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170화 (170/184)

170화 너도 결국은 나처럼 될 것이다.

청운이 입가에 조소를 가득 베어 물고는 말했다.

“병필태감의 자리까지 오른 당신의 수완과 화경을 훨씬 넘어서는 무공의 경지까지. 그런 재능을 당신 혈족의 한풀이가 아니라 세상을 구하는 데 사용했다면 당신 혈족도 살고 당신도 살았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구려. 당신네 혈족이 중원으로부터 받아온 차별과 고통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이런 방식은 절대 안 되는 것이오.”

“…….”

“삼계를 열면 그 겁난의 피해가 결국 당신네 혈족에게까지 미침을 왜 모르시오. 왜 하늘이 내린 재능을 그런 식으로 낭비하시오.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선처를 구하시오. 내가 목숨만이라도 건질 수 있도록 황제 폐하께 건의해보겠소.”

병필태감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청운을 노려보며 말했다.

“누가 누구의 목숨을 살려준단 말인가. 황제가 우리 혈족을… 우리 혈족이 황궁을… 아니면 중원이 우리 혈족을… 우리 혈족이 중원을… 우리 혈족과 중원은 이미 그런 사이가 아니다. 서로 저주와 피를 주고받으면 모를까. 절대로 선처를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사이가 아니다. 암, 그렇고말고.”

그가 한 차례 깊은 날숨을 내쉬고는 계속 자신의 말을 이었다.

“따지고 보면 너의 그 엄청난 재능 또한 하늘이 준 불평등 아닌가. 네놈은 왜 그런 재능을 너희 한족만을 위해 사용하느냐. 나와 네놈이 다른 게 뭐가 있느냐. 중원, 아니 한족은 자기들의 쪽수와 힘만을 믿고서 늘 우리 혈족에게 자신들이 행하는 불평등과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했지. 수천 년 동안이나 일관되고 한결같이.”

청운이 높낮이가 없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받았다.

“당신의 그 말은 일정부분 사실이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재능을 순전히 자신의 한풀이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사용할 때 세상도 망하는 것이오. 큰 재능일수록 자신의 사사로운 복수를 하는 데 사용되어서는 아니 되지요. 탁월한 재능은 당신 혈족의 복수를 위해 하늘이 준 것은 아니오.”

“…….”

“그것은 과시를 위해서도 복수를 위해서도 사용하면 안 됩니다. 하늘이 당신에게 그런 재능을 준 것은 타인을 배려하고 위로하는 데 쓰라고 준 것이지 세상을 피로 씻으라고 준 것이 아니오. 그걸 왜 모르시오. 모든 재능과 능력은 자신보다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마땅히 사용되어야 하오.”

청운은 하늘을 한번 바라보고는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야 그나마 하늘이 잘못 내린 불평등의 격차를 인간의 의지로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것 아니겠소, 그게 바로 재능과 힘을 가진 사람이 이 세상에서 해야만 하는 마땅한 도리이지요.”

청운이 계속 자기 말을 이었다.

“세상을 바꾸는 데 피가 필요하다는 당신의 논리는 권력과 복수에 눈먼 자기 합리화 일뿐이오. 인간 역사에서 권력을 향한 야욕과 눈먼 복수가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을 제물로 삼았는지 정녕 모르시오. 그대가 이 땅에 세우겠다는 새로운 세상 역시 결국은 당신 혈족의 권력을 향한 야욕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오. 그곳에는 당신이 믿는 그런 세상이 들어설 자이는 없소.”

병필태감이 한 차례 헛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는 건 세상의 당연한 이치다. 세상에서 모두가 꽃이 될 수는 없다. 내 논리가 강자만을 위한 지옥이라면 너의 논리는 고작 이 세상을 좀 더 평등한 지옥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 피장파장 도긴개긴이지.”

“…….”

“네놈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앞으로 네놈이 강한 만큼 너를 따르고 추종하는 사람과 세력이 생길 것이다. 그것이 네놈이 원하지 않아도 너를 권력의 아귀다툼 속으로 밀어 넣을 것이다. 너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다 바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너도 결국은 나처럼 될 것이다. 지금 네가 그렇게 혐오하고 증오하는 권력에 중독될 것이다. 으-하-하-핫.”

