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나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네.
하얀 백색의 보료 같은 대지에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멀리 천산의 성도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청운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허기가 졌다.
설산을 떠나온 후 몇 날 며칠 건량만으로 끼니를 때우다 보니 입도 까슬까슬하고 몸도 축나는 것 같았다.
청운은 주변에서 가장 큰 객점인 <천중루>로 곧장 들어갔다.
계산대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점소이 말고는 객점에 아무도 없었다.
청운이 문을 밀고 들어서자 졸다가 화들짝 놀란 점소이가 벌떡 일어서며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겨울이 채 끝나지 않아서 상단과 여행객들도 아직은 본격적으로 다니지 않은 모양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오리구이 한 마리와 황주 한 병을 시킨 후 가장 구석 자리에 가서 앉았다.
청운이 피풍의와 죽립을 벗었을 때 곧바로 점소이가 따뜻한 차를 내왔다.
청운은 점소이에게 오늘 이 객점에서 자고 갈 터이니 목욕물을 좀 준비해 달라고 말하며 은전 하나를 건넸다.
점소이가 환하게 웃으며 “잘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청운이 음식과 술을 거의 다 먹어갈 때쯤 허리에 패검을 하고 피풍의를 걸친 네 명의 장한이 객점의 문을 밀고 들어왔다.
그들은 곧장 삶은 고기와 소홍주 두 병을 시키고는 청운의 반대편 구석 자리에 앉았다.
모두 삼십 대 중 초반으로 보였다.
모두 똑같은 황의를 입고 있었다.
청운은 그들이 이 근처의 군소방파에 속한 자들일 것이라고 어림짐작했다.
그중 하나가 곁눈질로 청운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떠들기 시작했다.
귀밑까지 시커먼 구레나룻을 기른 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
“자네, 그 소문 들었나. 나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지. 무림맹의 두 장로가 피살되다니, 청성파의 대라무영검 일연자와 단목세가의 팔황비도 단목장령이 한날한시에 죽임을 당하다니.”
“…….”
“그 둘은 그 무위가 오래전에 화경에 들었다는 초고수들 아닌가? 당금 강호에 누가 있어 그 둘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모르긴 몰라도 그건 마련의 제혼마검이라도 불가능할 것이네.”
청운은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싶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마시던 술이 기도로 넘어갈 뻔했다.
청운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 장한들을 쳐다봤다.
이번에는 구레나룻을 기른 자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장발의 사내가 왼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한 차례 뒤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게나 말일세.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 생각만 해도 심장이 오그라드네. 무림맹의 장로를 살해하다니. 그것도 한꺼번에 둘씩이나. 이 일로 무림맹이 충격에 휩싸였다는군. 노발대발한 맹주 무극검 사마휘가 반드시 흉수를 밝히겠다며 감찰당과 천무대까지 투입했다고 하네.”
“…….”
“감찰당은 몰라도 천무대는 정사대전과 같은 엄청난 일이 아니고서는 움직이지 않는데 말일세. 천무대 대주 종횡무적도 가천일이 총책임자라는군. 곧 전 중원에 무림첩도 배포할 예정이라는군.”
그자의 옆에 있던 다른 황의인이 말했다.
“그러게나 말일세. 아무래도 강호에 큰 소용돌이가 일 것 같은 조짐이야. 이럴 때일수록 우리 같은 하수들은 극도로 입조심, 말조심해야 하네. 자칫 잘못하면 원치도 않은 격류에 휘말려 하나뿐인 목숨마저 잃기가 십상이네.”
청운은 강호의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틀림없이 天의 짓이다.
그들이 아니고는 그럴 힘도 능력도 없다.
하지만 현 강호에 누가 있어 그들 둘을 동시에 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청운도 그 점이 몹시 궁금했다.
장한들은 그 문제로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청운은 그들에게 더 이상의 중요한 말을 들을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는 마시던 술을 마저 마시자마자 쉬기 위해 이 층 방으로 올라갔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목욕물과 청운을 동시에 비추었다.
청운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수면의 달이 구겨지고 이지러졌다가는 청운이 움직임을 멈추면 다시 제 얼굴을 찾아 환하게 웃었다.
움직임을 멈춘 달 위에 이번에는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는다.
그 달빛의 적막 속에서 청운도 점점 더 깊은 생각 속으로 젖어 들었다.
청운은 생각했다.
天이 이렇게 서두르는 걸 보니 뭔가 엄청난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것을 알아내야 한다.
알아내 분쇄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청운은 잠이 들었다.
* * *
청운은 아침을 먹자마자 마방에 들러 맡겨 놓았던 말부터 찾았다.
백일 이상을 먹고 논 말은 그새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윤기가 좔좔 흘렀다.
청운이 목을 쓰다듬자 기분이 좋은지 앞발을 치켜들며 크게 울었다.
청운은 말에 올라타자마자 곧장 사해표국이 있는 난주로 말을 몰았다.
가는 도중 객점 곳곳에 하오문도만 알아볼 수 있는 표기를 남겼다.
난주로 가기 위해 청해성을 지나 거의 감숙성 근처에 이르렀을 때 하오문 감숙 분타의 문도 하명이 청운에게 은밀한 신호를 보내왔다.
청운이 묵고 있는 객점에서 십 리 정도 떨어진 곡지산 초입의 관제묘였다.
일각도 채 안 되어 청운이 그곳에 도착했다.
