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169화 (169/184)

169화 무위검은 찰나에 깃든 영원을 이해하는 것이다.

청운의 텅 빈 내면에서 끊임없이 차오르는 무위의 빛과 어둠이 서로 상생하며 자라났다.

빛은 어둠을 다독이고, 어둠은 빛을 격려했다.

빛과 어둠이 서로의 부분이면서 전체이기도 하듯이.

모르는 우주는 빛이 아니라 암흑이 본질처럼 보인다.

빛은 암흑이 잠깐 균형을 잃을 잃었을 때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맨눈으로 쳐다볼 때의 착각이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깜깜한 우주는 빛으로 가득한 공간이기도 하다.

태초의 암흑과 마찬가지로 태초의 빛 역시 우주에 가득 차 있다.

그렇다, 그 태초의 빛으로 암흑의 균형을 흐트러트려야 한다.

그래야 자신에게 승산이 있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암흑을 끝까지 끌어당겨 한순간 녹여버리는 빛이어야 자신에게 승산이 있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빛의 반대가 암흑이 아니고, 암흑의 반대가 빛이 아니다.

빛과 어둠은 서로를 파괴하는 모순이 아니라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상생의 뿌리다.

모든 것을 전부 비운 ‘무위’에는 그 태초의 빛과 태초의 암흑이 동시에 존재한다.

‘무위’는 비어 있기에 이미 그 속에 빛도 있고 암흑도 품고 있다.

진정한 무위는 빛 속에 암흑이 있고 암흑 속에 빛도 같이 존재한 우주다.

‘무위’는 뭔가를 더 채우는 것이 아니라 더 비우는 것이기에 텅 빈 것처럼 보일수록 꽉 찬 것이다.

그래서 많이 비울수록 ‘무위’는 더 완성된다.

무위검은 바로 그 텅 비워진 자리에 빛이든 암흑이든 무엇이든지 채울 수 있는 여백의 검이다.

무위검은 눈이 내린 겨울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눈 덮인 겨울 풍경 속에는 이미 사라진 것 같은 지나간 봄, 여름, 가을이 다른 모습으로 다 들어있듯 무위 속에는 이미 흘러간 과거와 지금의 현재 그리고 다가올 미래도 다 들어있다.

진정한 무위의 경지는 모든 것이 비어 있는 바로 그 자리에 모든 것이 꽉 차 있는 상태다.

텅 빈 그 자리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지 않은 무위는 진정한 무위가 아니다.

청운은 지금 태초의 순간을 목격한 사람처럼 빛과 암흑의 공간 사이에서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청운은 과거 자신이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빛과 암흑의 찰나를 동시에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 빛과 암흑이 찰나이듯 진정한 무위검은 찰나에 깃든 영원을 이해하는 것이다.

찰나를 모르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찰나는 검이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영원이다.

그것을 깨닫자 전신의 감각을 질식시킬 듯한 암흑의 압력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하는 것 같다고 청운은 느꼈다.

무거운 압력을 서서히 벗어나는 청운의 내면에서 치솟은 치우의 서기와 전륜의 빛이 청운을 전신을 환하게 밝히기 시작했다.

청운의 전신에서 주체할 수 없는 빛과 서기의 홍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음에 불이 확 켜지듯, 닫힌 문이 확 열리며 빛이 쏟아져 들어오듯 한순간 뜻밖의 각성과 자각이 청운을 휩싸고 돌았다.

청운의 모든 감각과 지각이 순식간에 무한우주로 확장되는 것 같았다.

치우의 서기와 전륜의 빛 속에서 청운은 생각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실패를 걱정하는 자신을 두려워해라, 최선을 다하되 아직 발생하지도 않은 결과로 미리 자신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정신의 더 깊은 곳에서 다른 내가 태어난다.

한순간 청운은 상제의 까마득한 암흑의 심연 속으로 뻗은 희미한 실 같은 길이 언뜻 본 것 같기도 했다.

