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아마 그들이 그냥 있지는 않을 겁니다.
객당의 내부는 검박하면서도 고급스러웠다.
아주 비싼 장식물들로 화려하게 치장하지는 않았으나 모든 가구와 식탁은 값비싼 흑단목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벽면 곳곳에는 대가의 것으로 보이는 두루말이 그림과 글씨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구석구석마다 놓인 장식장에는 서역이나 동방에서 수입해 온 것 같은 고급스러운 도자기가 놓여 있었다.
청운 일행이 객당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찻물을 데우고 있던 시비가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시비는 청운 일행이 자리에 앉자마자 찻잔에 차를 한 잔씩 따르고는 곧 식사를 준비하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시비가 밖으로 나갈 때 담우린도 따라 나가더니 시비에게 무슨 말을 하고는 곧바로 다시 객당으로 돌아왔다.
일다경쯤 지났을 때 아까 그 시비가 다시 들어오더니 담우린을 보고 말했다.
“셋째 공자님, 가주님의 내실에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가주님께서 손님과 함께 그리로 오시라고 하십니다.”
시비의 말이 끝나자마자 담우린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청운에게 말했다.
“제가 아버님에게 아뢰었더니 아버님께서 강 대협을 만나고 싶어 하셨습니다. 자, 가시지요.”
청운 일행이 동쪽에 있는 월동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십 대 초반 정도의 청수한 인상의 노인이 내실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은은한 청의를 입은 그 노인은 눈빛이 온화했고 턱에는 한 뼘 정도 길이의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담우린이 그 노인을 보자마자 청운에게 말했다.
“아버님이십니다.”
담우린의 말리 끝나자마자 청운은 깍듯하게 노인에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강호의 후배 강청운이 가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가주 담위진도 청운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강호의 새로운 전설이신 무위검 소협을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셋째와 장차 제 집안의 며느리가 될 아이를 위기에서 구해주셨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담위진은 청운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연락도 없이 오시는 바람에 급하게 준비하느라 많이 부족합니다. 정성이라 생각하시고 많이 드셔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자, 안으로 드시지요.”
가주 담위진이 내실의 문을 열고는 같이 들어가자고 했다.
청운은 식탁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저런 많은 음식을 준비했는지 상다리가 휠 것 같았다.
청운이 자리에 앉자 가주가 청운에게 술을 한잔 따라주며 말했다.
“그래, 대협께선 무슨 일로 이 청해성까지 오셨습니까.”
두 손으로 가주가 따라주는 술잔을 받으며 청운이 말했다.
“황토고원黃土高原에 볼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가주가 청운의 말을 받았다.
“그곳은 땅이 척박해 마을도 몇 군데 없고, 마을이라고 해 봤자 황토로 항아리를 구워 파는 것이 전부인데… 대협은 장소를 찾아오신 겁니까 아니면 사람을 찾아오신 겁니까?”
청운이 가주의 말을 곧장 받았다.
“혹시 그곳에 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요.”
가주가 즉각 대답했다.
“예, 한 곳 있습니다. 저희 세가에서 쓰는 항아리들 대부분이 그들이 납품한 것입니다. 일 년에 서너 번 정도 구매를 합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가주가 담우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린아! 네가 내일 대협을 모시고 그곳까지 안내해 드려라.”
담우린이 대답했다.
“예, 아버님.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당황한 청운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굳이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길만 가르쳐 주시면 저 혼자 가면 됩니다.”
청운의 만류에도 가주는 막무가내였다.
이참에 청운과 단단히 인연을 맺으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청운은 너무 미안한 마음에 화제를 돌리기 위해 다른 말을 꺼냈다.
“가주님, 천금보는 어떤 곳인가요. 그들이 왜 담씨세가에 시비를 거는 것인지요?”
청운의 질문에 가주가 몇 차례 한숨을 몰아쉬더니 말했다.
“사실, 천금보는 십여 년 전만 해도 이곳 청해에서 그 영향력이 미미한 세력이었습니다. 두어 곳의 기루와 표국 하나를 운영하며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지요. 한 오륙 년 전 사해표국과 손을 잡은 후부터 갑자기 세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
“청해에 있던 표국이란 표국은 죄다 인수하고 성도의 기루와 전장도 대부분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갔습니다. 누군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황궁의 대단한 권력자가 천금보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황궁이라…….”
“그리고 힘과 권력을 가지고 나서부터 천금보는 저희 세가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전에는 감히 저의 세가에 시비를 걸 생각도 못했지요.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된 것이지요. 게다가 천금보의 둘째 천호원이 청가장의 옥교에게 여러 번 혼인을 요청했는데 번번이 거절을 당했습니다.”
담위진은 잠시 차로 목을 축인 후 말을 이어나갔다.
“그때 이미 저희 셋째 린이와 옥교 사이에 혼담이 오가던 중이었습니다. 그 혼담이 우리 세가 쪽으로 기울자 그때부터 사사건건 시비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나저나 큰일입니다. 오늘 대협에게 그렇게 수모을 당했으니 모르긴 몰라도 아마 그들이 그냥 있지는 않을 겁니다.”
“…….”
“특히 천금보의 둘째 천호원은 성정이 음흉하고 잔인하기로 이것 청해에서 소문이 자자합니다. 사기와 밀수는 물론 인신매매까지 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게다가 부녀자 겁탈까지 온갖 나쁜 짓을 다하고 다니는 망나니 중의 망나니이지요.”
가주 담위진은 청운을 향해 걱정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들이 또 무슨 해코지를 할지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천금보에는 고수들도 상당합니다. 세외의 마두들도 빈객으로 와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대협. 오늘은 저희 집에서 푹 쉬며 여독을 풀고 내일 아침까지 드시고 황토고원으로 출발하시지요.”
