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164화 (164/184)

164화 자신이 아닌 괴물도 살아야 한다.

목이 타는지 삼황자가 차를 몇 모금 마시고는 다시 하던 말을 이었다.

“쫓겨나는 것뿐 아니라 살해까지 당하고 있다네. 그것뿐이 아니네. 사악한 재천신교의 무리가 수시로 귀비의 처소로 몰래 드나들고 있다는 보고도 비선을 통해 여러 차례 받고 있다네. 그리고 해괴하게도 쥐도 새도 모르게 어린 궁녀들이 실종되어 자취를 감추고 있다네.”

“…….”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귀비와 결탁한 세력들이 있는 것 같은데… 나로서도 조사를 한다고 했으나 황제 폐하의 총애를 독차지 하고 있는 귀비의 방해로 도저히 결정적인 증거를 잡을 수가 없네. 무엇보다도 황군을 움직이는 위치에 있는 자들을 믿을 수가 없다네. 누가 누구의 끄나풀인지 도저히 구분할 수도 없고…….”

삼황자는 청운의 표정을 살피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말인데 황궁과 관련이 없는 제삼자의 시선으로 이 사건들을 공정하게 조사해 주게. 학식과 무공을 두루 갖추고 있는 적임자라 생각되어 이렇게 자네를 불렀네.”

청운이 몹시 고민스러웠다.

삼황자의 부탁을 들어주자니 자신에게 부탁하는 그의 말투와 태도로 봐서 지금 황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대미문의 사태를 완전히 해결하지 않고는 꼼짝없이 황실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친서까지 보내 자신을 부른 그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속한 하오문 뿐만 아니라 강호 전체에 악영향이 미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청운은 몹시 난감했다.

강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만 해도 벅찬데, 황궁의 일까지 맡아 달라니…….

그렇다고 황궁 안에 도사린 ‘天’의 무리를 그대로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그들이 ‘天’의 수괴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청운은 전적으로 삼황자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한동안 어정쩡한 태도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청운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당장은 좀 그렇습니다. 제가 강호에서 벌려놓은 일들이 워낙 많아서… 강호의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그때 다시 황궁에 입궁해서…….”

삼황자가 청운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건 곤란하네. 지금 황궁의 일이 워낙에 시급하네. 거꾸로 자네가 황궁의 일을 먼저 마무리하면 내가 적극적으로 자네의 강호 일을 돕는 것은 어떤가? 역모만 아니라면 자네가 원하는 어떤 조건도 수용하겠네.”

인간은 불확실한 것을 좀처럼 견디지 못한다.

모르는 것은 늘 불안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인간은 어설픈, 아니 심지어 잘못된 논리로라도 자신이 모르는 것을 명징하게 설명할 가설을 세우려고 한다.

그 가설이 나중에 만들어낼 수도 있는 오류와 악덕마저 도외시한 채.

그렇게 생성된 오류와 악덕은 모든 문명과 종교 그리고 학문을 포함한 모든 인간 삶의 저변에 피처럼 흐르고 있다.

심지어 그것들은 이미 환멸과 절망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 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지금 청운에게 도움을 강요하는 삼황자의 태도에도 그런 불안감과 관련된 모순과 오류가 잔뜩 배어 있는 것 같았다.

권력을 쟁취하려는 자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듯이, 이미 권력을 가진 기득권층도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 역시 편법과 탈법은 물론 불법까지 불사한다.

잡아먹고 잡아먹히면서 어느 순간 상상도 못할 괴물이 되는 것이 바로 권력의 속성이다.

그런 권력의 관계에 얽히고 엮이면 그 누구도 고절(홀로 깨끗하게 지키는 절개)할 수도 무구할 수도 없게 마련이다.

권력을 다투는 괴물들은 모두 평범한 이웃의 얼굴을 하고 있기에, 권력다툼에 빠진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이 아닌 괴물도 살아야 한다.

권력은 순식간에 사람을 사람 아닌 다른 존재로 만드는 괴물이다.

지금 황궁에는 세태의 변화에 재빠르게 영합해 권력에 빌붙고 물욕과 잇속에 목숨을 걸고 명성과 권세를 쫓는 자들 말고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인들은 그런 세태에 휘둘리는 게 싫어 이미 스스로 관직을 버렸거나 혹은 삭탈관직을 당해 황궁을 떠났다.

아니면 모함 때문에 죽어서 떠났다.

세태에 초연하고 호방한 의인과 충신들이 사라진 지금의 황궁에는 세속의 탐욕에 물든 부박한 자들만 가득 들어차 있다.

청운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황실의 위기 상황 때문에 자신이 대접받는 존재가 되기도 하고 홀대받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 몹시 불편했다.

무엇보다도 끝없는 복종과 충성을 강요하는 권력의 질서가 만드는 이런 숨 막히는 분위기가 체질에 전혀 맞지 않았다.

청운은 자신이 ‘이런 황궁을 도울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며 삼황자의 부탁을 공손하게 거절할 명분을 찾고 있었다.

삼황자의 얼굴에는 자신에게 완벽한 복종과 존경을 표하지 않는 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고심하는 것 같은 표정이 가득했다.

삼황자는 애써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 같았다.

청운은 지금 자신이 새로운 상황에 들어서고 있음을 직감했다.

바로 그 순간 삼황자가 불쾌감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청운을 건너다보았다.

그 불쾌감에는 굳이 하고 싶지 않은 말을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다는 표정을 가득 담겨 있었다.

그 표정은 또다시 청운이 그의 부탁을 거절하면 둘 사이가 쉽게 돌이킬 수 없는 파탄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신호 같았다.