청운은 벼락처럼 극한의 진기를 끌어올려 자신이 방금 본 그 길로 자신의 전신을 잠식하며 들어오는 상제의 암흑에 치우의 서기와 전륜의 빛을 더하여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바로 그 순간 암흑과 빛의 찰나적 공존이 한순간 폭발하며 균형이 깨어졌다.

무영검의 끝에서 태어난 불이 활활 타는 태초의 유성 하나가 상제의 심장을 관통하며 태워버렸다.

상제의 영혼에 근원의 힘을 불어넣어 준 암흑이 점차로 옅어지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 가득 고여 있던 영겁의 암흑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빠져나온 암흑이 타 버린 재처럼 그림자도 없이 주변에 마구 흩날리고 있었다.

빛바랜 암흑 속에서 상제는 자신이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허무한 암흑 속에 휩싸인 채 자신의 심연 속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꺼져가는 모닥불처럼 가물거리는 그의 눈빛이 영혼이 거할 안식처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 안식에 들기 전 상재는 혼잣말하듯 이승에서의 마지막 말을 웅얼거렸다.

“치우의 전설에 전륜의 빛까지 얻다니… 우리 혈족의 한과 꿈이 또다시 물거품처럼 사라지는가. 아… 이 저주를 또 누가 풀어 줄 수…….”

한동안 암흑과 빛이 공존하며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공간에서 갑자기 암흑이 증발해버리자 그 공백의 공간에 들어찬 빛이 일순간 요동을 쳤다.

그 눈부심의 회오리에 청운은 질식할 듯한 현기증을 느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빛의 잔해처럼 풀어지는 그의 눈동자에 담을 넘어오는 이십여 명의 황궁 시위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일각쯤 후 청운이 감았던 눈을 떴을 때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절심마환 악무한은 검후의 검에 가슴이 쩍 갈라진 채 무생물이 되어 있었고, 혈미륵의 목과 몸은 따로 분리되어 핏물 속에 흩어져 있었다.

나머지 이십여 명은 오랏줄에 묶인 채 시위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혼원벽력도 팽추도가 다가와 청운을 부축했다.

그의 부축으로 간신히 일어선 청운의 몸 곳곳에는 뇌전이 스치고 간 것 같은 시커먼 상흔이 섬뜩하게 나 있었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장내를 살펴보던 청운의 눈에 반쯤 허물어진 본채가 눈에 들어왔다.

쩍 갈라진 바닥에 지하로 통하는 것 같은 계단도 동시에 눈에 들어왔다.

청운이 그곳을 향해 걸어가자 황궁 시위 둘이 급하게 불을 붙인 화섭자(火攝子)를 들고 청운을 따라왔다.

일 장쯤 아래로 내려가자 회랑이 나타났다.

다시 십여 장을 더 걸어 들어가자 방원 십여 장이 넘는 사각형의 공간이 나타났다.

상제의 무고(武庫)였다.

한쪽 벽면에는 여러 종류의 무공서적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다른 벽면에는 활과 창을 비롯해 온갖 무기들이 걸려 있었다.

정면의 벽에 석문 하나가 보였다.

청운은 수도로 자물쇠를 부숴버리고 석문을 열었다.

석실에는 온갖 희귀한 약재와 값비싸 보이는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청운은 환척을 찾았다.

바닥과 벽에는 없었다.

돌아서 나가려던 청운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 전체가 재질을 알 수 없는 자색의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청운이 천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물길과 바닷길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길이 그려져 있었다.

거기에는 길흉을 점칠 수 있는 별자리의 운행 길도 그려져 있었다.

테두리에는 무수한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그 글자들은 <환국의 서>에 쓰진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읽어보았다.

내용은 주로 물건을 사고팔거나 교환할 때 기준이 되는 도량형(度量衡)의 환산에 대한 것이었다.

청운은 무영검을 뽑아 들었다.

곧바로 환척을 조각조각 잘라버렸다.

