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자네에게 목숨 빚을 졌네.
“소협, 정말로 큰일을 했네. 정말 대단하네. 소협의 활약 덕에 강호의 큰 근심거리를 하나 던 것 같네. 하지만 저들도 이대로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네. 그들이 다음에 또 무슨 흉악한 일을 벌일지 벌써부터 고민이네. 강호에 짙게 드리운 암운이 언제나 말끔히 걷힐는지…….”
천리신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진자가 다시 입을 뗐다.
“소협,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객당으로 가서 조반을 들고 차라도 들며 이야기를 나누세. 모두가 소협이 깨어나기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네. 어서 가세.”
객당에는 모두 여섯 명이 탁자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혼원벽력도 팽추도와 검후 그리고 진소소와 나머지 모르는 사람이 셋 더 있었다.
모두 오십 대 중 후반 정도로 보였다.
그중 한 사람은 여승이었다.
청운이 들어서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청운을 반갑게 맞이했다.
청운이 모두에게 일일이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췄다.
그들도 청운을 마주 보며 따로따로 포권을 취했다.
여승은 아미파의 장로 금정신니였고, 푸른색의 장포를 입고 청수한 인상의 노인은 청성파의 장문인 구하비성 풍비양이었다.
마지막으로 흰색 도포에 긴 수염을 기른 사람은 점창파의 장로 낙일비천 태허자였다.
청운이 자리에 앉자마자 혼원벽력도가 청운의 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소협, 정말 큰일을 했네. 소협이 아니었으면 누가 과연 그자를 막을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등골에 식은땀이 날 지경이네. 삼백 년 전의 전설과 현재의 전설이 격돌하는 장면은 놀라움을 넘어 차라리 무서울 지경이었네.”
“…….”
“현 강호에 소협 같은 인재가 없었다면 과연 누가… 나는 더 이상 생각도 하기 싫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네.”
팽추도의 말에 검후가 한마디 거들었다.
“세상에 그런 검이 다 있었다니, 나는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아직도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네. 그자의 <자전십이파감>도 대단했지만, 소협의 무위검은 더 대단했네. 두 사람의 검을 보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모자란지 절실히 깨달았네. 우물 안 개구리도 나 같은 개구리는 없는 것 같았네.”
검후의 말을 받아 아미파의 금정신니가 말했다.
“나는 조금 늦게 도착해 두 사람의 대결을 다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정말로 대단한 검이었습니다. 살아서 다시 안개開眼을 한 느낌이었습니다. 아직도 무위검 소협의 마지막 초식이 눈앞에 생생합니다. 그나저나 지금 강호가 돌아가는 사정이 심상찮은 것 같습니다. 아미의 복호산까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강호가 장차 어떻게 될는지…….”
점창의 장로 낙일비천 태허자도 한마디 거들었다.
“두 사람의 검을 보면서 나는 그동안 나이만 먹었지, 아무것도 한 게 없구나하는 자책에 잠을 다 설쳤습니다. 단연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검이었습니다. 현세에 그런 검이 존재했었다니… 아직도 믿을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청성파의 장문인 풍비양도 빠지지 않고 한마디 했다.
“지금 강호에 강 소협같이 의기 있는 젊은 분이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시대의 복이지요. 소협 같은 분이 없었다면 누가 있어 저들의 야욕을 저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소협. 저들이 대체 왜 저러는지 속 시원하게 이야기나 좀 해주시오. 대충 듣기는 들었지만 저들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청운이 풍비양의 말을 받아 天의 실체에 대해 이야기했다.
“저들의 최종 목표는 삼계三界를 열어 세상의 질서를 바꾸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다른 사람이야 죽든지 말든지 자신들이 이 세상의 주인이 되겠다는 것이지요. 세상의 주인이 바뀌는 것이야 하늘의 소관이지만 삼계는 절대로 열려서는 안 됩니다. 삼계가 열리면 세상에는 연민과 동정과 사랑 대신에 분노와 증오와 혐오가 가득 찰 것입니다.”
“…….”
“그러면 전쟁이 끊이지 않을 것이고 그 틈새에서 죽어 나가는 것은 힘없는 양민들입니다. 그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열심히 산 죄밖에는… 지금 강호에는 天의 무리가 침투하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청운은 잠시 주변 분위기를 살피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아직 그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상제上帝라는 자를 앞세워 중원표국과 사해표국 그리고 대륙표국을 손아귀에 넣고는 중원의 전 상권을 좌지우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황궁의 대부분 대소 신려 또한 뇌물과 무력으로 장악한 상태입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심지어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악의 전설인 마족魔族까지 부활시켰습니다.”
청운의 입에서 마족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모두의 얼굴에 두려움을 넘어 공포가 서리는 것 같았다.
“모용세가에서 제가 그걸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그에 더해 현재 중원 곳곳에서 양민들을 혹세무민하며 혼란을 부추기고 있는 재천신교도 그들의 앞잡이가 분명합니다. 상계와 종교계 그리고 무림과 황궁까지 그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은 곳이 없을 지경입니다.”
“허허…….”
“한마디로 그들은 자신들의 최종 목표인 삼계를 여는 것을 감추기 위해 이 땅에 총체적 혼란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저의 조심스러운 개인적 판단이지만 이 사태의 중심에는 어쩌면 마족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청운의 말에 그곳에 있던 모두가 너무 놀라서 입을 딱 벌리고는 다물지 못했다.
바로 그때.
문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몇 차례 나더니 곧바로 무당제일검 적송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자 적송자도 일일이 포권을 취하며 답례를 했다.
