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지금 공자의 체내에 있는 힘은 어마어마한 것이라네.
청운의 말이 끝나자 그들이 본채를 향해 달려갔다.
이 다경 정도 지났을 때 본채 뒤로 달려갔었던 사내들이 삼십여 명의 여인들을 데리고 청운의 앞으로 왔다.
오자마자 그들은 다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다시 일 다경 정도가 지나자 십여 명의 사내들이 본채에서 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커다란 궤짝과 자루가 들려 있었다.
그들도 물건들을 내려놓자마자 다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여인들을 향해 대전 한쪽으로 가 있으라고 말한 후에 청운은 꿇어앉아 있는 오십여 명의 사내들을 향해 냉기가 풀풀 풍기는 목소리로 일갈했다.
“지금까지 너희들이 저지른 악행을 생각하면 당장 쳐 죽여야 마땅하나 너희들 인생이 불쌍해서 선처를 베풀겠다. 지금 즉시 스스로 오른쪽 엄지와 발가락 하나씩을 잘라라. 그것조차 하기 싫은 놈은 앞으로 나서라 내가 직접 목을 쳐주겠다. 지금 즉시 시행하라.”
청운의 서릿발 같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내에서는 고통을 참는 신음이 곳곳에서 새어 나왔다.
그 사이에 청운은 궤짝을 열어젖히고 자루를 쏟아부었다.
궤짝에는 주로 귀금속이 들어 있었고 자루에서는 은전과 금전이 쏟아졌다.
청운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쳐 죽일 놈들! 얼마나 악독하게 양민을 수탈했기에 이 정도로 모았단 말인가.”
청운은 손가락과 발가락을 자른 자들을 한 명씩 차례로 앞으로 나오게 했다.
청운은 그들 각각에게 은자 열 냥 정도를 던져주며 말했다.
“모두 이곳을 떠나 각자 살길을 찾아라. 다시는 남의 손가락질을 받는 악행을 저지르지 마라. 그러다 내 눈에 띄면 그때는 가차 없이 목을 자를 것이다.”
사내들이 모두 떠나자 청운은 여인들에게로 갔다.
청운이 다가가자 여인들이 벌벌 떨며 한쪽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그녀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의 변화에 위안과 안도 대신 오히려 불안과 두려움을 잔뜩 느끼는 것 같았다.
청운은 여인들의 그런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얼마나 많은 고초와 고통을 겪었으면 저럴까 싶었다.
청운이 여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구하러 온 사람입니다. 겁내지 마십시오. 자 한 분씩 이쪽으로 오세요. 이것이 그동안 여러분이 당한 고초에 비하면 너무나 약소하지만 드릴 게 이것밖에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저와 함께 이곳을 나가 모두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십시오. 지금은 그자들이 아직 이곳을 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가시다가 또 무슨 횡액을 당할지 모르니 내일 아침 나와 함께 이곳을 떠납시다.”
청운은 여인들 모두에게 그곳에 있던 은자를 몽땅 나누어 주었다.
대충 어림잡아 일인당 백 냥 정도는 충분히 될 것 같았다.
보석과 귀중품들은 왕씨 마을의 촌장에게 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의술에 매진할 기반을 만들어 줄 참이었다.
청운은 여인들에게 본채에서 쉬도록 하고 자신은 맞은편 황토 건물로 들어갔다.
청운은 침대에 걸터앉아 오늘 자신이 이성을 잃어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했다.
그들 모두가 죽어 마땅한 자들이지만 음산삼귀를 제외하면 모두 하수인 일뿐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운은 언제쯤 되어야 이런 일이 끝이 날까 하는 생각에 삶에 대한 깊은 회의에 사로잡혔다.
이런 기분으로는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청운은 침대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토납으로 밤을 지샜다.
* * *
대주천을 두 번 끝내자 태항산 산정에서 붉디붉은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장원이 있는 계곡에도 서서히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청운은 자신이 타고 온 말에다 궤짝 두 개를 실어 놓고는 여인들이 쉬고 있는 본채로 향했다.
