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153화 (153/184)

153화 나를 잊어야 그 나는 다른 세계로 들어갈 수 있소.

아이가 자신의 전부인 엄마의 존재조차 잊은 채 자신만의 즐거움에 흠뻑 빠져 노는 모습은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전혀 질리지 않았다.

천하에 다시없는 절경도 며칠만 계속 보면 지겨워지기 마련인데 아이의 재롱은 그렇지 않았다.

아이가 무심코 하는 하나하나의 행동과 엉뚱한 표정이 인세에 다시없는 절경 중 절경이었다.

그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면 곧바로 사라져 다시는 볼 수 없는 초순간성의 절경이었다.

왜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손자, 손녀’하면서 애지중지하는지 알 것도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자신의 삶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일에 마침내 성공한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청운은 마치 그녀가 자신의 다른 삶을 낳고 길러서 자신에게 보여주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자신이 진짜 자신이 된 기분이었다.

그동안 자신의 것이면서도 자신을 벗어나 겉돌고 있었던 자신의 것들이 다시 제 주인인 자신을 찾아 되돌아온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원한과 복수 말고는 꿈이라고는 없었던 자신의 삶이 지금, 이 순간 진짜 꿈다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우연한 계기로 자신이 강호에 뛰어든 순간부터 자신이 꿈꾸었던 꿈과 현실이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뒤틀려버렸다고 생각했다.

물론 꿈과 현실은 다른 강물이어서 같이 흘러갈 수는 없는 것이었지만.

그 둘이 나중에 바다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둘 다 마실 수 없는 바닷물일 뿐이라는 생각에 청운은 자신의 꿈과 현실 모두를 미련 없이 포기했었다.

아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자신의 바로 눈앞에서 아장거리고 바장거리는 아이를 보자 그때와는 또 다른 꿈이 가슴 속에서 쑥쑥 움트는 것 같았다.

아니, 자신이 한 번도 물을 주고 키우지도 않았던 꿈이 자신의 앞날을 만개시키는 것 같았다.

청운은 그동안 너무 쫓기듯 바쁘게 살아왔기에 자신의 삶에 대해서 성찰할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늘 원래의 자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으나 생각은 생각만으로 가득했을 뿐이었다.

지금 청운은 그녀와 아이를 보면서 저 흉악한 중원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잊고 싶었다.

바라보면 볼수록 청운은 그녀와 저 아이가 사실은 이제까지 자신이 망각했던 자신의 진짜 삶일지도 모른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녀와 아이는 바로 자신이 잃어버린 원형原形에 다름없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자신이 잠시 길을 멈춘 바로 이 자리가 바로 자신이 진정으로 있어야 할 길이 아닌가 하고 청운은 생각했다.

아무것도 덧보태고 뺄 것도 없는.

* * *

그렇게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그녀가 청운을 따로 불렀다.

잠시 시간을 내어달라고 했다.

그녀는 눈부신 하얀 색의 무복을 입고 있었다.

허리에는 빙혼검까지 차고 있었다.

매일 낮과 밤을 함께 보내는 사이였음에도 그렇게 전혀 다른 복장을 하고 있으니 그녀에게서 또 다른 매력이 풀풀 풍겨 났다.

넋을 놓은 채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는 청운을 향해 배시시 웃던 사라유리가 청운에게 어딘가 잠시 같이 가자고 했다.

사라유리가 청운을 데리고 간 곳은 유라궁 뒤편에 있는 거대한 빙굴이었다.

사방이 온통 얼음으로 되어 있어서 청운은 마치 커다란 거울로 만든 방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넓이가 무려 방원 오십여 장은 족히 될 것 같았다.

그녀가 유라궁의 연무장이라고 말했다.

그녀가 청운에게 자신의 무공이 대해서 좀 봐달라고 했다.

청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운이 가져다준 백무기의 내단으로 만든 환약을 복용하고 수련을 해서 엄청난 진전이 있었다고 그녀가 말했다.

유라수와 빙혼검결이 거의 십성의 성취를 이루었다고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표정에 자신의 무공에 대한 어떤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녀가 먼저 유라수를 펼쳤다.

그녀의 손이 투명한 얼음 같았다.

그녀는 마치 한 마리 얼음새처럼 신기막측한 보법을 밟으며 유라수를 전개했다.

희안하게도 그녀의 장력이 닿은 빙벽은 전혀 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장력에 맞은 자리의 빙벽은 순식간에 뻥 뚫렸다가 되메어 졌다.

그녀의 투명한 장력이 닿은 곳마다 빙벽에서 그녀의 장심을 닮은 얼음덩이가 고드름이 자라듯 불쑥 불쑥 솟아났다.

저 장력에 스치면 어지간한 고수는 순식간에 얼음덩어리가 될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너무나 신비스러운 그녀의 무공에 청운은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청운의 박수 소리에 잠시 동작을 멈춘 그녀가 이번에는 빙혼검을 빼 들고 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빙혼검결을 바탕으로 한 빙혼칠검이었다.

빙혼칠검의 초식은 모두 합해 칠 식이지만 하나의 초식마다 일곱 개의 다른 검초가 포함되어 있어서 사실은 사십구 초의 검식이었다.

전개하는 동작으로 봐서 그녀는 이미 초식에 담긴 변화까지 모두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빙혼검의 검 끝에서 우윳빛의 새하얀 한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검기가 스친 빙벽은 갈라지는 순간 그 틈이 곧바로 더 꽝꽝 얼어 버렸다.