청운이 도착함과 동시에 어둑한 관제묘 뒤에서 두 명의 인형이 나타나더니 청운에게 포권을 취했다.
청운도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응대를 하자 좌측에 있던 몸집이 조금 더 큰 자가 앞으로 한 발 나서며 말했다.
“하오문 감숙 분타주 기소웅이 부문주님을 뵙습니다. 천산 근처에는 저희 분타가 없어 어제서야 부문주님의 표식을 발견했습니다. 무슨 하명이라도 계시는지요.”
그는 삼십 대 중반 정도로 사각형의 각진 얼굴을 가진 사내였다.
몸가짐이나 태도로 보아 의지가 굳세어 보였다.
청운이 즉시 물었다.
“기 분타주님. 혹시 감숙 분타에 최근의 무림 동향에 관해 조사한 자료가 있는지요. 내가 몇 달 동안 중원에 있지 않아서 최근 강호 상황에 대해 궁금한 게 많습니다.”
기 분타주가 곧장 답했다.
“부문주님도 아시다시피 감숙 분타의 문도라야 채 스무 명이 되질 않습니다. 자료가 있긴 있습니다만 부문주님이 원하는 자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청운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일단 분타로 가서 이야기합시다.”
감숙 분타는 따로 독립된 건물이 없었다.
열악하게도 기루의 별채가 하오문의 분타였다.
청운이 들어서자 십여 명의 문도들이 깍듯하게 예를 갖추며 청운을 맞이했다.
청운도 일일이 문도들의 손을 잡아주며 격려했다.
청운은 내실에 들어서자마자 최근 석 달 동안 수집한 정보를 모조리 보고 싶다고 기 분타주에게 말했다.
청운과 기 분타주가 차를 마시고 있을 때 부분타주 가석현이 자료를 양팔로 가득 안고 들어왔다.
청운은 탁자에 앉아서 자료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중원 곳곳에서 재천신교가 기승을 부리며 발호하고 있었고,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그런 흐름은 자신들 문파의 어른이 어이없이 살해당한 청성파와 단목세가가 주도하고 있었다.
청성파와 단목세가가 그런 태도를 취하는 건 당연하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모르긴 몰라도 천성파와 단목세가는 무림맹에 강한 압력을 넣고 있을 것이다.
맹주 무극검 사마휘도 입장이 곤란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맹주 입장에서는 이참에 장로원의 힘을 빼고 자신이 맹을 장악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구대문파와 오대세가 어느 곳도 맹주가 맹을 완전히 장악하는 걸 가만히 좌시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맹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무림맹에서도 틀림없이 한바탕 권력투쟁이 벌어질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만만치 않을 싸움 같았다.
天이라는 외부의 거대한 적에 대응하는 것은 강호 전체의 일이어서 서로가 눈치를 보며 미적거리는 일인 반면, 무림맹에서 자기 문파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은 발등에 떨어진 불과 같은 시급한 일이다.
구대문파와 오대세가가 어떤 일에 더 중점을 둘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청운은 소태를 씹은 듯 입맛이 씁쓸했다.
청운은 자신이라도 나서서 강호의 힘을 하나로 모으고 싶었으나 그 일 또한 요원해 보이지 않았다.
자칫하면 자신의 섣부른 행동이 오히려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그들 문파와 세가들은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강호에서 나날이 높아지는 청운 자신의 위상에 대해서도 경원시하고 있다는 걸 청운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일이 얽히고설켜 있어서 어느 하나도 쉽게 술술 풀릴 것 같지 않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한 차례 깊은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들어 어둠밖에 보이는 것이 없는 창밖을 잠시 바라보았다.
벼루에 갈아 놓은 먹 같은 어둠이 마치 답답한 자신의 마음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방 안의 유등이 꺼지기가 무섭게 암흑천지가 되어 버릴 세상이 자신의 앞날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지금 강호의 상황이 누가 우군이고 누가 적인지 전혀 구분할 수 없는 ‘개와 늑대의 시대’ 같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어차피 혼자 시작한 일이다. 어차피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고 시작한 일이 아니다. 내가 시작했으니 내가 끝내야 한다. 내가 시작한 일 때문에 내 의도와 상관없이 수많은 은원이 얽히고설키긴 했으나 그것과 무관하게 결국 내가 마무리 지어야만 한다.”
청운은 다시 고개를 돌려 읽고 있던 서류로 눈길을 돌렸다.
황궁의 움직임이 뭔가 이상했다.
멀리 변방을 방어하기 위해 나가 있던 군사들이 속속 황궁이 있는 개봉으로 회군하고 있다고 서류에 적혀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틀림없이 황궁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 같았다.
황궁의 사정도 급박한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이 서류를 다 훑어보고 고개를 들자마자 기 분타주가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 운을 뗐다.
“부문주님, 기루 삼 층에 조촐한 술상을 봐놨습니다. 문도들이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시지요.”
청운은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머금고는 말했다.
“분타주님. 진작 말씀을 하시지… 안 그래도 조금 출출하던 참이었습니다. 가십시다.”
술자리는 약 두 시진 정도 이어졌다.
기분 좋게 취한 청운은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너무 피곤해서 곧바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청운은 기 분타주에게 자신은 곧장 난주의 사해표국으로 갈 것이니 급한 일이 있으면 즉시 연락하라고 말하고는 감숙 분타를 떠났다.
* * *
달빛마저 사라진 밤.
먹을 곱게 갈아 흩뿌린 것 같은 짙은 어둠만이 전각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