청운이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당신의 그 차갑고 모진 심성과 양심이 당신과 당신 혈족의 목줄을 죄는 것을 왜 모르시오. 그것이 바로 당신과 당신 혈족 둘 다를 죽이는 죽음의 그림자이지요.”

그가 다시 청운의 말을 즉각 반박했다.

“양심이라… 그건 바보들이 자신을 쳐다보며 괴로워하는 거꾸로 된 거울일 뿐이지. 하긴 네놈은 정말 화가 날 정도로 반듯한 사람이야. 나 같으면 그렇게 한결같이 자신의 욕망을 속이며 하늘과 땅 사이를 걸어 다니는 것조차 느끼할 뿐이지. 그건 자신보다 더 나쁜 인간들을 보며 즐기려는 못된 심보에 불과할 뿐이지. 나는 내 욕망을 속이지 않고 살았을 뿐이지.”

“…….”

“네놈이 늘 선하고 양심 바르게 산다고 다른 사람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선하다는 기준이 다 다른 법이거든. 뭐가 악덕이고 뭐가 미덕이냐. 네놈의 기준으로 타인의 악덕 함부로 매도하지 마라. 그건 고마움을 모르는 배은망덕한 짓이지. 네놈은 특히 타인의 악덕에 빚진 게 참 많아.”

“하지만…….”

“그동안 다른 사람의 악덕과 대비되면서 네놈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빛이 났더냐! 봐라! 네놈이 모르는 네 몸의 시커먼 그림자가 네놈의 몸에 얼마나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지. 내가 나를 다 모르듯이 네놈 역시 너를 잘 모를 뿐이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모르는 자신의 백일몽을 살고 있을 뿐이지.”

병필태감은 주변을 한번 훑어보고는 말했다.

“그 착각의 백일몽 속에서 악덕과 미덕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누구의 꿈에도 죄악은 없어. 꿈속에선 미덕도 악덕도 모두 꿈일 뿐이지. 차라리 복수를 꿈꾸며 권력과 부귀를 추구하는 것만이 좀 더 솔직하게 사는 것 같은 삶이지. 사람은 누구나 한껏 자신의 쾌락을 누리며 살 권리가 있지. 나는 내 쾌락을 존중하며 살았을 뿐이야.”

“…….”

“그건 피를 쏟으면서도 쟁취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지. 왜, 덜 즐거운 일은 해도 되고 더 즐거운 일은 하면 안 되는지 도무지 나는 이해가 안 되네. 물론 자신의 삶을 가장 즐기는 사람이 가장 많이 타인의 피를 흘리게 하는 법이기는 하지.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쾌락의 술잔에는 누군가의 피도 같이 들어있는 법이거든.”

청운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의 핏속에는 사람이 없소. 오직 짐승만 가득한 것 같구려. 당신은 수많은 타인의 피를 쾌락의 제물로 바치면서 당신 자신은 절대로 그 제물이 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오. 그게 바로 당신의 가장 큰 죄악이오.”

그가 무심한 표정으로 청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네놈 말이 맞다. 나는 지금껏 남의 피로 나를 즐기며 살았지. 네놈이 평생 자신의 욕망과 쾌락을 부정하며 살았듯이. 하지만 나는 그걸 부정하지 않고 살았을 뿐이지. 세상의 그 누구도 자신의 피를 희생해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는 없는 법이지. 그건 꼴 보기 싫은 지독한 위선일 뿐이지.”

그는 똑같은 내용을 말만 약간 바꾼 채 계속 떠들었다.

그의 장황한 떠벌림과 교묘한 논리는 그의 감언이설을 돋보이게 하는 화려한 장식물 같았다.

청운은 병필태감의 저 음흉하고 변화무쌍한 천변만화의 화술에 소름이 확 끼쳤다.

게다가 마치 무슨 신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자신의 신념을 확신하는 태도는 더 지독한 소름이 끼쳤다.

청운이 그의 번들거리는 혈안을 노려보았다.

그가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을 계속 떠벌리자 청운은 분노는 참지 못하고 일갈했다.