청운은 오랜만에 음식 같은 음식으로 포식을 하고 담우린이 마련해 준 방에서 쉬고 있었다.
진시辰時가 좀 지났을까 갑자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청운은 청력을 돋우었다.
시끄러운 소리는 패루牌樓 부근에서 나는 것 같았다.
말 울음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누군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당장, 그놈을 나오라고 해라. 아니면 오늘 담씨세가를 청해에서 지워버릴 것이다.”
천호원의 목소리 같았다.
그렇게 얻어맞고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양이구나 하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벽에 기대어 놓았던 무영검을 패검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멀리서 보니 모두 서른 명은 족히 넘는 것 같았다.
천호원을 비롯해 다섯 명은 말을 타고 있고 나머지는 뒤에 도열해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슨 흉험한 일을 벌일 것처럼 기세가 등등했다.
천호원이 청운의 얼굴을 보자마자 길길이 날뛰었다.
천호원이 자기 바로 옆에 말을 탄 흑의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 흑의인은 삼십 대 중후반 정도의 인물로 사각진 얼굴에 눈빛이 매처럼 사나웠다.
“수석 시위님, 바로 저놈입니다. 저놈이 날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당장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저놈이…….”
수석 시위라고 불린 자가 왼손을 들어 천호원을 제지하고는 말했다.
“네놈은 누구냐. 누군데 우리 천금보를 이토록 업신여기느냐. 당장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자르고 빌면 정상참작을 해서 목숨만은 살려 주도록 하겠다.”
청운이 입가에 한 가닥 조소를 베어 물고는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저 작자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같구나. 스스로 단전을 파괴하고 무릎을 꿇으면 목숨은 살려주는 것은 물론 천금보도 무사할 것이다.”
말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수석 시위란 자가 오른팔을 하늘로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자 뒤에 도열하고 있던 황의인들이 검을 빼 들고 우르르 달려 나와 청운을 에워쌌다.
수석시위가 치켜들었던 손을 내리자 그들이 한꺼번에 청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청운은 무영검도 꺼내지 않은 채 그들을 상대했다.
그들이 검을 찔러오거나 휘두르는 것을 빤히 보면서 마치 그들의 검로를 한 줄기 바람처럼 누비고 헤집으며 손발을 내질렀다.
청운이 손과 발을 한 차례씩 내밀 때마다 어김없이 한 명의 장한이 나뒹굴었다.
채 일다경도 안 돼 삼십여 명이나 되는 장한들이 모조리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싸움판 뒤에서 청운의 귀신같은 솜씨를 보고 있던 수석 시위라는 자와 다른 자들의 표정이 돌연 돌처럼 굳어졌다.
수석 시위라는 자는 급기야 말투까지 부드럽게 변했다.
“귀하는 도대체 누구시오. 신분을 밝히시오.”
청운이 감정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과연 당신이 내 이름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내가 이름을 밝히는 순간 이곳에 있는 당신들 중 누구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지금 당장 천금보로 달려가 보주가 와서 사과하면 오늘의 무례를 용서할지 말지를 고려해 보겠다.”
“…….”
“이것이 내가 당신들에게 베푸는 마지막 배려다. 네 말을 무시하고 도발을 한다면 그 뒤에 벌어지는 모든 일은 전전으로 천금보가 책임져야 할 것이다. 내 말을 허투루 듣지 말기 바란다.”
청운의 무시하는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던 수석 시위가 말에서 뛰어내리며 말했다.
“네놈이 재주가 조금 있다고 눈에 뵈는 게 없구나. 오늘 내가 네놈의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주마.”
수석 시위란 자는 말에서 뛰어내리자마자 검을 뽑아 들고는 청운을 짓쳐왔다.
여전히 청운은 검도 뽑지 않은 채 묘묘보허 보법으로 그자의 검기를 이리저리 흘려보내며 마치 놀이를 하듯 상대했다.
자신이 상대에게 놀림을 당한다는 걸 눈치 챈 수석 시위가 자신이 전혀 청운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분기 가득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이런 찢어 죽일 놈을 봤나. 요리조리 피하지만 말고 정정당당하게 승부해라. 좋다. 그럼 이것도 그렇게 피할 수 있는지 보자.”
수석 시위의 검초가 갑자기 살벌해지기 시작했다.
공력을 최대한 끌어올린 채 자신의 최대절기를 펼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청운은 여전히 검을 뽑지 않은 채 그를 상대했다.
십여 초가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수석 시위가 청운의 가슴을 노리고 최단 거리로 번개처럼 검을 찔러오는 순간 청운은 몸을 왼쪽으로 살짝 회전하며 그자의 검기를 오른쪽으로 흘려보냈다.
그 순간 그자의 텅 빈 오른쪽 옆구리가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청운은 회전하던 힘을 이용해 오른발로 그자의 옆구리를 냅다 걷어 차버렸다.
퍼―억! 하는 둔탁한 소리와 아―악! 하는 단말마의 비명이 동시에 장내에 울려 퍼졌다.
청운의 발길질에 걷어 채인 수석 시위는 오장 이상이나 뒤로 날아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비칠비칠 억지로 일어나더니 제 발밑에 두어 사발이나 되는 선지피를 토해 냈다.
그가 다시 자신의 검을 고쳐 잡고 청운을 향해 막 다가가려고 했을 때 죽립을 턱 밑까지 눌러쓴 채 말없이 장내를 주시하던 두 사내가 죽립을 벗어 자신의 말잔등에 올려놓고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