청운이 들어서자 여인들이 꾸벅꾸벅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상황을 보니 연인들도 자신처럼 밤새 한숨도 못 잔 것 같았다.
청운이 여인들에게 말했다.
“자, 이제 출발합시다. 가시는 길에 자신이 사는 마을이 나오면 그대로 가시면 됩니다. 왕씨 마을로 가시는 분은 저와 함께 끝까지 동행하시면 됩니다.”
청운이 몸을 돌려 막 나가려고 했을 때 여인 하나가 두어 발짝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의인님, 갈 길이 먼데 식사나 하고 가시지요. 저희가 아침상을 봐놨습니다.”
청운은 깜짝 놀랐다.
그런 상황에서 밥상을 차릴 생각을 다 하다니, 청운은 이 장원에서 밥 먹을 생각이 전혀 없었으나 그들의 정성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그럽시다.”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보다는 훨씬 진수성찬이었다.
청운이 자리에 앉으며 “같이 듭시다.” 하고 말하자 여인들은 자신들은 이미 다 먹었다고 대답했다.
청운 그렇지 않다는 걸 뻔히 알고 있었기에 밥을 먹는 내내 울컥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기에 왕씨 마을에는 거의 술시戌時가 다 되어서야 겨우 도착했다.
왕씨 마을에 사는 여인은 모두 네 명이었다.
그녀들과 함께 청운이 마을로 들어서자 왕씨 마을은 때아닌 밤에 난리가 났다.
온 마을에 불이 밝혀지고 서로를 부둥켜안고 흐느끼는 소리와 달래는 소리가 한동안 끊이질 않았다.
청운은 촌장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말하고는 말의 옆구리에 매어 놓았던 궤짝 두 개를 번쩍 들어 촌장 앞에 내려놓았다.
촌장이 궤짝의 뚜껑을 열어보고는 놀라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청운을 쳐다봤다.
청운이 촌장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그들의 장원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촌장님, 왕씨 일문의 의술은 단순히 왕씨 혈족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 의술은 이 땅의 사람들 모두에게 베풀어 주라고 하늘이 왕씨 일문에게 준 것입니다. 왕씨 일문의 칠 대조 어르신이 당한 횡액은 참으로 슬픈 사건이지만 그 탁월한 의술의 맥脈은 세상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어져야 합니다.”
“…….”
“제 섣부른 판단일지는 모르지만 맥脈의 의학을 창안하신 왕씨 가문의 왕숙화 시조始祖께서도 아마 저와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이 돈은 왕씨 일문의 의술을 되살리는 데 보태 쓰십시오. 그리고 제가 황실과 기회가 닿는다면 왕씨 일문의 사면을 강력히 건의해 보겠습니다. 촌장님,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청운이 길을 나서기 위해 막 몸을 돌리려고 했을 때 촌장이 청운의 소맷자락을 당기면서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협, 잠깐만 기다리시게. 잠시 나를 따라오게. 내 할 말이 있네.”
청운이 그를 따라 동혈로 들어가자 촌장이 침대를 한쪽으로 밀었다.
침대 아래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교묘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있는 그대로의 황토벽을 깍아 만든 침대 같았는데 바닥과 침대가 따로 분리되어 있을 줄은 청운은 상상도 못했다.
일 장 정도 계단을 걸어 아래로 내려가자 나무로 만든 문이 나타났다.
촌장이 문을 두드리자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약초 냄새가 진동했다.
의방이었다.
촌장이 청운에게 침대에 조금 앉아 있으라고 하고는 왼편 구석에 있는 문을 열고는 들어갔다.
창고 같았다.
잠시 후 촌장이 손에 작은 함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함의 뚜껑을 열었다.
함 속에는 수백 개의 은침이 가지런하게 들어 있었다.
촌장은 청운에게 상체의 옷을 벗고 침대에 누우라고 말했다.