환척은 당시에는 나라의 둘도 없는 보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길과 물산이 바뀌어 버린 지금의 시대에는 가치도 없고 의미가 없는 물건이었다.

다만, 그 상징성은 세상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했다.

상징은 사람을 끌어모아 선동하기에 가장 좋은 것 중의 하나다.

전장에서의 깃발처럼…….

환척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닌 가치중립적인 물건이다.

하지만 그 상징성이 누구의 손에 들어가는가에 따라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 선이 될 수도 악이 될 수도 있다.

청운은 저런 것 차라리 없어지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청운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환척을 부숴버린 것이다.

다시는 저런 것 때문에 현혹되는 사람이 없도록.

청운이 환척을 파괴해 버리고 밖으로 나왔을 때 황궁 시위 한 명이 다급하게 청운에게 달려왔다.

그는 황궁의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청운이 대장군의 저택으로 간 걸 눈치챈 사례감 병필태감과 귀비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청운은 천리신개 일행과 함께 다급하게 황궁으로 내달았다.

황궁의 오리 가까이 다가갔을 때 병장기 부닥치는 소리가 청운의 귀에 들렸다.

황궁으로 통하는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청운 일행은 다급한 나머지 그대로 성벽을 날아서 넘었다.

갑주를 입은 이천여 명이 넘는 병사들이 두 패로 갈라서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똑같은 갑주를 입고 있었기에 어느 편이 반란군이고 어느 편이 황궁을 지키는 군졸들인지 구분도 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반란군은 모두 왼쪽 팔목에 자신들 편을 구분하는 붉은 비표를 매고 있었다.

청운이 장내를 한 차례 쭉 훑어보았다.

한쪽 구석에서 백여 명의 황궁 시위들이 환관 무리와 혈전을 벌리고 있었다.

시위들은 자기 진영의 가운데 있는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 싸우고 있었다.

시위들이 보호하는 사람은 바로 삼황자와 황제였다.

환관 무리를 지휘하는 자는 바로 천산의 천도봉에서 보았던 파황군, 아니 병필태감이었다.

그가 손을 한 번씩 내저을 때마다 두세 명의 시위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그의 손에서 펼쳐지는 것은 바로 저주의 마공인 적린철인과 천녀혈수였다.

청운은 곧장 그에게로 날아가 그를 막아섰다.

무영검을 빼 들고 자신을 막아선 청운의 기도에 그가 흠칫 놀라는 것 같았다.

청운이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오랜만이오. 파황군. 아니, 병필태감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이를 잡듯이 천지를 뒤져도 찾을 수 없더니 황궁의 심처에 쥐새끼처럼 숨어서 이런 간악한 흉계를 꾸미고 있었군.

당신처럼 정체를 계속 바꾸는 사람은 항상 최악이지. 당신이 천주(天主)인가?”

청운을 쳐다보는 그의 눈빛에는 저주 같은 살기가 가득했다.

그는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한 자의 표정으로 청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다가 미친 사람처럼 웃기도 하다가 비장한 각오를 다지듯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그를 따르는 환관들의 눈빛에도 모든 것을 각오한 사람처럼 비장함이 가득했다.

주변의 환관들을 한 차례 훑어본 그가 시체 같은 얼굴의 혈안을 번들거리며 말했다.

“천주까지 알고 있다니. 그건 네놈이 죽어서 염라대왕에개 물어봐라. 대장군은 어찌 되었나? 하긴 네놈이 예까지 온 걸 보니 그런 건 물어볼 필요도 없겠지. <구환마검>으로도 안 된단 말인가.”

“…….”

“그때 천도봉에서 네놈을 죽이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 되는구나. 머저리 같은 모용후 때문에… 그런 놈을 철석같이 믿은 내가 바보지… 하긴 그때 죽으나 지금 죽으나 마찬가지이긴 하지. 내가 오늘 네놈을 반드시 죽일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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