청운은 지금 자신이 되돌아올 수 없는 위태로운 출렁다리 위에 서 있다는 강한 압박감을 받았다.

그의 말속에 가시처럼 박힌 ‘역모가 아니라면’과 ‘조건’이라는 말에 청운은 한편으로 위험을, 다른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 점에서 청운과 삼황자는 기묘하게 일치했다.

조건은 삼황자가 먼저 제시했다.

일이 끝나면 안휘성 성주라는 자리와 영지를 주는 것이었다.

삼황자는 자신의 말을 다 끝낸 후 동의를 바라듯이 청운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자족적인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다른 절대 권력자와 마찬가지로 상대를 발견하고, 포착하고, 탐색하고, 풀어주는 수완이 능수능란했다.

심지어 그가 짓는 묘한 미소는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기도 했다.

청운은 자신이 초대된 손님이면서 동시에 누구를 받들어야 하는 종복이 된 느낌이었다.

청운은 이 자리에 있는 자신이 상당히 중요하면서도 하찮은 사람이 된 것 같은 이중적인 느낌을 받았다.

한다, 안 한다, 한다, 안 한다, 안 할 수는 없다,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기득권을 강화하는 방식으로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청운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하기는 하되 권력 없고 힘없는 약자들을 최대한 지키는 조건을 전제로 삼황자의 부탁을 받아들이기로 청운은 결심했다.

하지만 청운은 다른 조건을 생각하며 운을 뗐다.

“삼황자님께서 참으로 걱정이 많으시겠습니다. 삼황자님의 의견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황자님과는 다른 조건이 있습니다. 우선 최대한 피를 적게 흘리는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이 마무리되면 핵심 가담자가 아니면 최대한 관용을 베풀어 주십시오.”

“…….”

“그리고 억울하게 관직을 박탈당한 급사중 이자천 같은 충신은 반드시 다시 복직시켜 주십시오. 그리고 이백여 년 전에 왕숙화 가문에 내린 징계를 철회해서 그들이 다시 백성들을 위해 의술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사면령을 내려주십시오. 마지막으로 부디 성군이 되어주십시오.”

삼황자는 청운이 자신이 내건 조건 대신 다른 조건을 제시하겠다고 했을 때 살짝 긴장을 하는 듯하더니 청운의 조건이 의외로 너무나 간단하고 쉬운 것이었기에 환하게 표정이 밝아졌다.

삼황자가 그제야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의 반응은 더한 다른 요구도 들어줄 수 있다는 표정이었다.

삼황자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그게 조건의 전부인가. 그게 뭐 그리 어렵겠나. 자네의 부탁은 나라 전체를 위해서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네. 그런데 자네가 왕숙화 가문과도 인연이 있었나.”

“작은 인연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 가문에 그런 족쇄가 채워져 있었는지도 몰랐네. 그런데 자네 판단에는 귀비의 세력들이 진정으로 노리는 것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걸 도통 모르겠네.”

청운은 삼황자에게 삼계와 마족에 관해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모두 했다.

“‘天’의 무리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지옥의 문이라도 열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무기와 황금을 미리 매입해 두었다가 가격을 올리기 위해 나라 간의 전쟁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청운의 말을 들은 삼황자의 낯빛이 돌변했다.

삼황자가 찻잔을 든 손을 벌벌 떨면서 말했다.

“저런 쳐 죽일 것들이 있나. 감히 이 신성한 황궁에 그런 세력들이 몰래 똬리를 틀고 있었다니. 몰랐으면 몰라도 이제 안 이상 그들을 발본색원해 뿌리째 섬멸해야겠네.”

청운이 삼황자의 지나친 분노가 조금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황자님, 이런 일일수록 조용하고 차분하게 대응하셔야 합니다. 제 생각에는 우선 그들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밝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자면 귀비와 내통하는 자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

“…….”

“또한, 그들이 절대 눈치채지 못하게 철저한 보안과 아주 은밀하고 신속하게 일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특히 고위직에 있는 환관과 ‘오(吳)씨’ 성을 가진 자를 주의해서 살펴야 합니다. 고위직 환관들의 용모파기를 한 번 봤으면 합니다. 제가 얼굴을 아는 자가 있습니다.”

청운은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잠시 후,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변방을 지키던 일부의 군사들이 황궁을 향해 오고 있는 줄 압니다. 황제 폐하의 윤허를 받아 속히 군사들을 다시 변방으로 되돌리도록 조치해야 합니다. 그게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삼황자가 즉시 청운의 말을 받았다.

“알겠네. 내 그리 조치하도록 하겠네. 그리고 자네가 말한 조사를 하는 데는 아무리 빨라도 닷새 이상은 걸릴 것이네. 그동안 자네가 이곳에 있는 걸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네.”

“…….”

“그래서 말인데 자네에게는 별 소용이 없을 수도 있지만, 내가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닷새 정도 황궁무고에 들어갔다 나오게. 다시 한번 약속하겠네. 황궁의 일만 바로잡히면 내 책임지고 자네의 부탁은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네.”

그의 ‘선물’이라는 말에 청운은 무거운 부담과 책임을 느꼈다.

그 선물이라는 말에는 기어이 자신을 구속하려는 삼황자 의지가 그대로 들어있는 것 같아 청운은 몹시 부담스러웠다.

청운은 삼황자가 기분 상하지 않을 정도의 표현으로 한두 번 거절했다.

하지만 그의 호의를 계속 거절하기도 그랬다.

자칫하면 그런 태도가 항명으로 비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최선이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시기와 상황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해서 선택한 방법이나 수단도 시간이 지나 상황이 바뀌면 한순간 그 선택은 최선이 아닌 것이 되고 만다.

심지어 차악이 되거나 최악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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