청운이 옷을 벗고 침대에 눕자 촌장이 잠시 진맥하겠다며 청운의 이곳저곳에 침을 놓고는 양 손목을 잡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일각 정도 후 촌장이 청운에게 말했다.
“공자의 현 상태는 굳이 병이라고는 말할 수 없네. 그렇다고 정상이라고도 말할 수도 없네. 종류가 전혀 다른 두 개의 잠력을 동시에 너무 심하게 끌어내다가 그 힘들이 충돌해 균형을 잃고 뒤엉킨 것이네. 문제는 그 두 힘의 균형이 전혀 맞지 않아서 발생했네.”
“…….”
“무슨 말인가 하면, 두 힘이 비록 불균형해도 평상시에는 전혀 상관이 없네. 하지만 몸속에 깃든 잠력을 바닥까지 모조리 끌어올리면 문제는 심각해지네. 자칫하면 그 불균형 때문에 반신불수가 되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어떤 맥은 열리면 어떤 맥은 저절로 닫혀 폐쇄되네.”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늘의 안배라네. 하늘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생명을 보호하기 위함이네. 인간은 모든 맥이 열린 상태를 오래 견딜 수 없네. 모든 맥이 다 열리면 그 예민해진 감각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엄청난 정보들이 끊임없이 들어오게 되어 있네. 그러면 사람은 그걸 얼마 못 견디고 미쳐버리고 만다네. 그래서 태어나는 순간 일부의 맥이 저절로 닫히는 것이라네.”
“그렇다면 방도가 없는 것입니까?”
“하지만, 일부 도道를 닦는 사람들이 그 폐쇄된 맥을 강제로 열려고 하다가 많이 죽는다네. 이곳 중원보다는 천축에 그런 수행자들이 많다네. 그렇게 죽은 사람들은 바로 그 순간 살아 있는 상태로 전신의 생명 활동이 일순간 멈춰버린다네. 그래서 한동안은 시체가 썩지도 않고 생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다네.”
촌장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사람들은 그런 이유를 모르고 그가 도를 닦다가 우화등선羽化登仙 했다고 말을 하지. 공자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폐쇄된 맥을 어중간하게 연 상태에서 원래의 힘과 그 힘을 동시에 바닥까지 사용하다 균형을 잃은 것이라네. 아마 가공할 정도의 강적과 대결을 벌였겠지.”
“맞습니다.”
“지금 공자의 체내에 있는 힘은 어마어마한 것이라네. 나도 이런 정도의 힘은 생전 처음으로 접했네. 그런 공자가 바닥에 있는 잠력까지 모조리 끌어내야 할 적이었다면 그자도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이 가고도 남네. 침과 뜸으로 칠 일정도 치료하면 뒤틀린 균형을 다시 바로잡을 수는 있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네.”
“…….”
“근본적인 해결은 그 불완전한 힘을 버리든지 아니면 폐쇄된 맥을 완전히 열어 두 힘을 합치는 것뿐이네. 둘 다 쉽지 않은 일이네. 폐쇄된 맥이 이미 반 이상 열렸으니 다시 닫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나머지 맥을 여는 것도 천고의 기연이 있어야 가능한 일일 걸세. 물론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낫겠지. 무위가 지금보다 몇 단계나 더 격상할 테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게. 내 치료를 받고 나면 예전 이상으로 몸이 회복될 것이네. 그것만으로도 이 중원에서 공자를 대적할 자는 거의 없을 것이라 장담하네. 다시 그 정도의 강적만 만나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네. 치료는 내일부터 치료를 시작하세. 내가 준비해야 할 것도 좀 있고.”
긴 설명을 다 듣고 난 청운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촌장에게 물렀다.
“왕숙하 시조님의 맥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 아니었군요?”
촌장이 청운을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 의술이 우리 왕씨 혈족의 상징과 같은 것인데 어찌 단절할 수 있었겠나. 다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 혈족이 더 이상 의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줄 때까지 철저히 숨긴 것이지. 그래야 우리 혈족이 조금이라도 살기에 편했으니까. 나는 공자가 우리 둘 사이에 있었던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