오래 듣고 있으면 자신도 그 이상한 논리에 감염될 것 같아서.

“당신의 생각 속에는 타인의 피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구려. 내가 오늘 그 피를 깨끗이 닦아드리겠소. 더 이상 당신과 같은 공기를 마시고 싶지 않소. 그런데 당신과 같은 혈족인 귀비는 어디에 있소.”

그가 금방이라도 피가 뚝뚝 흐를 것 같은 혈안을 번들거리며 말했다.

“귀비의 행방은 나한테 묻지 말고 능력이 출중한 네놈 스스로 찾아봐라. 죽음이 걸린 싸움은 너무 오래 끌면 안 되지. 그러면 각오가 흔들릴 수 있지. 죽으면 생각도, 말도 모든 것이 끝이지. 당연히 너와 나의 이런 쓰잘데기 없는 말싸움도. 자, 이만 시작하자.”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읽을 수 없는 그의 혈안은 한 번 빠지면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한없이 깊은 무저갱의 나락 같았다.

그와 마주서자 청운은 설산에서의 두려움과 공포가 되살아나는 것 같은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양손을 들어 올리자마자 무시무시한 장력이 벼락처럼 청운의 전신요혈로 쇄도했다.

청운은 그가 장황한 말을 늘어놓을 때부터 이미 그의 급습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는 원래 그런 야비한 자였다.

그의 장력이 자신을 향해 짓쳐 오는 순간, 청운은 여러 초식을 연동된 마치 검기의 폭포를 쏟아붓듯이 그의 장력을 모조리 베어버렸다.

그의 장력은 마치 쇳조각이 들어있는 것처럼 무거우면서도 방금 지옥에서 꺼낸 불이 들어있는 것처럼 뜨겁기도 했다.

적린철인이었다.

순식간에 십여 초가 교환되었다.

청운과 병필태감의 신형은 빨라도 너무 빨라 마치 두 개의 다른 섬광이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청운 일행이 장내로 들이닥쳤을 때 잠시 소강상태를 유지하던 다른 곳의 싸움도 청운과 병필태감의 싸움을 기점으로 다시 치열한 혈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실체와 환영을 구분할 수 없는 병필태감의 무수한 장력과 장영이 청운이 움직이는 모든 방위를 선점하고 차단했다.

그의 장력은 어느 때는 산사태가 난 비탈진 산에서 바위가 굴러 내리는 것 같았다가 또 다른 어느 순간에는 마치 거대한 화로에서 열기가 번지는 것처럼 청운이 움직이려는 모든 공간에 쏟아졌다.

하지만 청운의 무영검 또한 가만있지 않았다.

무영검은 바위가 굴러 내릴 때는 바위를 자르고 화롯불이 쏟아질 때는 세상에서 가장 탄탄한 검막을 만들어 그 열기를 모두 튕겨냈다.

청운이 하늘이라 생각하면 그의 장력은 어느새 하체로 짓쳐 들고 있었고, 청운이 앞이라 생각하면 그의 장력은 어느새 등 뒤를 때리고 있었고, 삼 장 밖이라 생각하면 돌연 눈앞에서 그의 장력이 들이닥쳤다.

예측도 추측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장력은 실체라 생각하면 환영이었고 환영이라고 생각하면 순식간에 실체가 되어 청운을 짓쳐왔다.

실체와 환영이 뒤범벅된 그의 장력은 청운이 있는 모든 곳에 존재했다가 청운이 사라진 모든 곳에서 부재하기를 반복했다.

그것은 마치 청운의 신형만을 따라다니는 그림자처럼 청운을 빠르게 물러나면 청운보다 더 빠르게 따라붙었고, 청운이 도약하면 청운보다 먼저 도약했고, 청운이 신형을 숙이면 청운보다 더 낮은 그림자가 되어 청운을 덮쳐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생각지도 않은 위치에서 환영처럼 갑자기 무수한 장영이 나타나 청운을 후려쳤다.

막으면 피할 수가 없었고 피하면 막을 수가 없었다.

그의 공격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밀물의 파도처럼 앞의 장력을 뒤의 장력이 밀어내듯이 연이어 덮치고 또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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