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이곳의 숲과 동화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양천호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청운에게 물었다.
“부문주님, 오늘 저녁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도대체 그자들이 누구길래 부문주님께서 이 정도까지 곤욕을 치루신 겁니까.”
청운이 한 차례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혈검령주가 왔었던 것 같습니다. 그자가 펼친 혈령비진에 갇혀 잠시 애를 먹었습니다. 내가 안가에서 너무 편한 생활에 익숙해 있다가 경계심이 잠시 무뎌졌던 것 같습니다. 무기도 없이 편한 차림으로 대나무 숲을 산책하고 있을 때 그들이 돌연 급습을 했습니다.”
양천호가 대경실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혈검령주와 혈령비진이라니. 부문주님, 이만하시길 천만다행입니다. 혈령비진에 걸려 여태껏 강호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고 들었는데… 큰 곤욕을 치루셨습니다.”
“…….”
“그런데 그자들이 부분주님이 이곳에 계신 걸 어떻게 알고 급습을 하다니…. 제가 당장 부문주님께서 편안하게 쉬실 수 있는 다른 곳을 알아보겠습니다.”
청운이 양천호의 말에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설마 그들이 그렇게 혼나고도 다시 이곳에 오겠습니까. 만약 다시 온다면 그날이 그들의 제삿날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곳이 편하니 괘념치 마시지요.”
양천호가 얼굴에 무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그래도 그들이 모르는 다른 곳이 더 나으실 것 같은데… 부문주님, 이미 이곳은 적에게 노출되어 안전하지 않습니다. 부문주님은 저희 하오문의 상징이나 마찬가지 이십니다. 부문주님께 신상에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건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알겠습니다…….”
“저는 내일부터 당장 다른 곳을 알아보겠습니다. 참, 혈검령주와 혈검사자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청운이 양춘호의 물음에 곧바로 대답했다.
“혈검령주를 포함해 겨우 서너 명만 부상을 입은 채 간신히 도주했습니다. 제가 너무 탈진해서 그들이 도주하는 것을 뻔히 보고도 어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마 다시는 이곳에 얼씬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청운이 의원이 준 두 개의 약병을 양춘호에게 건네며 계속해서 자신의 말을 이었다.
“양 분타주님, 제가 보기에 그 의원이 비록 명성은 없어도 영 돌팔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것은 형주 분타에서 보관하십시오. 저한테는 제갈신의가 준 약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양 분타주가 약병을 품속에 갈무리하며 말했다.
“부문주님, 새로운 안가를 마련하는 대로 곧장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몸조리 잘하시고 편히 쉬십시오.”
청운이 양 분타주의 인사에 가볍게 예를 표하며 답례를 했다.
청운은 양 분타주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혈검령주 장우기가 함부로 자신을 노리지는 못하겠지만, 그자가 이곳 안가를 알고 있다면 사사천이나 天에서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곳 안가에 대한 정보를 天에서 혈검령주에게 제공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양 분타주에게 말은 하지 않았으나 자신이 좋아하는 대나무 숲이 대부분 황폐화되어 이곳 안가에 정나미도 좀 떨어진 상태였다.
청운은 그날부터 매일 내상을 치료하는 데 전념했다.
밥 먹는 일 말고는 하루 종일 대주천과 소주천을 번갈아 운기했다.
혈령비진을 상대하느라 거의 내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너무 무리하게 ‘멸환겁’을 전개하는 바람에 가볍지 않은 부상을 입고 말았다고 청운은 혼잣말 하듯 웅얼거렸다.
내상을 완전히 다스리려면 최소한 열흘 정도는 걸릴 것 같았다.
그나마 그것도 제갈신의가 준 내상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사실 청운은 내상을 당한 바로 이곳에서 내상을 치료하는 것도 좀 찜찜하기는 하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양천호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삼 일 후, 양 분타주와 진 부분타주가 부리나케 안가로 찾아왔다.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는지 그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들은 청운을 보자마자 읍을 했다.
양 분타주가 말했다.
“부문주님, 몸은 좀 어떠신지요.”
청운도 가볍게 예를 갖추고는 말했다.
“덕분에 차도가 좀 있습니다. 곧 괜찮아질 것입니다.”
양 분타주가 곧장 청운의 말을 받았다.
“부문주님, 드디어 어제 새로운 안가를 구했습니다. 이곳에서 삼십 여리 떨어진 청하산 초입입니다. 언제 저와 함께 한 번 둘러보시지요. 입지나 풍광으로 보나 이곳보다 훨씬 더 나았으면 나았지 전혀 못 하지 않습니다.”
“…….”
“낙양에 있는 어떤 부호가 여름 별장으로 사용하던 장원인데 팔지 않겠다고 하는 것을 하여빈 총사께서 그곳보다 더 좋은 것을 반드시 구해 주겠다며 간신히 설득해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청운은 자신 때문에 하오문의 여러 사람이 고생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또 빚을 지게 되는구나 하고 청운은 생각했다.
물건이든 감정이든 누군가와 뭔가를 주고받는 것이 사람의 일이다.
이번에 받았으니 다음에 갚으면 될 터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이 입가에 한 줄기 은은한 미소를 베어 물고는 말했다.
“분타주님. 뜸 들일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지금 당장 그곳으로 가시지요. 이미 청소도 깔끔하게 해놨다면서요.”
양 분타주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부문주님, 저를 따라오시지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양춘호와 진소구는 자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법을 전개해 안가를 벗어났다.
* * *
양천호의 장담대로 장원은 과연 입지도 좋았고 풍광도 괜찮았다.
