을 당겼다 놓은 것처럼 일제히 청운을 향해 쏘아져 왔다.

청운은 손속에 인정을 두지 않기로 작심했다.

묘묘보허의 신법으로 까마득히 허공으로 치솟은 청운은 자신의 발아래 까마귀 떼처럼 우글거리는 살수들을 향해 무자비한 살초를 전개했다.

청운은 저런 인간 백정 같은 놈들을 한 놈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청운은 인정을 베풀어 봤자 그들은 세상에 해만 끼칠 인간 도살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살인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에 자신들이 세상에서 저지르는 짓이 악인 줄도 모르는, 계도의 여지조차 전혀 없는 살인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으—악.”

“으—악—악—악.”

무영검의 투명한 자황색 검기가 밤하늘의 대기에 번득일 때마다 연이은 단말마의 비명이 또 다른 단말마의 비명을 불러왔다.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처절한 비명이 중원표국의 하늘을 가득 메웠다.

투명한 자황색의 빛무리와 함께 허공에서 번득번득하는 청운의 신태는 마치 지상의 악을 섬멸하기 위해 천계에서 강림한 천신 같았다.

무영검의 검광이 허공에 휘몰아칠 때마다 토막나고 절단되고 절삭된 살수들의 몸통과 목과 팔다리가 우박처럼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채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허공에서 까마귀 떼처럼 득시글거리던 살수들은 모두 사라졌다.

하늘에는 깜깜한 밤만 가득 펼쳐져 있었다.

겨우 이십여 명도 안 되는 살수들만이 공포에 잔뜩 질린 채 간신히 지상에 발을 딛고 두 다리를 사시나무 떨듯 후들거리며 서 있었다.

심지어 그들조차 온전하게 성한 자가 거의 없었다.

한쪽 팔과 다리가 없거나 혹은 심한 검상을 입어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전의를 상실한 것을 넘어 아예 삶 자체를 포기한 자들 같았다.

그제야 청운은 천신이 지상에 강림하듯 천천히 허공에서 하강했다.

청운의 옷은 살수들의 피로 칠갑이 되어 있었다.

혈신血神 같은 청운의 모습을 넋이 빠진 채 쳐다보던 하 국주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잔인하구나. 정말 잔인하구나. 협객이 아니라 악귀구나. 그래서 너를 더욱 살려둘 수가 없구나. 오늘 이곳에 내 무덤을 팔지 네놈 무덤을 팔지 사생결단을 내자.”

청운이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은 무심한 눈빛으로 하국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당신을 죽이려는 자에게 인정을 베푼 적이 있소. 사람은 다 마찬가지 아니요. 타인에게 죽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자를 당신은 한 번이라도 보았소.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다음 수를 보여주시오.”

“…….”

“하 국주 당신이라면 더 환영이오. 하 국주의 운형비권이 이미 화경의 경지에 들어 권을 휘두를 때마다 구름이 일고 뇌성이 친다던데, 어디 한 번 견식을 해봅시다.”

청운의 빈정거리는 말에 모멸감을 느낀 하 국주가 장내로 들어서기 위해 한 발짝 움직였을 때였다.

왼쪽 가슴에 금색 수실로 초승달과 기형검이 수놓인 혈월막의 사내가 제지하고 나섰다.

그가 그의 부하 넷과 함께 청운 쪽으로 걸어왔다.

그들의 모든 동작에는 하나의 군더더기도 없었다.

심지어 걸어오는 팔 동작과 걸음걸이조차 최적의 단순한 동작만 취했다.

회천강 나루터의 흑선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그들의 실전적인 야수검은 화려하지 않고 너무나 단순해서 오히려 그만큼 더 치명적이었다.

그들의 검은 모든 잡동작을 제거한 실전에 최적화된 것이었다.

그들의 검은 인간이면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작은 빈틈을 최단거리로 파고든다.

그래서 그들과 검을 섞을 때 작은 실수는 바로 생명과 직결된다.

실전적 검법에 걸맞게 그들의 검 또한 중원의 검보다 훨씬 얇고 가벼웠다.

그만큼 더 예리해서 그들의 검로를 예측하고도 당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의 검은 특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을 가운데 두고 그들이 압박하듯 서서히 돌기 시작했다.

대치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특별한 발검의 자세 없이 그리고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순간과 각도에서 그들의 검기가 청운의 전신요혈로 날아들었다.

청운은 몸을 회전시키며 회의 초식으로 검막을 형성해 신형을 보호하면서 쾌—타—절—변의 초식을 연환해 무영검을 내질렀다.

차—차—차—창.

그러자 듣는 사람의 신경을 끊어 내는 듯한 쇳소리가 쉴 새 없이 장내에 쏟아졌다.

청운과 닌자들의 움직임이 워낙 빨라 번득번득하는 검광만이 밤하늘에 번쩍일 뿐이었다.

서로가 이십여 초쯤 교환했을 때 두 마디 짧은 비명이 돌연 번득이는 검광 속에서 튀어나왔다.

동시에 두 명의 닌자가 가슴과 목을 부여잡고 발에 차인 돌처럼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한 명은 목이 반쯤 갈라져 절명했고 다른 한 명은 가슴이 쩍 갈라져 즉사했다.

그리고 십여 초가 채 교환되지 않아 또다시 두 명의 닌자가 전열에서 이탈했다.

그들 역시 가슴과 복부에서 피를 콸콸 쏟더니 즉사했다.

청운과 왼 가슴에 금색의 문양이 있는 닌자 단둘이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대치하고 있었다.

청운은 왼쪽 옷소매가 살짝 베어진 것 말고는 아주 멀쩡했다.

반면, 닌자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는 온몸 곳곳에 자상을 입고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있었다.

그는 앞에 청운이 있었기에 억지로 대치하고 있을 뿐 이미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바로 그 순간 장내의 상황을 뚫어져라 주시하던 하 국주와 핏빛의 적포를 입은 깡마른 자와 그의 부하로 보이는 자들이 장내로 날아들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능글맞은 표정을 얼굴에서 씻은 듯이 지운 하 국주가 입가에 한 가닥 싸늘한 냉기를 베어 문 채 말했다.

“역시 강호의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군. 설산의 망혼단애에서 추락한 후 도대체 무슨 기연이 얼마나 있었기에 그 짧은 시간에 이런 초고수가 되어 생환해 우리의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는지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구나.”

하 국주는 말을 이어 갔다.

“그때 확실히 네놈을 제거하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로구나. 우리가 모용후의 장담을 너무 믿었던 게 내 생애 최고의 불찰이 될 줄이야.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걸 지금 그걸 탓해서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안다.”

“…….”

“그래서 당시의 일이 더 후회된다. 하지만 오늘은 오늘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될 터. 그때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을 오늘 마무리 지으면 될 터. 나는 오늘 이곳에서 반드시 네놈을 제거해 더 이상의 후환을 만들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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