빙혼검에 베인 상처에서는 전혀 피가 배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를 알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빙혼칠검을 펼치는 그녀의 동작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자신이 전개한 검로를 따라가는 보법이 너무나 아름다워 아름답기까지 했다.

어림잡아도 그녀의 경지는 절정을 넘어 화경 초입에 이른 것 같았다.

빙혼칠검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청운은 다시 박수를 쳤다.

청운의 박수 소리가 끝남과 거의 동시에 그녀의 동작도 끝이 났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그녀가 처운을 향해 걸어왔다.

청운의 앞에 멈추어선 그녀가 물었다.

“가가, 지금의 내 성취는 십 성 정도에 이르렀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진척이 없어요. 낮밤없이 수련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더 나아지지 않아요. 혼자서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어머니한테 물으니 깨달음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어떤 깨달음이 더 필요한가요? 가가는 저보다 훨씬 고수이시니 그 깨달음을 좀 가르쳐 주세요.”

청운이 입가에 한 가닥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리매의 빙혼장과 빙혼칠검은 어느 한 곳도 부족한 데가 없소. 하지만 더 높은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이 검을 잡고 있다는 생각을 잊어야 하오. 다시 말해 리매의 초식을 넘어서고자 하는 바로 그 생각이 초식을 넘어서는 것을 방해하고 있소.”

“…….”

“자신이 초식을 펼치고 있다는 생각에 얽매어서는 자신이 펼치는 초식을 넘어서기는 불가능하지요. 꽉 붙들고 잇는 걸 놓아 주어야 검이 다른 길을 가지요. 자신이 초식을 펼치고 있다는 생각조차 있을 때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초식이 저절로 발현될 것이오. 그것은 바다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바닷물이 될 수는 있지만, 바닷물이 빗방울이 될 수 없는 이치와 같소.”

“그렇군요.”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걸 잊을 때 비로소 완전해지는 이치와 같소. 나를 잊어야 그 나는 다른 세계로 들어갈 수 있소. 그것은 바다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자신을 잊을 때 완전한 바닷물이 될 수 있는 이치와 같소. 자신의 검을 믿고 자신을 잊으시오. 그러면 모든 걸림돌이 저절로 치워질 것이오.”

누가 고통스러운 순간은 실제의 시간보다 훨씬 더디게 가고 즐거운 순간은 실제의 순간보다 너무 빨리 흐른다고 말했던가?

청운은 그녀와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속까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다시 서로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와 그리고 딸과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즐거웠기에 아직 헤어질 시간이 도래하지 않았는데도 헤어질 걸 생각할 때마다 청운은 미리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에도 어느새 그늘이 섞여들었다.

아니, 곧 다가올 이별의 아픔이 스며든 것 같았다.

그 느낌은 말이 아니라 눈빛과 표정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지그시 눈을 감은 그녀의 파닥이는 속눈썹에서 청운은 그녀의 지극한 안타까움을 보았다.

날짜가 다가올수록 그녀가 아쉬움이라도 표할까 싶어 청운은 전전긍긍했다.

청운은 자신이 삼 년마다 한 번씩 왔다가 가는 것이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그녀를 무척이나 조심조심 대했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자신이 그녀보다 더 헤어지는 걸 두려워하는 이상한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그녀는 그가 못 떠나게 잡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건 누대로 지켜온 유라궁의 지엄한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다.

그가 설산을 떠나는 날 그녀가 그에게 해줄 말이라고는 “부디 몸조심하세요. 그리고 삼 년 뒤에 꼭 다시 오세요.”라는 말이 전부였다.

그리고 연연이를 번쩍 들어 올려 다시 한번 청운의 품에 안겨주었다.

청운은 한바탕 아름다운 꿈을 꾸고 난 기분이었다.

그녀와 그리고 연연이와 함께 했던 백일이 마치 꿈속의 꿈같았다.

하지만 꼭 처리해야 할 일이 있고 반드시 가야 할 길이 있는 한, 꿈 역시 반드시 깨어야만 하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그런 꿈이 삶의 최종적이고 완벽한 해답은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청운은 생각했다.

하지만 늘 꾸고 싶을 때마다 꿀 수 있는 꿈은 진정한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언제든지 꿀 수 있는 꿈은 꿈의 본질인 신비감마저도 사라져 버리기에.

그녀와 아이를 실컷 보고 나면 앞으로 자신에게 여한이 없을 것이라 청운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녀와 연연이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혀 길을 갈 수가 없었다.

청운은 가다 말고 수시로 걸음을 멈추고 그녀와 연연이가 있는 먼 북쪽을 바라보았다.

* * *

계절이 없는 계절 속에서 지나다 보니 청운은 계절이 가는 줄도 몰랐다.

내딛는 발걸음마다 난분분 난분분 꽃잎처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雪은 하늘에 있을 때, 별만을 보고 자랐기에 땅에 쌓여서도 반짝이고, 밟힐수록 더 반짝이고, 마지막으로 녹아 사라질 때도 반짝인다.

내리는 눈송이가 몸을 뒤집을 때마다 은은한 햇빛에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서 뽀드득 소리가 발목을 타고 무릎으로 올라왔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 생각을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

멀리 보이는 산정들에 하얀 모피를 두른 것처럼 눈이 쌓여 있었다.

설산 유라궁을 떠나온 청운은 며칠째 눈길을 걷고 있다.

자신이 걸어가는 눈길이 긴 꿈의 끝자락처럼 아슴아슴하게 밟힌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천산으로 가고 있었다.

마방에 맡겨둔 말을 찾아 난주로 갈 생각이었다.

이참에 사해표국을 한번 모질게 손봐줄 생각이었다.

그들의 만행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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