마치 장원을 지키는 호위병처럼 아름드리 노송들이 장원을 빽빽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불과 오십여 장 떨어진 곳에는 기암괴석이 즐비한 수려한 계곡도 있었다.
계곡의 상류에는 수량이 풍부한 폭포까지 있었다.
폭포의 높이는 거의 이십여 장이나 되었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장원까지 은은하게 들려왔다.
건물은 본채와 별채 두 동이었다.
규모는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청운이 본채를 사용하고 어린 하오문도와 시비가 별채를 사용할 것이라고 양 분타주가 말했다.
청운보다 더 신이 난 양 분타주가 일일이 방문을 열어 보이며 청운에게 집 구조를 꼼꼼히 설명했다.
양 분타주는 청운이 서책을 좋아하는 줄 어떻게 알았는지 본채에 딸린 방 하나를 아예 서재로 꾸며 놓았다.
서재의 책장에는 사서삼경에서 불교 경전까지 제법 그럴듯하게 구색을 잘 갖춰 놓은 것 같았다.
심지어 질 좋은 문방사우文房四友에다가 피리와 금禁까지 구비해 놓았다.
그 악기에 딸린 서책까지 몇 권 마련해 놓았다.
청운은 양 분타주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 자상해서 몇 번이나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때마다 양 분타주는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집을 대충 둘러본 청운과 양 분타주 그리고 진 부분타주가 객실로 들어갔다.
그새 시비가 찻물을 끓이며 대기하고 있었다.
청운 일행이 탁자에 앉기도 전에 시비가 차를 한 잔씩 따라주고는 곧바로 객실을 나갔다.
양 분타주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부문주님, 제 딴에는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 마음에 드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저번의 안가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이곳이 훨씬 더 나은 것 같은데 부문주님의 생각은 어떠신지…….”
양 분타주는 자신의 견해에 조심스럽게 청운의 동의라도 구하듯 말끝을 조금 흐리며 운을 뗐다.
청운은 만면에 싱그러운 웃음을 띤 채 환하게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양 분타주님의 생각과 똑같습니다. 저번 안가도 괜찮았지만, 이곳 장원이 훨씬 더 마음에 듭니다. 이런 좋은 곳을 구하시느라 애 많이 쓰셨습니다. 덕분에 제가 아주 편하게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청운의 칭찬에 양 분타주가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의기양양해 했다.
양 분타주와 진 부분타주는 한 시진 정도 차를 마시며 강호의 현 정세에 대해 청운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차를 다 마시자마자 그들은 청운에게 푹 쉬시라는 인사를 하고는 장원을 떠났다.
그들이 떠나자 청운도 장원을 나와 장원 주변을 한차례 꼼꼼히 더 둘러보았다.
장원을 빽빽하게 두르고 있는 아름드리 노송 너머로 아득하게 보이는 산정의 우뚝 솟은 암봉도 좋았고, 암봉 위를 유유자적 흐르는 뭉게구름도 좋았고, 노송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가을 햇살도 너무 좋았다.
청운의 시선이 아름드리 노송의 줄기와 가지를 따라 이리저리 오르내릴 때 솔잎들 사이사이로 떨어지는 빛의 가시들이 마치 청운의 전신에 황금빛 침을 놓는 것 같았다.
청운은 그 빛의 치료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며 제자리에 서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귀가 활짝 열렸다.
숲은 소리로 가득했다.
솔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 그리고 노송의 우듬지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잦아드는 바람의 느린 호흡, 고요한 금빛 햇살을 연신 쪼아대며 나무와 나무를 날아다니는 이름 모를 새들의 소리까지…….
청운은 전신의 감각을 활짝 열고 자신의 정신과 감각들이 숲의 가장 깊은 곳으로 흐르도록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청운은 자신의 전신에 속한 모든 경락과 혈맥 그리고 세맥까지 정화되는 것 같은 기분에 그 기분을 혹여라도 망칠 수 있을지 모를 어떤 움직임도 없이 그대로 계속 서 있었다.
청운은 자신의 시각과 청각 그리고 후각을 포함한 모든 감각이 열리며 동화되어 하나의 전체로 융합되는 느낌을 받았다.
심지어 청운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이곳의 숲과 동화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얼마나 그렇게 가만히 서 있었을까.
갑자기 노송 사이를 누비던 몇 마리 산새의 요란스러운 움직임에 청운은 눈을 번쩍 떴다.
안 그래도 심연처럼 깊었던 청운의 눈빛이 숲의 고요와 적막까지 보태져 더 깊어진 것 같았다.
청운은 가슴을 활짝 펴고 몇 차례 깊은 심호흡을 하고는 장원으로 돌아왔다.
서재에서 이 책, 저 책 꺼내서 읽다가 새로운 장원에서의 첫날을 마무리했다.
다음 날부터 청운은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는 곧바로 폭포로 갔다.
떨어지는 폭포의 물을 맞으며 내상도 치료하고 명상을 하면서 아직 타통하지 못한 세맥들을 뚫어 이참에 상단전까지 열어볼 생각이었다.
멀리서 볼 때는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았으나 가까이서 보니 절벽에서 곧바로 널따란 소沼로 떨어지는 폭포의 낙폭이 상당했다.
청운은 명상할 만한 적당한 자리가 있는지 안력을 돋우어 폭포 주변을 살펴보았다.
소沼에서 위쪽으로 삼분의 일정도 되는 지점의 폭포 뒤쪽에 움푹 파인 곳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땅에서 오륙 장정도 되는 높이였다.
청운은 곧바로 묘묘보허를 전개해 그곳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