적송자가 한동안 청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운을 뗐다.
“그래 몸은 좀 어떠신가. 자네에게 목숨 빚을 졌네. 자네가 아니라 나였다면 황금면객에게 백여 초도 제대로 버티지 못했을 것이네. 자네는 불과 얼마 전 나와의 비무 때와는 또 다른 무위를 보여주었네.”
“그저 작은 깨달음이 있었을 뿐입니다.”
“아니네, 자네의 그 깨달음의 속도에 감탄을 넘어 할 말을 잃을 지경이네. 나는 이제 정말 검을 꺾고 은퇴를 할 생각이네. 다만 자네에 대한 큰 빚이 있으니 그건 꼭 갚고 싶네.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구애받지 말고 말하게. 강호의 명숙들이 모두 모인 이 자리에서 내 약속함세.”
청운은 그들과 조반을 먹자마자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무당산의 산문을 내려왔다.
혼원벽력도와 천리신개는 산문까지 따라 나와 청운을 배웅했다.
* * *
하늘에 닿을 듯 허공으로 치솟은 아름드리 노송의 솔잎들이 지난 밤 폭우에 씻겨 더욱 선명한 색을 띠었다.
그 깨끗한 솔잎들에 촘촘히 걸러져서 그런지 얼굴에 와닿는 가을 햇빛이 너무나 부드러운 것 같다고 청운은 느꼈다.
어젯밤의 비바람이 몹시 심했던지 곳곳에 상하거나 쓰러진 나무들이 두서없이 서로 기대거나 포개어져 있었다.
밑동이 부러지거나 뿌리째 뽑힌 나무들도 있었다.
그런 곳도 어떤 짐승들에게는 편안한 안식처가 되었는지 갑자기 부러지고 뽑힌 뿌리에 깔려 짓이겨진 다람쥐 같은 작은 짐승들의 시체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청운은 삶이란 참 잔인한 것이란 생각을 했다.
청운은 무당산을 내려오자마자 곧바로 새 안가인 장원으로
장원 앞에는 언제 왔는지 양 분타주와 진 부분타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청운을 보자마자 잰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청운에게 깍듯이 포권을 취했다.
청운도 가볍게 읍을 하며 답례를 했다.
방에 들어가자 어린 문도가 찻물을 끓이고 있었다.
어린 문도는 탁자에 놓인 찻잔 차를 한 잔씩 따르고는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양 분타주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문주님, 황금면객과 대결 직후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몸은 좀 어떠신지요.”
처운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양 분타주를 보고 말했다.
“덕분에 무탈합니다. 큰 내상이나 외상을 입은 건 아니었습니다. 너무 많은 힘을 일순간에 쏟아내는 바람에 잠시 탈진한 것뿐입니다. 전혀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제가 아직 부족한 게 많아서 그렇습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분타주님께 부탁할 게 있습니다. 양 분타주님, 혹시 중원에 맥학脈學의 맥이 이어지고 있는지 한 번 수소문 해주십시오.”
양춘호가 잘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왕숙화王菽和의 맥脈은 동진東晉 이후에 끊어졌다고 알려져 있는데… 예, 알겠습니다. 전 문도를 동원해 전 중원을 샅샅이 뒤져보겠습니다.”
차를 다 마시자마자 양 분타주와 진 부분타주는 청운에게 푹 쉬시라고 말하고는 장원을 떠났다.
그들이 가자마자 청운은 잠자리에 들었다.
너무 피곤했다.
그들에게는 괜찮다고 말했으나 사실 청운은 자신의 몸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 이상이 없는 것 같았으나 운기를 할 때마다 기의 불균형 때문에 내기가 진탕되는 걸 느꼈다.
이런 상태로는 강적과 장시간 대적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순간 힘을 쏟아내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으나 전력을 다해 진력을 끌어올리면 갑자기 내기가 진탕되어 장시간 버티는 것이 힘들었다.
청운은 제갈신의가 준 내상약을 먹고 운기를 하며 치료를 해보려고 거듭 시도를 해 보았으나 별무소용別無所用이었다.
지금의 상태는 내상이 아니라 혈과 맥에 잠재해 있는 불균형한 힘의 갑작스런 충돌로 인해 발생한 문제인지라 회복이 난망했다.
아무래도 혼자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같았다.
그렇다고 제갈신의에게 갈 수도 없었다.
제갈신의는 내상과 용독에 관해서는 당대 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지금 자신이 처한 문제에는 한계가 있을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제갈신의는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과 관련된 혈맥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고 청운에게 직접 말했었다.
방법은 청운 스스로 상단전을 열어 신神을 축기해 힘의 균형을 맞추는 것뿐인데 청운은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시도해 보았으나 계속 실패만 거듭 했다.
충분을 시간을 두고 꾸준히 시도한다면 스스로 상단전을 열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청운은 그럴 여유는 없다고
언제 어느 순간에 자신을 노리는 혹은 자신이 노리는 적들과 격전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청운은 최후의 방법으로 양 분타주에게 왕숙화王菽和의 맥脈을 찾아보라고 부탁을 한 것이다.
물론 양 분타주가 찾지 못할 것을 대비해 청운 스스로도 상단전을 열기 위해 계속 시도할 참이었다.
청운은 다시 아침을 먹자마자 저번과 마찬가지로 폭포 뒤의 동굴로 갔다.
은하수처럼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청운은 상단전을 열기 위해 하단전과 중단전을 뚫을 때의 느낌을 오롯이 떠올리며 대주천과 소주천을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